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이유로 해고... 20년 후, 한국 사회는 '그대로'

[주장]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사회적 소수자 고용 차별 철폐해야

등록 2020.10.05 11:26수정 2020.10.0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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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하라" 차별금지법제정부산연대가 지난 5월 14일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국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 김보성

 
상황 하나를 가정해보기로 하자. 이성애자인 당신은 추석 연휴가 끝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그런데 당신의 자리 위에 있던 짐은 상자에 담겨 있고, 직장 동료들은 당신의 시선을 피하기 바쁘다. 자초지종을 묻는 당신의 질문에도 묵묵부답이다. 당황하는 당신에게 직속 상사가 헛기침하며 말한다. "자네는 이성애자라 더 이상 여기서 일할 수 없네. 유감이지만, 해고일세." 이때, 당신의 반응은 어떠하겠는가.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일축할 수도 있다. 꿈이라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며 따져 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년 전, 이미 앞서 가정한 상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부당해고 사건이 있었다. 2000년 9월 26일 방송인 홍석천씨가 남성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자 출연 중이던 모든 방송사에서 일방적으로 프로그램 하차를 통보받은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한 부당해고는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지언정 계속되어왔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성적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동성애·양성애자 응답자 중 14.1%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해고나 권고사직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으며, 트랜스젠더의 경우 응답자 중 24.1%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비자발적으로 직장을 떠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출생 시 성별과 성별표현이 불일치하는 경우는 32.1%가 비자발적인 직장 이동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한국 사회 노동 현장에서의 트랜스젠더 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수치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소수자 혐오로 인해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의 공개는 곧 해고와 사회적 낙인찍기로 이어지고 있다. 앞서 소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에서의 아웃팅(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지향 내지 성별 정체성이 공개됨)을 경험한 동성애·양성애자 응답자의 28.1%가 비자발적 사직을 경험했다고 밝힌 반면, 그러한 경험이 없는 응답자의 경우 15.3%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차별이나 괴롭힘에 대한 항의․대응 경험을 가진 동성애·양성애자 응답자는 6.6%에 불과했다.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경우에도 20% 수준에 그쳤다. 일하는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실효성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낫지 않았을까.

물론 해고나 징계의 경우 근로기준법을 통해 규율할 수 있다. 그러나 성소수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은 법률을 매개로 성소수자에 대한 노동 측면의 차별이 갖는 부당성을 입증하고 규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마저도 성적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합리적 이유 없는 노동 측면의 각종 차별과 괴롭힘은 사실상 규율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노동 측면의 '복합 차별'에 따른 피해 또한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한국 사회는 변화의 흐름을 마냥 지켜만 보고 있다. 지난 6월 15일 미국 대법원은 민권법(The Civil Right Act of 1964) 제7조에서 정한 '성별에 따른 차별 금지'에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에 따른 차별 금지가 포함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바 있다. 대법관 9명 중 과반이 넘는 6명이 해당 판결에 찬성하였으며, 이들 중에는 '보수', '자유주의' 성향 대법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 대법원의 판결은 더 이상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노동 측면의 차별이 이념과 성향에 따른 의견 차이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과 같다.

방송인 홍석천씨 해고 이후 지난 20년 동안, 국회와 정부가 '평등의 제도화'라는 직무를 유기한 대가는 고스란히 성소수자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전가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노동 측면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 국회와 정부는 직무유기를 멈추고 마땅히 할 일을 찾아 곧바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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