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가을 정취 풍기는 두 역, 내년이면 못 봅니다

올 연말로 사라지는 희방사역과 반곡역 이야기

등록 2020.10.08 09:51수정 2020.10.0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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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 희방사역 ⓒ 박도

 
가을 나들이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의 가사 일절처럼 가을 하늘이 나들이를 유혹했다. 올해는 거의 집안에서 맴돌았다. 코로나19 영향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 의관을 차려입고 있으니 미칠 것만 같아 큰 소리를 치고 싶다)란 말처럼 몸부림 치게 됐다.


지난 10월 6일 원주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자주 가던 경북 풍기로 갔다. 거기에는 온천이 있다. 열차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으로 가자 막 온천행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보통 때는 30분 정도 기다리면 됐지만 코로나 영향으로 차편이 줄어 다음 차는 2시간 뒤에 있었다. 마침 책을 한 권 준비해 가지고 갔기에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다가 가까운 칼국수 집에서 마음의 점을 찍었다.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오자 곧 희방사행 버스가 왔다.

소백산 희방사 인근 풍기온천에서 온천수에 몸을 담그자 천국이 부럽지 않았다. 특히 그곳 야외 온천탕에서 소백산을 바라보는 경치는 일품이었다. 온천욕을 마치고 열차 시간을 확인하자 희방사역에서 오후 4시 59분에 상행열차가 있었다.

이즈음 풍기 일대의 사과 단지에는 온통 빨간 사과들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렸다. 그 사과와 코스모스, 갈대, 그리고 황금 벼논을 바라보며 오후 4시 20분쯤 희방사 간이역에 이르자 역무원 혼자 텅 빈 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 상행 열차시간을 묻자 조금 전에 떠났기에 다음 차는 오후 6시 12분에 있단다. 내가 열차 시간을 잘못 본 것이다. 15시 59분을 16시 59분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빚어진 일이다. 아찔했다. 두 시간을 간이역 대합실에서 기다리자니.

희방사역 대합실
 

희방사역 김경낙 역무원 ⓒ 박도

 
텅 빈 대합실에 앉아 가방에 넣어둔 책을 꺼내 다시 읽었다.


"고객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젊은 역무원이 물었다.

"좋습니다."

잠시 후 그가 종이컵에 따끈한 커피를 담이 건넸다. 역장이냐고 물었더니 역장이 휴가로 영주역에서 일일 파견 나와 근무한다고 했다.

희방사 간이역은 이전에 두어 번 온 적이 있었다. 나의 장편소설 <약속>을 쓸 때다. 소설의 주인공 인민군 김준기 전사가 9.15 인천상륙으로 쫓길 때 이곳을 통해 북으로 가는 코스로 잡았다. 그래서 그 현장을 답사하면서 희방사도 둘러봤다. 대학 시절 김민수 교수의 '국어학' 강의시간에 훈민정음 해례본과 석보상절 희방사본 얘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역무원이 전하는 바, 내년이면 이 희방사역이 사라진다고 했다. 중앙선 복선화로 단양에서 곧장 터널로 풍기까지 연결되기에 그렇단다. 그 얘기를 듣자 왠지 안타까움과 함께 다시 눈여겨보고 싶어 종이컵을 들고 역사를 벗어났다. 역 광장 은행나무 아래에는 무르익어 떨어진 은행 알들이 지천이었다.

역사에서 조금 더 벗어나자 사과밭으로 탐스럽게 익은 사과들이 주인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대합실로 돌아와 책을 펴는데 희방사역 지킴이 고양이가 '당신 누구냐'고 나에게 주인 행세를 했다. 아마도 희방사 역장이 승객도 별로 없는 간이역을 혼자 지키기에 무료한 나머지 동무하고자 기르는 것 같았다.

그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새 청량리행 열차가 플랫폼에 닿았다. 역무원의 인사를 뒤로 한 채 객차에 올랐다.
     
'반곡맘 미술인회전'
 

중앙선 반곡역 ⓒ 박도

다음날인 7일, 귀촌 후 알게 된 박명수 화백이 나를 중앙선 반곡역으로 불러냈다. 반곡맘 미술동호회 회원들이 해마다 반곡역 대합실과 철로 변에서 '반곡맘 미술인회전'을 갖는다고 하여 하던 일을 제치고 달려갔다.

이 중앙선 반곡역도 금년 말로 희방사역과 마찬가지로 사라진단다. 지난날 이 역은 주민들의 유일한 교통 창구로 널리 이용됐다. 하지만 자동차에 밀려 간이역으로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중앙선 복선화로 철길이 옮겨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불가의 가르침이 새롭다.

반곡역 야외전시장에서 신인수(75) 회장님을 만났다.
 

신인수 회장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 박도


"그림을 좋아하는 주부들의 모임입니다. 올해로 12년째지요. 박명수 화백이 무료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원주시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팜플렛도 만들었어요. 모두들 아마추어들이에요. 그림 그리는 시간이 그저 행복하기에."

열차가 끊어지더라도 반곡역은 가난한 예술인들의 문화공간으로 남기를 바란다는 박명수 화백의 말을 뒤로하면서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을 하늘은 '오매, 환장하도록' 높고 푸르렀다.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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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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