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남편, 당신도 삶이 힘들구나

[그림책일기 31] '멸치의 꿈'을 읽고 다르게 보게 된 남편의 습관

등록 2020.10.12 11:17수정 2020.10.12 11:17
1
원고료로 응원
휴일 점심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잔치국수를 했다. 육수를 내기 위해 멸치, 다시마를 넣은 다음 황태 머리를 넣을 때 살짝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통까지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머리만 있으니 으스스하다. 

황태야 가끔 사용하지만 멸치, 다시마는 국물이 들어가는 요리를 할 때 늘 사용하는 재료다. 이중 멸치, 마른 멸치를 소재로 한 그림책이 있다. 마른 멸치를 다듬을 때 잘려나간 멸치 대가리들이 주인공이 그림책 <멸치의 꿈>. 작가가 황태 대가리를 보았다면 <황태의 꿈>도 나왔을까? 


나는 멸치야. 
지금은 대가리만 남았지만.


속표지 비닐봉지에 담긴 멸치 그림에서 바로 대가리만 남은 그림으로 넘어간다. 갑작스런 전개에 당혹스럽다. 다음 장에는 몸통이 온전한 멸치가 나오고 대가리가 잘리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소개된다.
 

멸치의 꿈, 유미정(지은이) ⓒ 달그림

 
사천구백아흔아홉 번째로 태어나 헤엄 잘 쳤던 멸치는 대륙붕 바다에서 형제자매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다. 달빛을 쫓아 달려갔는데 아이고야 고깃배 등불이었다. 소금물에 팔팔 끓여지고, 햇볕에 쪼글쪼글 말려진 멸치. 마른 몸을 끌어안고 바다를 그리며 긴긴 밤을 보내던 어느 날 바싹 소리에 깨어났더니 사람들이 똥을 빼낸다며 창자를 가르고 대가리를 딴다.

모든 걸 다 내려놓으니 몸이 가뿐해진 멸치. 발려진 멸치 대가리와 뼈들이 모여 바다로 간다. 고깃배 등불에 속지 않고 뱃사람 그물에 걸리지 않고 햇볕에 마르지도 않는 바다. 우리가 바다가 되자며 멸치의 꿈은 끝난다.

한지에 검은 먹으로 그린 듯한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한 <멸치의 꿈>에는 색이 없다. 흑백으로만 진행되다 마지막에 잘려진 멸치 대가리와 뼈들이 바다로 갈 때만 푸른색이 등장한다. 색을 절제하다 클라이맥스에 씀으로써 보는 이가 멸치들과 같이 바다에 빠지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잘려진 멸치 대가리에서 온전한 멸치를 상상하고, 그의 이루지 못한 꿈까지 상상해 내는 작가의 혜안에 무릎을 쳤다. 내 눈 앞에 있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면까지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작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평소 국물 멸치를 다듬지 않고 머리가 있는 채로 사용한다. 멸치 대가리와 내장을 다듬어 싸용하는 게 국물맛이 더 깔끔하다고 하던데 좀 텁텁해도 귀찮아서 멸치를 다듬지 않는다. 게으른 나와 달리 <멸치의 꿈> 작가는 멸치를 다듬어 사용했나 보다. 잘려진 멸치 대가리를 보며 그의 삶과 꿈을 상상했나 보다.

지금 내가 냄비 속에 넣은 황태대가리에도 몸이 있었겠구나, 이 아이는 러시아 바다를 헤엄치다 왔나 그런 생각을 하며 국물을 우려냈다. 국수를 말아 아이랑 남편, 세 식구가 점심을 먹었다.

"아, 쫌. 밥 먹을 때만이라도 만지지 마. 맨날 코를 만져. 더럽게."

러시아 바다 황태의 꿈이고 뭐고 코를 만지는 남편 덕에 곧바로 현실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코를 만지는 남편 버릇은 결혼 9년차가 되어도 싫다. 코로나로 눈, 코, 입을 만지지 않는 게 중요해 지고 나선 더 싫다. 

사실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코를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 커피숍 계단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아니 왜 저렇게 자꾸 코를 만지지?' 좀 더럽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없어 보이기도 했다. 

사람 한 번에 내치는 성격 좀 고쳐 보겠다고 한 번 더 만났는데, 집에 오는 버스에서 그가 내 손을 잡았다. 5년 만에 하는 연애여서 그랬나?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혼까지 해버렸다.

잔치 국수를 먹고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넷플릭스로 비밀의 숲2 드라마를 봤다. 검찰 취조실에서 황시목 검사가 백팀장을 취조하는 장면이었다.

"모세혈관에 피가 제대로 공급이 안 되면 제일 말단의 손끝, 코끝 이런 데가 저리게 돼 있죠. 지금 경사님 머리랑 심장으로 피가 최대한 몰리고 있는 걸까요?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코를 만지는 행위를 하는 게 저런 이유구나 싶었다. 불안해서 무의식적으로 코를 만지는 데는 저런 이유가 있었구나. 그럼, 혹시? 

남편이 코를 만지는 행위도 불안한 심리에서 유발된 행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손톱을 깨물고 머리카락을 베베꼬꼬하는 것들은 나이가 들어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세 번째 손가락으로 두 번째 손가락 손톱을 만지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만지면 손톱의 부드러운 면이 느껴져 기분이 좋다. 누구나 한 가지쯤 가지고 있는 불안을 다스리는 신체적 행위, 남편이 자주 코를 만지는 게 그런 이유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도 삶이 힘들구나.'

<멸치의 꿈>, 잘려나간 단면만 보지 않고 사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혜안이 떠올랐다. 코를 만지는 남편의 일부분에 분노하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그의 꿈을 상상해 보았다.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에 상경한 그. 의대 대신 공대를 졸업해 빨리 돈을 벌겠다 결심했지만 의대만큼 긴 공부를 한 그. 언어폭력이 심한 상사 밑에서 1년을 버티고 부서가 재편되었지만 여전히 업무량이 많아 오후 9시 퇴근은 일상, 늦으면 오후 11시가 보통인 그. 새벽까지 게임한다고 잔소리하는 아내 때문에 고단한 그. 아내의 잔소리 없는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그.

코를 만지는 행위를 보고 더럽다고만 생각했는데 불안하고 고단한 남편의 삶이 보였다. 여전히 코를 만지는 게 싫고 덜 만져줬으면 좋겠지만 화가 덜 난다. 누군가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건 상대만이 아닌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멸치의 꿈

유미정 (지은이),
달그림, 2020


#멸치의 꿈 #남편 #입체적으로보기 #황시목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