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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은 학벌주의마저 바꿀 것이다

[차별금지법과 청소년인권 ③] 학력, 출신 대학 차별... 채용에서 정말 필요할까?

등록 2020.10.07 17:05수정 2020.10.0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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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대중공업이 2020년 하반기 공개 채용 과정에서 출신 대학에 따라 인원 제한과 자격 요건을 달리하는 차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학 서열 체제에서 이른바 '하위권 대학'일수록 더 적은 채용 인원이 배정됐고 학점과 토익 점수는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리 놀라운 사건은 아니다. 2018년에도 하나은행 등 은행권에서 특정 대학 졸업 지원자들의 면접 점수를 사후에 올려서 합격시킨 사건이 알려졌다. 비록 공론화되지는 않았더라도,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취업 과정에서 출신 대학에 따른, 또는 학력에 따른 차별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아니, 어쩌면 적잖은 사람들은 '더 좋은 대학'에 가려고 입시 경쟁을 치를 때부터 취업이나 승진 등의 과정에서 대학 간판에 따른 차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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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문 ⓒ 연합뉴스

 
올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 국민들이 가장 심각한 차별로 꼽은 순서는 성별-고용 형태-학력·학벌-장애-빈부격차순이었다. 학력·학벌은 32.5%로 3위를 차지했다. 2016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청소년 차별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에서 초·중·고 학생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물은 문항에 외모 및 학업성적-학력·학벌 및 장애-나이-성별순으로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전체 국민 대상 조사이든 청소년 대상 조사이든 모두 성적과 학력·학벌에 따른 차별이 3순위 내에 들어가는 보편적이고도 심각한 차별로 꼽힌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학력·학벌 차별이 심각하다고 느끼며 적잖은 불만을 품고 있다. 한국 사회의 학력·학벌주의가 문제라는 지적과 우려가 제기된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해결의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실은 우리 사회에서 학력·학벌 차별은 '없애야 할 부당한 차별'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학력·학벌 차별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만, 학력·학벌에 따른 차별 대우는 정당하다는 이념이 주류에 있는 모순된 상황이다.

실제로 학력·학벌 차별은 종종 '차별'이 아닌 '공정한 경쟁의 결과'라고 이야기된다. 학력·학벌주의는 특정 학교 동문들의 패거리 문화나 서로에게 특혜를 주는 현상 이상으로, 일종의 '능력주의에 따른 신분제' 현상이다. 시험 성적이나 입시의 결과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간주되고, 대학 간판은 능력·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포장된다. 따라서 시험 성적이나 대학 이름에 따라 차등 대우를 하는 것은 공정하다는 논리이다. 학력·학벌은 노력과 고생으로 이룬 성과이자 능력을 입증한 결과 획득한 지위, 일종의 신분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에선 학력(學歷)을 차별 금지 사유 중 하나로 예시하고 있다. 학력은 교육기관의 졸업 및 이수, 학위 취득 등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 수년 전부터 교육운동단체들은 '출신학교 차별금지법'을 개별적 차별금지법의 하나로 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고용 등 노동, 교육기관·직업훈련기관 등에서 학력에 의한 차별 행위가 금지된다. 앞서 예로 든 채용 과정에서의 학력 차별이 명시적 법률에 의해 금지되고,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가능성


사실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이 처음 추진됐을 당시 경총 등 기업들이 반대하고 나섰던 주요 이유 중 하나가 학력 차별 금지 문제였다. 그들은 기업이 학력에 따라서 채용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심지어는 학력이 아니면 무엇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느냐며 학력 차별 금지에 반대하곤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데 꼭 대졸이어야 하거나 특정한 대학교를 나오는 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실제 직무 수행에는 직접적 상관이 없어도 대졸 자격을 기본으로 요구하고,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면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가질 기회를 얻게 되는 상황이다. 이는 학력이 높을수록, 입시 성적이 좋을수록 더 우월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신분제나 다름없다.

'무엇을 보고 채용하느냐'라는 질문에 차별금지법은 이렇게 답한다. 먼저 법이 금지하는 차별을 "합리적 이유 없이 (……)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로 정의함으로써, 분리·구별 등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나아가 "특정 직무나 사업 수행의 성질상 불가피한 경우"는 차별로 보지 않는다고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국가인권위원회의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 시안) 이를 '진정직업자격'이라고 부르는데, 가령 직원을 고용할 때라면 그 직무를 하는 데에 진정으로 필수적인 자격만을 기준으로 둘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차별금지법이 효력을 발휘한다면 전방위적 학력·학벌 차별과 무분별한 스펙 경쟁이 약화될 공산이 충분하다. 소위 '명문대' 졸업장이 진정직업자격으로 합리적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듯하다. 나아가서는 대졸 이상 학력이 반드시 필요한 직업도 생각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외국어 시험 점수나 각종 자격증 등을 '스펙'으로 갖추어 무엇이든 유리해져야만 하는 경쟁도 완화될 것이다. 지금은 기업 측이 '갑'인 상황에서 구직자에게 '네가 뽑힐 만한 인재인지 증명해 봐라'라며 여러 학력과 스펙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모양새이다.

반면 차별금지법은 고용 과정에서 기업이 기준이나 자격을 두는 것에 대해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 '그 자격 요건이 정말 이 직무에 필요한 것인지'를 따져 묻는다. 기업이 직원을 뽑을 때에도 그 과정에서 부당한 차별 없이, 필수적이고 합리적인 기준만을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차별금지법이 시행되어도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학력·학벌 차별이나 학교 서열 체제, 능력주의 등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서열 체제와 학력·학벌주의를 지탱하던 주요 기반인 고용과 노동에서의 노골적인 차별, 소득과 노동 조건의 격차는 약화될 것이다. 그러면 일단 대학은 가고 봐야 하며 되도록 '명문대'에 가야만 한다는 믿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도 흔들리게 된다. 이는 충분히 교육과 사회가 변화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대학 입시 경쟁 위주의 교육 역시 개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터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상상해 본다. 비록 법안에 차별 금지 사유로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교육기관에서 '학업성적에 따른 차별'도 금지한다면 어떨까? 학업성적으로 학생을 차별 대우하거나 시설 제공을 차등하는 것을 금지한다. 평가 결과는 오직 교육의 과정에서만, 학생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만 활용하며 공개하거나 서열화하지 않는다.

대학 입학 과정에서도, 학생이 그 대학 그 학과에 들어와 배우기에 필수적인 요건을 갖추었는지만 확인하도록 하고, 그 외에 성적에 따른 차별을 할 수 없게 한다. 사실 상대평가로 줄을 세워 일부 학생들만을 선발하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차별이 아닌가 말이다. 물론 법이 통과된다고 해서 정부와 법원이 나서서 이런 조치들을 취할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차별의 기준을 세워가고 평등의 합의를 만들어 간다면 언젠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를 그토록 많이 바꿔놓을 수 있는 가능성과 질문을 품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공현님은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학력차별 #학벌차별 #청소년인권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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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평등이념과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인권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실천하는 연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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