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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아끼는 애민정신에서 쓴 사회시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38회] 그는 오래 전부터 애민정신이 남달랐다

등록 2020.10.07 18:19수정 2020.10.0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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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이다" 

마틴 루터의 말이다. 그 기한을 알 수 없는 유배자에게 어떤 희망이라도 없으면 생존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희망'은 저술을 통해 다음 세상에서 알아 줄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역사를 위한 삶'이라고 할까.

이 시기에 그는 아호를 사암(俟庵)이라 지었다. '기다릴 사(俟) 자'에 의미가 주어진다. 백세 후 즉 역사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가끔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이 못된 일을 잔뜩 저지르고는 '역사의 평가' 운운하는 짓거리와는 격과 결이 다르다.

뒷날 「자찬묘지명」의 벽두에 "호는 사암(俟庵)이고 당호는 여유당이라 한다"고 썼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그의 호를 '다산'이 아니라 '사암'이라 불러야 고인의 뜻에 충실할 것 같다.

밥과 술을 파는 노파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조선사회 하층민들의 실상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술꾼과 장사꾼들, 하급관리와 농민ㆍ소리꾼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의 행태는 서로 싸우거나 하소연, 관에 대한 원망 등 가지가지였다. 자신은 여유 있는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높고 낮은 관직, 어사 노릇도 하고 목민관이 되었는가 하면, 임금의 측근에서 판관의 역할도 해보았다.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았지만 어디까지나 관의 위치에서였다. 그래서 피상적이었다.

해미에서 열 달 남짓 그리고 강진에서 긴 유배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야 백성들의 실정이 얼마나 비참한 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관리들과 양반지배층의 탐학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머무는 노파의 집은 작은 여론의 집합소였고, 만나는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민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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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 국립중앙박물관

 
그는 오래 전부터 애민정신이 남달랐다. 경학과 실학사상 그리고 한때 빠져들었던 천주교 신앙은 만백성이 평등하다는 애민정신에 근원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정약용의 애민정신과 관의 탐학을 고발하는 사회시를 한 수씩 골랐다. 먼저 정조의 측근으로 일하던 시절에 지은 「굶주린 백성」의 제2연이다.


  굶주린 백성

     (2)

 까마득한 하늘 땅의 만물 기르는 이치
 고금에 어느 누가 알 수 있으랴
 저 많은 백성들 태어났건만
 야윈 몸에 재해까지 겹쳐 
 메마른 산 송장이 쓰러져 있고
 거리마다 만나느니 유랑민들이네
 이고 지고 다니나 오라는 데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부모 자식 사이에 부양도 못하고
 재앙이 닥치니 천륜도 해치고
 상농군도 거지가 되어
 서투른 말솜씨로 구걸하노라
 가난한 집에서는 도리어 하소연
 부잣집에서는 일부러 늑장 피우지
 새 아니라서 벌레도 쪼지 못하고
 고기 아니라서 물에 살지도 못하네
 얼굴빛은 누렇게 떠서 야위고
 머리털 뒤얽힌 실타래 같다
 옛날 성현들이 어진 정치 베풀 때는
 늘 홀아비 과부 불쌍히 여기라고 말했으니
 이젠 그들이 진실로 부러울 줄이야
 굶어도 자기 한몸 굶을 테고
 매인 가족 돌아볼 걱정 없으니
 그 어찌 온갖 근심 맞이하리요
 봄바람이 단비를 이글어오면
 온갖 초목 꽃 피고 잎이 돋아나
 생기가 천지를 뒤덮으리니
 빈민을 구제하기 좋은 때라오
 엄숙하고 점잖은 조정의 고관들이여
 경제에 나라 안위 달려 있다오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제할 자는 그대들 아니면 누구일까. (주석 4)

  

보정산방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 김종길

 
백성을 사랑하고 지배층의 탐학을 고발하는 시 중에는 「남근을 잘라내다(哀絶陽)」가 대표적일 것이다. 1803년 강진에서 들었던 사연 즉 군역(軍役)의 부조리 때문에 남편의 생식기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읊었다.

남근을 잘라내다니

갈밭 마을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길어라
고을문 향해 울다가 하늘에다 부르짖네
수자리 살러 간 지아비 못 돌아올 때는 있었으나
남정네 남근 자른 건 예부터 들어보지 못했네
시아버지 초상으로 흰 상복 입었고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 손자 삼대 이름 군보에 올라 있다오 
관아에 찾아가서 잠깐이나마 호소하려 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처럼 지켜 막고
이정(里正)은 으르대며 외양간 소 끌어갔네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자 삿자리에는 피가 가득
아들 낳아 고난 만난 것 스스로 원망스러워라
무슨 죄가 있다고 거세하는 형벌을 당했나요 
민 땅의 자식들 거세한 것 참으로 근심스러운데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준 이치기에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불깐 말 불깐 돼지 오히려 서럽다 이를진대
하물며 뒤를 이어갈 사람에 있어서랴
부잣집들 일년 내내 풍류 소리 요리한데
낟알 한톨 비단 한치 바치는 일 없구나
우리 모두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해 차별하나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鳲鳩篇)을 읊노라. (주석 5)


주석
4> 정약용 저, 박석무ㆍ정해렴 편역주, 『다산시정선(상)』, 104~105쪽, 현대실학사, 2001.
5> 앞의 책, 하권, 44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다산 #정약용평전 #정약용 #다산정약용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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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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