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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한마디 덕분에 '칼럼니스트'가 된 사람

[서평] 정덕현 칼럼니스트의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

등록 2020.10.08 09:17수정 2020.10.0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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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된 tv ⓒ pixabay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여러분!"을 외치며 이 한 문장을 명대사로 남기고 당선된 그분을 보기 싫어 없앤 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렇다고 해서 TV 없는 일상에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다. TV가 사라진 자리는 사양 좋은 컴퓨터가 차지했다. 다양한 방송 콘테츠들은 적당한 이용료를 내고 다운로드해서 볼 수 있다. 단지 아쉬운 건 '본방사수'를 할 수 없다는 정도.

그렇게 TV 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영상보다는 각종 포털에 뜨는 기사들을 클릭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러던 몇 년 전 어느 날 드라마 리뷰 기사를 읽게 되었다. 드라마 속 장면들과 현실을 이은 글이 꽤 공감이 갔고 기사 작성자 이름을 보았다. 그렇게 대중문화칼럼니스트 '정덕현'을 알게 됐고 간간히 검색창에 이름을 넣어 검색해 기사들을 찾아 읽었다. 일종의 팬심이었다. 기사들을 읽으며 '이분이 드라마 관련으로 책을 낸다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얼마 전 진짜 책이 출간되었다.


이름하여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다. 다소 긴 제목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드라마 속 명대사에 저자의 경험과 삶들을 녹여낸 글들이다. 드라마의 전반적인 내용을 잘 모르더라도 책에 적힌 대사들과 저자가 담담히 써 내려 간 사적인 일상들의 글을 읽다 보면 공감의 울림이 작지 않다. '그건 드라마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느날, 우연히 칼럼니스트가 됐습니다 

저자는 드라마 같은 자신의 첫 번째 이야기로 계획에 없던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을 갖게 해 준 우연에 대한 경험담을 풀어낸다. 저자는 계획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든든한 직장을 가지고 싶었지만 삶은 항상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여기서 번 얼마로 이걸 채우고....'. 하는 그런 계획들은 속수무책으로 무산되었다.  사실 계획이라는 건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좌절감만 안겨주는 것이었다. 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기택이 아들에게 한 대사에 나는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계획을 하면 모든 계획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거든."
어떤 일들은 전혀 계획 없이 벌어져 삶을 바꿔놓기도 한다. 나에게는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쓰는 지금의 일을 하게 된 과정이 그랬다. 어느 날 동창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가 인터넷 매체를 시작하게 됐다며 내게 글을 한번 써보겠냐고 물어본 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칼럼니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기택의 말대로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었다.

새해가 되면 '어떤 다짐'들을 하지만 그 다짐은 '작심삼일'을 지나 칠일, 열흘 하다 서서히 사라진다. 내게도 올해의 다짐이 있었지만 가을을 넘어가는 지금, 계획에조차 없던 글을 쓰고 기사를 쓰며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게다가 요즘은 일상의 소소한 약속도 계획대로 진행되기 힘든 시절이 됐다.

몇 주 전 친한 동생과 점심 약속을 한 시기에 수도권과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그로 인해 거리두기가 격상되어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전에야 점심 대신 간단한 차 한 잔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일상이 불안의 연속이라 해서 계획 없는 삶을 예찬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계획을 벗어난 일들은 계획을 전제로 해야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그 동생의 만남처럼 말이다.

그렇게 계획 없이 뛰어든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은 저자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상업적으로 내놓은 글은 생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쓰고 싶은 글'과 '써야만 하는 글'의 차이는 심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책에는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의 극 중 주인공인 한세주가 성공한 소설가로서 안 팔리는 글을 굳이 "힘닿는 데까지는 노력해가며" 쓰겠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대사가 나와 있다.  


글을 읽으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오마이뉴스> 에디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송고한 글을 기사로 채택하려 하는데 가족과 관련된 글이라 올려도 괜찮을지 내 의향을 물었다. 그리고 기사로 채택되면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내리기 어려울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내적 갈등이 생겼다. 결국에는 송고한 기사를 삭제해 줄 것을 전화로 요청했다. 나에겐 '쓰고 싶은 글'이었지만 '쓰면 안 되는' 소재란 생각에서였다. 결국 전화를 끊고 눈물을 흘렸다. 내 글을 나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면서 왜 써 내려 갔는지에 대한 자책과 괴로움의 눈물이었다. 내적 갈등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소신을 접은 나 자신의 결정에 지금도 후회가 남는다.

내 안의 바리케이드였던, '쓰면 안 되는' 소재는 바로 시가였다. 난 집에선 당당하고 유머러스한 엄마, 아내이면서 산뜻하게 차려입고 외출할 땐 아이 셋 있는 아줌마 같지 않은 화려함을 '뿜뿜' 뿜어낸다. 하지만 시가에만 가면 나란 존재는 재투성이 자아가 되어 버린다. 보잘것없는 존재감이란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내 자존감이 그곳에선 바닥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도 신뢰받는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알리며 강단에 서고 방송에 출연하면서 자신도 모르던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우리는 굉장히 많은 얼굴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꿔가며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을 대할 때의 얼굴이 다르고,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면 그 시절의 얼굴로 돌아간다.  그러다 모임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 가면 또 다른 얼굴이 된다.  가끔 강연을 하러 무대에 오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이 내성적인 인간의 어느 구석에 이런 너스레를 떠는 얼굴이 숨겨져 있었나.(.....) 어려서부터 우리는 한 가지 얼굴을 강요받으며 살아왔다.  그것이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들을 스스로 검열하며 살아왔다.  연기는 어쩌면 연기자들만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더 많은 '내'가 있는 자아들.  저자는 이것을 '자아 컬렉션'이라 이름 붙였다. 기쁘면 기쁜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행복하거나 우울하면 그 기분 그대로 상황에 맞게 표현하는 내 안의 자아들. 옷만 TPO에 맞춰 입는 것이 아니라 자아도 TPO에 맞춰 드러내며 살아가야만 인생이란 무대에서 제대로 즐기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일상을 살아가며 여러 자아들을 만나다 보면 생각의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 방법으로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 하다가, 아이들과 감정의 격돌을 보일 때다.

공부 잘하는 게 인생의 정답이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소신껏 이야기해야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원래 그래'에서 '왜 그래'로 질문이 바뀌며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TV도 안 보는 내가 드라마 책에서 받은 위로
 

책 앞표지 ⓒ 가나출판사

 

저자 또한 대중문화평론가로 20년 가까이 글을 써오면서 어느 날 직업으로서의 딜레마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이 시대에 누군가를 비판하고 평가하는 일이 가능할까 싶었다.  직업이 비판하고 평가하는 일이니 이런 생각은 내게 큰 딜레마로 다가왔다.  그 딜레마의 고민 끝에 나온 건 '단정'을 피하고 '일반화'보다는 이것이 나의 의견이라는 걸 드러내는 '구체적 진술'을 해야겠다는 결론이었다.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포털 사이트 바로의 대표인 민 홍주가 배타미에게 하는 그 말은 내게 큰 위로와 위안을 줬다.  세상은 마치 '진리'가 유일무이한 것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무수히 많은 진리가 있다.
 
드라마는 다양한 삶을 롤 모델로 삼는다. 드라마 한 편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듯 어떤 드라마가 좋고 어떤 드라마는 나쁘다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드라마 중에는 웰메이드 드라마도 많다. 물론 시청률 높은 드라마 중에도 있지만 대부분 시청률은 낮지만 마니아층이 형성된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이야기한다.

모든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어필하여 '대박' 칠 수 없듯이 내 삶을 관통한 글 또한 모두가 공감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내 글이 소수의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위안을 받으며 인정받는다면 그것처럼 좋은 웰메이드 인생이 어디 있을까 자부하고 싶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글과 내 삶의 결이 맞닿는 순간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힘든 것은 아니란 걸 느끼게 해줘서 힘이 되기도 했다. 지금 자신의 일상이 다큐처럼 퍽퍽한 삶이라 느껴진다면 이 책을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드라마 한 편이 때론 우릴 숨 쉬게 한다'는 저자의 에필로그 문장처럼 '좋은 책 한 권이 때론 우릴 숨 쉬게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정덕현 (지은이),
가나출판사, 2020


#드라마 #명대사 #웰메이드 드라마 #인생의 명대사 #웰메이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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