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텃밭 농사, 이런 즐거움이 있는지 몰랐다

어릴 적엔 참 농사가 싫었는데.... 감자를 캐며 생긴 기쁨

등록 2020.10.13 08:33수정 2020.10.1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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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다닌 회사를 퇴사했다. 퇴사 후 여러가지 취미와 일거리를 한다. 그 중에 부모님의 텃밭 농사 거드는 일이 예상보다 너무 좋다.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하지를 며칠 앞둔 첫 감자 수확 날이다. 감자 줄기 주변 흙을 호미로 살살 긁는다.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리 깊지 않은 곳에 먼저 나와 있는 녀석이 느껴진다.
 

안녕, 감자! ⓒ Pixabay

 
그럴 때면 호미로 캐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쇠붙이에 긁히는 건 슬픈 일이다. 호미를 놓고 부드러운 손으로 흙을 걷어낸다. 드디어 첫 감자가 뽀얀 얼굴을 내민다. 태양을 바라보는 용기, 멋지다. 나는 인사한다. 안녕, 감자!

나는 언제부터인가 동물이든 무생물이든 인사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래도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부터 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인간이 그렇다. 무인도의 친구 윌슨까지 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이 아닌 것에 인격을 부여하는 작업은 재미를 넘어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도 생존에 유리하다. 의인화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세상에 널리 인간의 애정을 확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낱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의 착각일까? 정답은 모르겠지만 감자와 나누는 인사는 분명 입꼬리 올라가는 일이다.
  
어떻게 주렁주렁 감자의 살덩이들이 만들어지는지 나는 알지를 못한다. 보물창고같은 땅속,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내가 한 것이라고는 씨감자를 흙에 심기만 했을 뿐. 오일장날 가장 맘씨 좋아보이는 어르신한테서 깎지 않고 샀을 뿐. 햇빛을 마시고 비를 맞고 혼자 다 알아서 했다. 감자를 심고 캐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어릴 적부터 농사가 싫었다. 고된 농사일은 본래 일손이 부족하지 않은 날이 없다. 오빠들과는 다르게 나에게는 부엌일까지 주어진다. 이 이중노동은 시골에서는 여자애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 밭의 크기만큼 고향이 싫고 경작하는 채소의 종류만큼 시골은 싫은 것이다.

자연과는 먼 도시 생활을 언제나 꿈꿨다. 그때는 몰랐다. 지금 늙은 딸이 더 늙은 부모와 텃밭 농사를 하게 될 줄은. 꽤 괜찮다. 일 시키는 직장 상사도 없고 지긋지긋한 야근도 없다. 마음이 편하다. 땅은 내가 땀 흘린 만큼의 먹거리를 내어준다. 솔직하고 정직하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이다. 이 일상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고 싶다.

나는 감자가 좋다. 자두의 감촉은 덜 자란 동물의 살과 같아서 육향이 난다고 했던가. 동골동골 골마다 감자들이 모여 있다. 방금 흙을 털어낸 내 감자는 솜털이 남아 있는 미소년의 어깨 같다.
#하지 #감자 #대기근 #텃밭 #의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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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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