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20:10최종 업데이트 20.10.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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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청와대 만찬석상에서 건배를 하고있다. 1979.7.1 ⓒ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은 친미적이었지만, 집권 후반기에는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1970년대의 박 정권은 노무현·문재인 정권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미 관계에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였다.

미국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국의 뜻과 배치되는 방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다. 후반기의 박 정권은 자주국방을 명분으로 그런 식의 핵 보유를 시도해서 한미 관계를 갈등 상태로 몰아갔다.


그렇다고 1970년대의 박정희를 반미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그는 미국의 패권적 행태를 바로잡고 한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약화를 막고자 미국과 대립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취약한 국민적 기반을 외국 군대의 힘으로 보완하고자 한미 동맹에 의존했다. 기존의 한미 관계를 어떻게든 지킬 목적으로 미국과 대립했으므로 박정희의 '반미'는 김일성·호메이니·카스트로의 반미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종의 '과격한 사랑싸움'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랑 싸움의 시기에 박정희와 정면 충돌한 미국 지도자가 있다. 올해 96세인 지미 카터(재임 1977~1981) 전 대통령이 바로 그이다.

"무명의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

미국 동남부의 꼬리 같은 부분이 쿠바 위쪽의 플로리다주이고, 그 위쪽이 조지아주다. 박정희가 한국 동남부인 경북에서 출생했다면, 카터는 미국 동남부인 그곳 조지아에서 1924년 10월 1일 태어났다.

일곱 살 많은 박정희가 빈농 가문에서 자란 데 반해 카터는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카터가 태어난 병원의 간호사였고 아들과 이름이 똑같은 아버지는 땅콩 농장과 잡화상을 경영하는 부유한 지주 겸 사업가였다.

조지아공과대학과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해군 장교가 됐다가 29세 때인 1953년 대위로 예편한 지미 카터는 가업인 땅콩농장 경영에 주력하다가 10년 뒤 민주당 출신의 상원 의원이 되고 다시 7년 뒤인 1970년 46세 나이로 조지아주 주지사가 됐다. 미국이 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전쟁에서 빠져나온 지 3년 뒤인 1976년 11월에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제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카터가 대선 운동을 거쳐 세계 지도자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2016년 11월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한미동맹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그로부터 50년 전에 선출된 지미 카터 역시 동일한 변화를 시도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트럼프처럼 카터도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카터는 대통령 후보 때부터 주한미군 및 주한 핵무기 철수를 주장해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한 것은 그가 표방한 인권외교 및 도덕외교에 입각한 일이었다. 그가 미국 지배층과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면서까지 그런 노선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에 개입했다가 단순히 '패전'에 그치지 않고 '부도덕한 참전'이라는 불명예까지 쓰게 된 197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는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대외전략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조성됐다. 이런 민중의 열기가 카터에게 힘이 됐다. 기존의 냉전 정책에 반하는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그의 외교노선이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리처드 닉슨 정권의 부조리를 드러낸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런 반성의 열기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이로 인해 카터의 인권외교·도덕외교는 백악관의 정책이 되면서 한미관계에도 영향을 주게 됐다.

2003년에 <미국사 연구> 제17권에 수록된 김봉중 전남대 교수의 논문 '전환기의 미국 외교와 카터 인권외교의 등장'은 "1976년 조지아의 무명의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다"고 한 뒤 카터 출현의 배경을 이렇게 요약한다.
 
베트남의 비극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굵직한 사건은 물론, 오랜 냉전의 해묵은 이념의 사슬은 더 이상 국민들의 마음을 포획하지 못하고 있었다. 닉슨-키신저-포드로 이어지는 외교의 앙시앙 레짐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는 카터는 자연스럽게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하였다.

카터는 인권을 외교의 지렛대로 들고 나왔고 국민들은 그것을 지지했다. 베트남전쟁으로 말미암아 대내외적으로 구겨진 미국의 자존심과 미국의 이상과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카터에게서 미국 외교의 새로운 전환점을 발견하고자 했다.
 
트럼프가 기존의 한미동맹을 미국의 이익에 맞게 재구성하려는 데 반해, 카터는 기존의 동맹을 인권과 도덕의 관점에서 재편성하려 했다. 이 같은 카터의 노선은 박정희를 불안하게 했다. 카터의 노선이 미국의 전통적인 냉전 전략과 다른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한미군 철수를 표방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카터 행정부 이전에도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했다. 베트남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던 1969년부터 감축 준비에 착수해 닉슨 행정부 시기에 주한미군 제7사단 2만여 명을 감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터가 인권외교까지 표방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기에 박정희는 한층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회담장에서 카터와 싸운 박정희

박정희는 또 다른 면에서도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데탕트(화해) 분위기로 냉전 구도가 약해지는 상황에 대응하고자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대결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그런 직후에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종신 독재 체제를 굳힌 그는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그것을 막느라고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정권 수호에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땅콩 농장주'가 등장해 주한미군을 '수확'해 들이겠다고 공언했으니, 박정희의 불안감은 더욱더 배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터가 취임 6일 만에 철군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으니 박정희의 반감과 공포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와 카터는 반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두 사람이 한미정상회담장에서까지 설전을 벌이게 한 원인이 됐다. 사단법인 한미클럽이 존스홉킨스대학 제임스 퍼슨 연구원으로부터 입수해 2018년 국내 언론에 공개한 기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박정희는 철군 철회를 강력히 요청했고 카터는 인권보호와 긴급조치 철회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박정희의 요구에 대해 카터는 '주한미군의 동결을 약속할 수 없다'고 냉정하게 거부했고, 카터의 요구에 대해 박정희는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론을 거론하며 '국제적 인권 기준을 한국에 적용할 수 없다'며 맞받아쳤다.

양측의 감정이 안 좋았다는 점은 돈 이야기가 나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트럼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카터 입에서도 금전 문제가 튀어나왔다. 한국이 방위비를 더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카터는 "북한은 국민총생산(GNP)의 20%를 국방비로 쓰는데 한국은 5%밖에 안 쓴다"라며 한국의 방위비를 늘릴 것을 주문했고, 박정희는 "우리가 GNP의 20%를 국방비에 쓴다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며 민중을 두려워하는 지도자인 듯이 발언했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미합중국 대통령이 감정적 대립까지 보이는 이런 상황은 일단은 한국 대통령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국력을 배경으로 하는 이 대결에서 박정희가 유리한 고지에 서기는 힘들었다.

미 군부의 반발... 오히려 코너에 몰린 카터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동두천시 캠프 케이시 아파치 레인지에서 열린 주한미군 2사단·한미연합사단의 최고 전사 선발대회에서 미군 장병이 부상자 모형을 끌고 오르막을 달리는 테스트를 받고 있다. 2018.4.10 ⓒ 연합뉴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카터는 미국 대통령이지만 냉전이라는 대세를 거스르는 입장에 있었다. 박정희는 한국 대통령이지만 냉전에 편승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카터의 지시를 받아야 할 미국 군부가 박정희를 편드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카터가 박정희와의 대결에서 자국 국가권력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주한미군(USFK)이 포함된 미국 군부의 그 같은 이상 징후에 관해 지난 3월 <한국동북아논총> 제25집 제1호에 실린 윤형호 건양대 부교수의 논문 '박정희-카터와 문재인-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딜레마: 국제정치 패러다임과 대통령의 리더십'은 "미 군부 지도자들은 카터에 반기를 드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며 "1977년 USFK 참모장 싱글러브(John Singlaub) 소장은 카터 항명 발언으로 직위 해제되었다"고 한 뒤 아래의 사례들을 소개했다.
 
미 군부 지도자들은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대응책을 권유해주었다. 베시 장군은 1977년 5월 19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비밀 접촉을 자청하며 박 대통령의 대응 방안까지 훈수해주었다. 요지는, 철군은 전쟁을 유발할 수 있어 이행되지 않을 것이나, 이행될 경우를 대비하여 사전 보완조치를 강력히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카터가 철군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미군 수뇌부가 한국 중앙정보부장을 몰래 만나 '카터 말대로는 안 될 것'이라며 '만약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카터에게 보상책을 강력히 요구하라'고 훈수했다는 것은 박정희와 카터의 대결에서 카터가 오히려 불리한 조건에 처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카터의 뜻과 달리 한미동맹이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78년에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미연합사 창설로 인해 한국군은 비상 상황에서 국제연합(UN)과의 협의 없이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해 미군과 공동 대응을 할 수 있게 됐다. 미국 대통령이 한미동맹 약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동맹이 오히려 강화됐던 것이다.

한미연합사 설치는 자주국방을 추구하는 박정희를 달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위 윤형효 논문에 소개된 조지타운대학 데이비드 스타인버그(David Steinberg) 교수의 주장처럼 통제 불능이 되어가는 박정희를 묶어두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시기의 한미관계에서는 카터의 의도와 달리 군사적 유대가 오히려 공고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카터의 인권외교가 미국 지배층은 물론이고 행정부의 공감대마저 얻지 못한 결과다. 카터에 대한 미국 민중의 지지가 국가정책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카터 당선 뒤 4년 만인 1981년에 강경파인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카터를 지지한 미국 민중의 염원은 제도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카터의 인권외교는 레이건 정권 출범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와 달리, 박정희의 노선은 미국의 기존 정책인 냉전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지배층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박정희와 카터의 대결은 적어도 군사 측면에서는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카터 재임 중에 박정희가 암살되기는 했지만, 그 후에도 살아남은 것은 카터가 희망하는 한미관계가 아니라 박정희가 희망하는 한미관계였다.

하지만 카터의 인권외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일정 정도 영향을 끼쳤고, 이 투쟁은 박정희 정권의 내분을 부추겨 김재규의 거사로 연결됐다. 박정희의 죽음이 구체제의 몰락으로 직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은 구체제를 약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정치 측면에서는 카터가 박정희에게 타격을 줬다고 볼 수 있다. 빈농의 아들과 땅콩 농장주 아들의 대결은 이렇게 정치와 군사 양 측면에서 엇갈리는 결과를 내며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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