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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북한 간첩이 남파"? 박정희 군부의 놀라운 '소설'

5.16 군부의 경주유족회 김하종 '빨갱이' 만들기

등록 2020.10.23 19:50수정 2020.10.2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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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김하종 ⓒ 박만순

 
서울시 중구 필동에 있는 혁명재판소를 들어서는 김하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우리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1961년 11월 13일은 '경주피학살자유족회사건' 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피고석에는 유족회장 김하종(28)과 유족회 총무이자 김하종의 쌍둥이 동생인 김하택(28), 부회장 최영우(54), 상무 신경시(27)가 나란히 앉았다. 10여 분 후 "일동 기립"하는 소리에 재판장과 판사들이 입장했다. "일동 착석" 소리에 피고와 방청객 들이 자리에 앉았다.

검찰관(검사)이 공소장을 낭독했다. "피고 김하종 등은 북한 공산괴뢰집단이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적화할 목적으로 불법 남침하고..."로 시작된 공소장은 해괴한 논리 그 자체였다. "6.25동란시 남로당원이나 보련원(보도연맹원의 약칭), 기타 좌익분자들은 공산괴뢰군과 통모해" 북괴군에게 식량 및 정보를 제공하고, 자유진영인사 학살, 전쟁물자의 약탈을 통해 국군의 작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김하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주 내남면 민보단장 이협우가 학살한 200여 명의 민간인들은 남로당원도 아니고 보도연맹원들도 아니었다. 경주는 인민군 비점령지역이었기에 동조나 협력할 이유도, 기회도 없었다. 단지 딸을 민보단원에게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남면 덕천리 주씨 일가족 9명이 불에 타 죽었고, 소 판 돈을 민보단원에게 강탈당한 내남면 명계리 김씨 일가족 16명이 집단학살 당했다. 그렇게 민보단에 의해 죽은 사람만 약 200여명이다. 그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1960년 9월 5일 김하종은 '경주유족회'를 결성했다.

"4.19때 간첩이 대량 남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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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경주유족회를 비롯한 피학살자 유가족들은 감옥에 갇히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 자료사진

 
윤홍렬의 공소장은 이어졌다. "우리 국군과 경찰은 국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북한군에) 응전한 결과 적색분자의 일부가 전투행위 중 사망하고..." 김하종은 '야, 이 미친 놈아'라고 소리칠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공소장은 '소설'이었다. 아니, 왜곡 그 자체였다. "4.19혁명 이후 혼란의 와중에 (북한은) 대량의 간첩을 남파하여"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렸는데, 피고들이 부화뇌동했다는 내용이었다. 피고들은 6.25에 사망한 좌익분자들을 애국자로 가장시키고, 군인과 경찰이 선량한 국민을 학살한 것으로 왜곡선전했다는 주장이었이다. 이는 북한공산 집단에 이로운 반국가행위라는 말도 덧붙였다.

공소장을 읊은 후 윤홍렬 검찰관은 구형을 시작했다. "김하종 무기징역, 김하택 무기징역, 최영우 징역 10년, 신경시 징역 8년"(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4.19 때 북한의 간첩이 남파되었다는 것은 이때 재판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주장된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대량남파'라니, 어불성설이다. 또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민간인학살은 북한군과의 전투 중 발생한 게 아니다. 대한민국 군·경이 후퇴하면서 비무장한 민간인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전쟁범죄'에 불과했다.

재판정에서 손을 깨물어 혈서를

갑자기 피고 김하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결심한 듯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내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정운 재판장을 비롯한 배석판사들이 깜짝 놀랐다. 재판장은 "정리, 피고를 빨리 의사에게 보내게"라고 지시했다.

김하종 경주유족회장은 공판 과정에서 검찰관과 판사의 심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자 손가락을 깨물어 항의했다. 검찰관의 공소장은 사실 왜곡을 뛰어넘어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특히나 4.19 때 간첩이 대량 남파되었고, 유족회가 이들과 접선한 것처럼 서술한 공소장에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김하종은 손가락을 깨물기 전에 재판장에게 항의했다.

"우리 가족을 학살한 이협우는 사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피해자인 우리가 와 이적행위를 했다는교? .... 위령제를 한 것이 뭐가 죄인교. 우리 아버지, 형제가 어디서 죽었는지 알려 달라는 게 죄인교?"

김하종은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재판장과 검찰관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약 80일 후에 있은 선고공판에서 김정운 재판장(육군 준장)은 "김하종 징역 7년, 김하택·최영우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신경시 무죄"를 선고했다. 1962년 1월 31일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코미디였다.

보련계 척결 규탄대회

"와"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 때려 부셔"라는 외침에 몽둥이를 들고 온 이들이 책상과 사무집기를 때려 부셨다. 사무실에 있던 스물한 살의 서봉수(가명)는 사무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1960년 11월 2일 경주유족회 사무실에 난입한 이들은 유리창을 깨뜨리고 책상과 사무집기를 부셔 버렸다. 30여 분 난동을 부린 이들은 유족회 간판을 떼어갔다. 또 사무실에 보관 중이던 서류와 유족회기(旗)도 탈취해갔다.

스스로 '군경유족회'라 밝힌 이들은 '빨갱이들은 자폭하라'는 내용의 선전물을 시내에 뿌렸다. 그리고 경주유족회 사무실을 습격한 것을 '구 보련계 규탄대회'라고 일컬었다. 11월 3일자 <조선일보>도 경찰 자료를 인용해, '구 보련계 규탄대회'에 군경유족회원 500여 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경북유족회 조사부장 이원식은 11월 6일 경북유족회원 60명과 함께 경주시내 한복판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승만)독재의 앞잡이 살인마들을 처단하려는 본 유족회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자 누구냐'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작성, 대구시내 요소에 붙이고, 언론기관과 혁신정당 및 사회단체에도 뿌렸다.

문제의 '구 보련계 규탄대회'를 벌인 이는 다름 아닌 경주 내남면 민보단장 이협우의 아내와 그 단원들이었다. 인원도 500명이 아니라 수십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경주유족회가 이협우를 고소한 것과 관련해 재판부를 압박하고, 유족회에 보복하기 위해서 이같은 일을 벌였다. 한국전쟁기 집단학살 가해세력이 피학살자 유족회에 자행한 만행이었다.

이 황당한 집회에 경찰은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고, 혁명재판소는 반국가행위의 증거로 제시했다. 이후 유족회 간판은 내남지서 중앙파출소에 보관돼 있었다. 혁명재판소는 경주유족회 사무실 난입에 대한 항의집회를 '이적행위'로 규정했다. 윤홍렬 검찰관은 "좌익분자와 싸우다가 전사한 군경의 유가족을 오히려 반민족, 반민주, 반혁명분자인 것으로 왜곡선전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사실관계를 180도 뒤집어 '김하종 빨갱이 만들기' 공작을 벌였다.

조용수와 이정재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경주유족회 김하종은 조용수와 이정재를 대면할 수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진 김하종의 감방 신입 신고식에서였다. "제 이름은 김하종이고 나이는 28세입니더." "젊은 사람이 와(왜) 여길 왔는고?" "반국가행위입니다." 김하종에게 이목이 쏠렸다. "뭔 반국가행위?" "경주유족회를 만들었다고 그래 됐습니다." 감방의 사람들이 모두 헛기침을 했다.

김하종이 있던 감방은 소위 '별들의 고향'이었다. 쓰리스타, 즉 육군중장 출신의 백인엽과 백남권 전 논산훈련소장(소장)은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다. 5.16 군사쿠데타 직전 김종필이 백남권 소장을 찾았다. "각하, 세상이 엉망입니다. 혁명을 해야겠습니다. 혁명 자금을 주십시오." "이 놈의 새끼 뭔 소리고. 당장 나가!"라며 거절한 백남권은 5.16 이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다. 김동복 대령은 '반혁명죄' 딱지가 붙어 있었고, <민족일보> 논설위원 이건호도 마찬가지였다.
 

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내 뭐(몇 년) 받았게?" "15년." "10년." 감방 동료들은 대부분 조용수가 10~15년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일본 조총련이 추진하는 '재일 조선인 북송 운동'에 반기를 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봉암의 뒤를 이어 '평화통일'을 주창한 언론인이었을 뿐이다. "내 사형선고 받았대이" 깜짝 놀라는 감방 동료들에게 조용수는 이야기했다. "일본에서 점을 봤는데, 내가 33세를 못 넘길 거라더만 딱 맞췄구만."

조용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감방에는 아침식사가 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간수의 "조용수, 소장 면회"하는 소리에 모두들 '아 죽으러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용수(1930~1961)는 서대문형무소 미루나무 옆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정치 깡패 이정재는 제1공화국의 주먹 서열 전국 1위였다. 그러던 그가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깡패 일소'라는 정략적인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정재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그가 저항하자 유도 6단 출신의 죄수 4명이 동원돼 그를 끌어냈다. 김하종은 조용수와 이정재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5.16 쿠데타 세력은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세력, 깡패 들을 모두 부정축재나 반국가행위로 몰아부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화했다. 경주유족회를 포함 전국의 '피학살자유족회'도 그 피해자가 되었다. 6.25때 학살당한 가족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를 알려달라는 것, 학살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것, 보상금을 지불하고 유골을 발굴해 달라는 것이 북괴에 동조하는 이적행위로 둔갑했다. 1961년 야만의 시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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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서울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 깡패 이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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