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이름을 찾아, '디어 마이 네임'

성폭력 피해 경험 이후, 샤넬 밀러가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여정

등록 2020.10.13 08:57수정 2020.10.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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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 경험 이후 몇 년간 이름이 지워진 채 살아온 샤넬 밀러의 <디어 마이 네임>은 표지에서부터 힘이, 압도감이 느껴졌다.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별수 없이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자아, 때론 분열 속에서 몇 개의 자아를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했던 샤넬 밀러는 성폭력 피해 경험자의 어지러운 현실에 대해 500페이지가 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 그의 시간이 다 담겼을 거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의 진실을 온전히 지지할 수 있는,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있다.
 

디어 마이 네임 - 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샤넬 밀러(지은이) ⓒ 동녘

 
성폭력 피해 경험자가 한편에서는 피해자란 이름에 가둬지지 않기 위해서 왜 애써야 하고 또 한편에서는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왜 안온할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수도 없이 생각했다.


저자는 말한다. '긴 시간 성폭행이라는 범죄는 우리의 침묵에 의지했다. 우리가 발설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데서 오는 두려움. 사회는 우리에게 천 가지 이유를 댔다. 증거가 없으면, 너무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면, 당신이 술에 취했으면, 남자가 힘 있는 자이면, 역풍을 맞을 것 같으면, 당신의 안전이 위협받으면 발설 말라고.'  이 무게감에 눌리게 되는 피해 경험자의 안전한 삶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또한 성폭력이란 것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폭력이 일어난 이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강간에 대한 협소한 정의는 외국의 그곳이나 이곳이나 다르지 않아서, 피해 경험자보다 유망한 가해자의 호소에 더 귀 기울이는 태도는 너무 많이 본 장면처럼 여겨진다.

책에서 다룬 정치권 이야기처럼 일상 어디에서나 남성들에게 용인되는 농담 혹은 그럴듯한 사적 이야기로만 존재해 온 성적 폭력에 대해 가해자가 그럴 리 없다는, 최근에도 너무 많이 들어온 그 대단한 의리도 낯설지 않다.

성폭력은 가해자의 가해 행위가 일어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역시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해도 그것에 대해 잘못이라 이야기되지 않고 묵인될 때 성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샤넬은 우리가, 우리 모두가 그 잘못된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방관자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그 방관자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될 수도 있는 다면적인 존재라고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가해자를 비롯하여 가해자의 지인들이 어느 누구도 가해자에게 잘못 했으니 사과하라고 하지 않았다. 샤넬은 가해자가 반성하고 충분히 사과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온전히 피해 경험자의 몫이었다.

피해 경험자는 하루에도 수없이 쓰러지고 상처받았지만, 나아갔다. 그녀는 사건과 기억에 이름 붙이지 않고 그녀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녀 스스로의 이름을 찾았다. 그녀는 많은 시간 울고 구토를 하고 아팠지만, 매일 싸워 나갔다.

그녀는 '나는 계속 부드러웠기 때문에, 귀 기울였기 때문에, 글을 썼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내 진실 옆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끔찍한 폭풍 속의 작은 화염처럼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눈물이 날 때, 당신이 조롱과 모욕을 당할 때, 의심과 위협을 당할 때, 그들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 당신의 몸이 구멍으로 전락할 때, 고개를 당당히 들라. 여행은 당신의 상상보다 길 것이고, 트라우마는 당신을 찾아내고 또 찾아낼 것이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 당신의 힘과 함께 부드러움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 우리가 있다, 지금 이곳에.

디어 마이 네임 - 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샤넬 밀러 (지은이), 황성원 (옮긴이),
동녘, 2020


#성폭력 #성폭력피해경험자 #피해자는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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