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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한가운데 장애인시설...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지리산 활동백과] 남원 오순도순 사회적협동조합 윤수민 이사장을 만나다

등록 2020.10.12 10:31수정 2020.10.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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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소 3년차를 맞아 지리산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편집자말]
중증 발달장애인인 동생 혜정의 '탈시설'을 도와 보통의 세상 속에서 동거를 시작한 비장애인 언니 혜영은 말한다. "왜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될까?"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을 통해 장혜영 감독이 던진 이 질문은, 장애인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나아가 장애인뿐 아니라 그 가족이나 보호자가 짊어져야 할 생의 무게까지 감히 짐작하게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회적 돌봄이라는 허술한 망에 제 몸과 마음을 덧대어 촘촘하게 수선하려는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라 할까.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순도순 사회적협동조합'(이하 오순도순)도 그런 이들이 모여 움직이는 곳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합 이사장이자 남원아동발달센터 대표인 윤수민(54)씨가 있다. 

공부가 '일'이 되고, 일은 '의미'가 되고  
 

오순도순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윤수민 씨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전북 남원 시내 호젓한 주택가에 아동발달센터가 들어선 것은 2009년 12월. 지금은 직원을 비롯해 프리랜서 치유사들까지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공간을 채우고 있지만, 십여 년 전 그때는 오롯이 혼자였다. 

"서울에 살 때예요. 둘째가 8개월쯤 되었는데 자폐 증세를 보이더라고요. 병원에서는 돌은 지나야 진단이 가능하다 하고, 마냥 기다리자니 불안해서 자폐에 대해 알아보다가 언어치료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치료비가 상당히 비싸길래 그냥 내가 하자 싶어 언어치료 공부에 뛰어들었죠.

서울과 대구에 있는 학회를 오가면서 정말 열심히 배웠어요. 머지않아 아이는 정상발달로 돌아왔지만 저는 공부를 계속해서 언어치료사가 되었고요. 그러다 큰아이가 남원 산내에 있는 작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가족이 다 같이 내려온 거예요." 


아동발달센터 문 여는 시기에 맞추어 서울에서 남원으로 이주를 했다니, 낯선 곳에 정 붙일 새도 없이 먼저 창업이라는 큰일을 벌인 셈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 가끔 겁 없이 저지를 때가 있다"는 윤수민씨는, 그로부터 십 년만에 또다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오순도순을 만들어보자고 주변을 설득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차곡차곡 준비해 마침내 2019년 여름에 설립 허가를 받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회적협동조합'이었을까? 


"언어치료사다 보니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많이 만나왔어요. 오랜 세월을 그분들 덕분에 산 셈이라, 기회가 되면 장애인과 관련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또 개인적으로 공익활동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있기도 했고요. 사회운동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 생기면서 정리를 했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나 봐요. 애들 고등학교 졸업하면 복귀해야지, 하는 생각을 쭉 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러다 과거에 운동하던 분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공익활동가들에 대한 상담이나 심리치유가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공부를 해서 심리상담가가 되었죠. 이런 것들이 다 맞물리면서 오순도순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네요." 


윤수민씨가 과거에 열정을 쏟은 사회운동과 오순도순이 지닌 결이나 색채는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합이 내세운 두 가지 방향의 사업, 즉 '장애인 및 그 가족에 대한 지원'과 '공익활동가들을 위한 심리치료'는 누군가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어루만지는 일이며, 이는 그이가 오래도록 품어온 가치 혹은 신념과 일치한다. 더욱이 사회적협동조합이란 옷을 걸치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공적 활동의 장에 진입할 수 있기에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소소하고 가볍고 다양한' 지원이 필요해      
 

'장애인 자녀 가정의 부모 성교육'을 위한 공부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들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조합원 열한 명이 대부분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님과 치료사 선생님들이에요. 다 일을 하고 계셔서 오순도순을 통해 많은 것을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시민사회기관의 지원사업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요. 비록 지원금은 소소하지만요(웃음)."

올해 오순도순이 벌이는 '소소한' 사업 중에는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가 공모한 '2020 작은변화의 시나리오'에 선정된 '장애인 자녀 가정의 부모 성교육'도 있다. 성 자체를 금기시하고 특히나 장애인의 성이라 하면 더더욱 불편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런 주제를 선택한 건 어떤 의미였을까.  

"발달장애 아이들 중 어려서부터 자위를 시작하고 오래 하는 경우가 꽤 많아요. 우연히 성기 자극이 됐는데 기분이 좋으니까 계속 하는 거예요. 종종 때와 장소를 못 가리기도 하고요. 또 사춘기가 되면 성적 의사를 돌출적인 행동으로 드러내기도 해요. 그런 게 통제가 잘 안 되니까 부모들이 참 난감해하시죠. 장애인 성교육이 절실할 수밖에 없어요, 그 부모들에게는." 

예닐곱 명이 모인 가운데 일단은 같이 공부를 해보기로 하고 세 권의 번역서를 차례로 읽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럴 땐 어떻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고 싶었던 모두의 마음과는 달리, 책을 통해 애초의 기대를 충족하진 못했다고. 아니, 적어도 현재로서는 세상 어디서도 정답 같은 건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장애인에 관해서는 어떤 분야든 기존 연구나 자료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에요. 장애인 성교육도 보편적인 성교육에서 장애인을 살짝 건드려주는 정도인 것 같고, 그 방면의 전문강사를 찾기도 어렵죠. 어디 의존할 데가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우리가 더 공부하고 연구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이외에 '남원 공동체지원센터'와 함께하는 또 다른 사업들도 진행 중인데, 하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지적 수준을 지닌 장애 성인 여성들과 소통하는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공익활동가들의 내면 탐색과 관계 치유 프로그램이다. 둘 다 일상의 빈틈이나 마음에 난 구멍을 채워가는 잔잔한 내용으로, 윤수민씨는 "이처럼 소소하고 가볍고 다양한 활동들에 대한 지원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모임 시작 전에 장애 여성들의 욕구 조사부터 했는데, 다들 하는 말이 나도 친구랑 카페에 가서 차 마시고 싶다고. 문제는 같이 갈 친구도, 그렇다고 혼자 갈 여건도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에겐 흔한 일상이 그분들에게는 허용되지 않거나 스스로 하기 어렵다는 얘기죠. 그래서 모임을 할 때 교육보다는 그저 차 마시고 수다 떠는 시간을 가졌어요. 만족도가 매우 높아서 후속 모임도 이어가기로 했고요.

또 공익활동가들하고는 에니어그램을 진행했는데 좋더라고요. 서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쟤는 왜 저래'가 아니라 '저런 사람도 있구나'로 바뀌면서 관계 내 수용과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했지요."


동정과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 또는 상상               
 

오순도순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윤수민 씨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소소하고 가벼운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이 의식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 정책적 시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동정 아니면 혐오, 혹은 그 둘 사이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사회라면 오히려 그 중요성은 더더욱 강조돼야 마땅하다.  

"장애인의 날이 되면 안대를 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가 장애 체험을 하잖아요.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 내면에 가득한 이기심을 버릴 수 있을까, 장애인 특수학교를 혐오 시설로 보는 의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장애인을 그저 세금 갉아먹는 사람이라 여기는 편견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걸 고민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고민들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는 현실과 '다른' 상상을 해본다. 가장 번화한 시내 한가운데에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기관이나 시설이 들어서고, 어떤 장애를 지니고 있든 누구나 편하게 와서 먹고 놀고 쇼핑할 수 있는 '무장애 존'이 도시 곳곳에 생겨나는 것을. 또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어우러져 같이 공부하고 농사짓고 여행도 떠나는 즐거운 장면들을. 그러다 보면 '내 손으로' 이루고 싶은 어느 하나에 꽂혀 구체적인 설계도를 그리게도 된다. 

"언젠가는 장애 청소년과 성인이 함께 작업하고 교육도 받는 '데이케어센터'를 꼭 만들고 싶어요. 널찍하고 개방적이면서 농장이 있어 농사나 흙 만지는 일이 가능한 곳에다가요. 산내에 있는 실상사 같은 곳이면 딱 좋겠는데, 가능할까요?(웃음)"  

누구나 오순도순 살아가는 꿈                

문득 '오순도순'이란 낱말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사이좋게 서로 이야기하거나 지내는 모양'이라 되어 있다. 참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더도 덜도 아닌 이런 모양으로 사는 게 아닐까. 나 자신,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이 사이좋음을 점차 먼 데로 확장해가는 것. 그리하여 모르는 이의 일상과 안부까지 궁금해하고, 누구도 그런 관계의 망에서 제외되거나 배척당하지 않게끔 살피는 것.

오순도순 사회적협동조합이 이런 삶, 이런 세상을 부르는 손짓이면 좋겠다. 그 손짓에 이끌려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이 점점 큰 날갯짓을 이뤄간다면, 누구나 오순도순 살아가는 꿈이 결코 꿈만은 아닐 테니까. 

글 | 자야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Author 자야
새벽 요가, 산책길의 노래,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용기 있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을 좋아하는 함양 주민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와 아름다운재단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장애인권 #발달장애 #성교육 #사회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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