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문 대통령에게 막말하는 전광훈, 이건 알고 있나?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박정희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전광훈 목사에게

등록 2020.10.26 08:02수정 2020.10.26 08:02
34
원고료로 응원
10. 26사태 41주년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독재자 박정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숭배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전광훈씨가 있다.

예수는 그 삶을 통해서 소외 받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다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전광훈씨는 어떻게 독재자를 공개적으로 숭배할 수 있을까? 지난해 10월 26일 10.26사태 40주기 추도식을 열며 전광훈씨는 이렇게 말했다.
 
종북 좌파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두 번 죽이고 있다.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 대한민국 발전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과 관련 있다. 우리나라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설득에 일단 먹고살고 보기로 했다. 그 후 민주화를 하자고 해서 이렇게 (발전하게) 됐다. 주사파가 철저히 두 번 죽여 놓은 박정희 대통령을 빨리 부활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 문재인 날강도 같은 놈이 사기를 쳐 가져간 대한민국을 되살려야 한다. 내년에는 범국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추도식이 이뤄지길 바란다. 대한민국이 잘되는 길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활시키는 데 있다는 걸 잘 알아 달라.
- <뉴스앤조이> 전광훈 목사, 박정희 대통령 40주기 추모식 (2019.10.26)

전광훈씨는 지난해 5월 21일 "황교안 대표가 이승만, 박정희를 잇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노컷뉴스> 2019.05.22)라고도 말했다. 전광훈씨가 '박정희를 잇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한다는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지난해 10월 26일 전씨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서거 40주년 추도식'에 참석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박정희 정신을 배워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세계사에 주도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다.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독보적인 성취와 성공의 기적을 일구어낸 분이다.
 
박정희에 대해 이들은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이 본받아야 할 위인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만일 박정희 정권 시절 전광훈씨가 '각하'를 공개석상에서 "날강도 같은 놈"이라고 부르고 비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느님이 크게 대답하라지 않아!"
 
금영균 목사는 지난 1979년 11월 24일 서울 YWCA에서 열렸던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 이른바 YWCA 위장 결혼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YWCA 위장 결혼 사건으로) 관악경찰서로 1차 연행되었다가 며칠 후 모처(보안사)에 다시 끌려간 금영균 목사도 그날 밤 풀려나긴 했지만 비슷한 고문을 받았다.

'야, 이 목사 XX야, 무릎 꿇고 앉아!'

무릎을 꿇고 앉자마자 6명이 달려들어 허벅지, 등, 목을 군홧발로 차기 시작했다. 특히 목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중에 쓰러져 기절해버리자 '이 간나 XX 엄살떨지 마. 드러누워서 다리 들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다 죽어가는 금영균 목사의 발바닥을 곡괭이 자루 같은 몽둥이로 수십 차례를 때렸다.

금영균 목사가 목사라는 것을 이용한 치욕적인 욕설도 수없이 많았는데, '야, 이 목사 XX야. 하느님이 크게 대답하라지 않아!'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수사관들은 그를 내보내기 전에 '너 나가서 맞았다고 입 놀리면 다시 끌려와서 정말 죽을 줄 알아'하고 협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김덕룡, 고문정치학, 237-238쪽
 
"나는 그때 한계상황이었다" 
 

한명숙-박성준 내외와 필자 가족(총리 시절) ⓒ 김성수


한명숙 전 총리는 1979년 3월 9일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나중에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건으로 한명숙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기억을 다시 살리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간단히 얘기하겠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띄엄띄엄) 거기서 '공산당이면 죽인다. 너 공산당이지? 네 남편하고 어떻게 접선했느냐, 네 남편과의 편지가 암호가 아니냐? 암호풀이를 해라, 이북에서 누가 내려왔느냐, 배후를 대라… 무슨 조직이 있느냐, 대답을 해라' 따귀를 맞고… 힘찬 구둣발로 몰아대며... 야전침대 커다란 각목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았는데 난 도저히 살아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나중에 일어나보니 뼈마다 마디는 부어 있고… 온몸에 피가 맺히고 멍이 들어… 걷지도 못했다. 나중에 지하실로 옮길 때 수사관이 부축해 옮겼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완전히 항복했다.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며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빌었다.


- 1970년대 민주화운동, 기독교 인권운동을 중심으로 4,  209-210쪽
 
"다시는 면회 오지 마세요"
 
 

한국투명성기구 회장 시절 김거성 목사(우측)와 필자 ⓒ 김성수

 
연세대 신학과 76학번인 김거성 목사(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는 1977년 10월 12일 자신이 연행되어 겪은 고초를 이렇게 기록했다.
 
강성구를 통해 그에게서 기독학생회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그가 형제교회에서 등사해온 연세대 구국선언서를 받아 신과대 예배 마치고 낭독 후 배포하여 대통령긴급조치제9호 위반 죄목으로 구속당했다. 우리는 2년 가까이 감옥살이 후 석방되었다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다시 함께 체포되었다.
...
경찰의 압박과 고문에 못 이겨 그에게 전화를 걸어 연대 앞 다방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결국 노영민은 나와 만나는 줄 알고 나왔다가 대신 '간첩 잡으러 간다'며 출동했던 경찰들에게 잡혀 왔다. 그리고 다시 무박3일... 그 무지무지한 고문을 함께 당하고... 서대문경찰서에서의 20여 일... 그러나 그들은 끝내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대신 아침마다 짓무른 엉덩이에 눌어붙은 속옷을 떼어내어야 했던 우리들. 그러나 '새가 날아가다가 총알에 부딪혀 죽었다'는... 내 수첩에 메모했던 '유언비어'란 습작시가 유언비어 유포란다. 고문 상처를 숨길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었겠지... 그래서 다시 구류 20일...  

- 김거성 목사 페이스북  2017년 9월 23일 
 
당시 그의 면회를 간 모친은 '차마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들의 멀쩡했던 얼굴이 '폭행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면회를 왔던 모친에게 쇠창살 너머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복학생들을 다 잡아다 놓고 서로 이간질을 시키는데 견딜 수가 없어요. 목사가 되려는 내가 뒤집어쓰고 재판받고 나갈게요. 다시는 면회 오지 마세요.'

지난 2014년 5월 1일 재심에서 사건 발생 37년 만에 김거성 목사 등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신고 있던 슬리퍼로 입을 마구 때렸다" 
 

진실화해위원회 위원 시절 김경남 목사(우측 4번째)와 필자(맨 좌측) ⓒ 김성수

 
서울대와 한신대 출신의 김경남(1949-2019) 목사는 지난 1973년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이렇게 고초를 겪었다.
 
아침식사까지 하고 뒤늦게 동대문경찰서에 가니 거기서도 난리가 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먼저 연행된 친구들이 내가 잡히지 않은 걸로 알고 전부 나를 주범(?)이라고 진술한 것이다. 밤중에 주범을 잡으러 간 형사들이 다음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돌아오니 경찰 내에선 안달이 나 있었다. 간단하게 신원진술을 한 뒤 이미 그 전날 밤부터 고생하고 있던 정찬욱씨와 함께 차에 태워져 어딘가로 갔다. 한참 가다보니 어느 산중턱 닫친 대문 앞에 섰다. 그때 정찬욱씨가 '여기가 그 유명한 중정이구나' 하고 한마디 했다가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무지막지하게 구타당했다. 그 때야 나도 '그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에 끌려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감이 난 것은 2층 수사실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군대용 침대가 하나 놓여 있는 방에 집어넣자마자 알몸을 만들어 침대 옆에 끼우는 각목으로 가리지 않고 난타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시간도 알 수 없이 맞았다. 드디어는 통증도 없었다. 무감각해진 몸뚱어리는 스펀지처럼 그 많은 매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내가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안 것은 나중에 서울구치소에 이감 되고 나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반공법 위반이 아닌 학생들을 구속한 적이 전혀 없었던지 우리를 일반 피의자들과 함께 합방시켰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러닝셔츠를 벗으니 옆에 있던 아저씨가 '이 친구는 등이 왜 이렇게 시커멓지?' 하였다. 내가 볼 수 없었던 몸 뒤쪽은 먹물을 들인 것처럼 온통 새까맸던 것이다.

중정이 두려웠던 것은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하지만 고문의 공포는 고문당하기 전까지다. 막상 고문을 당해보니 처음 한두 번 당할 때의 고통뿐이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정작 고통스러웠던 것은 남자들이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발에 신고 있던 슬리퍼로 마구 입을 때릴 때였다. 수치와 모욕을 당할 때였다. 인격을 모욕당할 때 인간은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 최종길추모모임편, 아직 끝나지 않은 죽음, 277-278쪽
 
박정희 정권의 무지막지한 고문은 목사나 기독교인들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국회의원조차도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세계를 중앙정보부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피부로 실감해야 했다.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야당 국회의원 최형우(1935-2016)는 중정에서 고초를 겪었다.

만일 '각하'에게 그랬다면? 
 
a

법원의 보석 취소 결정으로 재수감이 결정된 전광훈 목사가 7일 오후 서울 성북구 장위동 사랑제일교회 사택에서 경찰에 의해 신병이 확보되어 서울구치소에 재수감되었다. 전 목사가 경찰 호송차에 타기 전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0.9.7 ⓒ 권우성


전광훈씨가 그토록 존경하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정부를 비난하고 공개석상에서 '각하'를 향해 지금처럼 막말과 욕설을 퍼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국정원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내동댕이쳐진 채 누워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패가망신과 고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으며 쓸쓸한 여생을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전광훈씨는 위의 한명숙, 김경남, 김거성 목사 같은 분들이 피로 뿌린 희생 위에서 이룩한 민주화 덕분에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지금 정말 좋은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전광훈씨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그 입 다물라! 
#전광훈
댓글3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AD

AD

AD

인기기사

  1. 1 52세 조기퇴직, 파란만장 도전 끝에 정착한 직업
  2. 2 "대통령이 이상하다" '조선일보' 불만 폭발
  3. 3 "부모님은 조국혁신당 찍는다는데..." 90년대생 스윙보터들의 고민
  4. 4 한국 반도체 주저 앉히려는 미국, 윤 대통령 정신 차려라
  5. 5 '875원짜리 파 한 단'은 어디에... "윤 대통령, 세상 물정 몰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