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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하다 사람이 죽으면 낙동강 고기밥으로 던졌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4형제와 막내 여동생 김학봉의 이야기

등록 2020.10.30 18:45수정 2020.11.0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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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총사령부 전시실에 걸린 약산 김원봉 사진 ⓒ 김경준

 
경남 밀양시 삼랑지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이 굴비처럼 엮여 트럭에 실렸다. 트럭에 탄 이들은 자신들이 죽음의 계곡으로 가고 있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송지리(松旨里) 국민보도연맹원 70명도 '골로 가는' 대열에 끼었다. 삼랑진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마을 한가운데로 낙동강이 흘러 뒷산 소나무 숲에 거주했다고 하여 송지(松旨)리라 불린 이 마을에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고 청년 70명이 가입했다. 한 집 건너 한 명 꼴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나자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21일부터 송지지서 경찰들을 수족 부리듯이 하는 해군헌병대와 육군특무대(CIC)가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였다.

심사에 따라 보도연맹원 간부급들은 밀양경찰서로 보내졌고, 다른 이들은 송지지서에 구금됐다. 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이 1차로 끌려간 곳은 삼랑진면(현재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와 학원리였다. 군인과 경찰들의 총구는 그들을 향했고, 볏단 쓰러지듯이 쓰러졌다. 1950년 7월 31일의 일이었다. 19일 후인 1950년 8월 19일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이 삼랑진면 안태리와 미전리 뒷산에서 총살되었다.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한 경우는 그나마 행운(?)이었다. 밀양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들 중 고문에 못 이겨 죽은 사람들은 낙동강 물에 던져져 고기밥이 되었다(부산일보 1960년 6월 11일자 기사).

'골로 간' 의열단장 김원봉의 4형제

"김한근이 어디 있어?" "몰라요." "집안 샅샅이 뒤져!" 상급자의 명령에 밀양경찰서 사찰과 형사들은 이 잡듯이 집안을 뒤졌다. 옷장과 다락을 살펴본 형사는 쇠꼬챙이로 천장을 쑤셨다. 하지만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신경질이 난 형사는 쌀뒤주도 열어보았지만 허사였다.

장독대 뚜껑을 모두 열어 본 다른 형사는 헛간에 쌓인 거름을 쇠스랑으로 쑤셨다. 그는 이어 변소(화장실)로 갔다. 발 디딤대인 송판을 걷어낸 후 똥바가지로 휘휘 저었다. 혹시나 찾는 이가 똥물 속에 있지는 않나 해서 한 손으로는 코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똥바가지를 잡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도 김한근이 없자 경찰들은 김한근의 형 김영근(가명)을 연행해 갔다. 사실 김한근은 집에 있었다. 그는 거름덩이에 숨어 있다가 경찰이 쑤신 쇠스랑에 머리가 찍혔다. 그때 비명을 질렀다면 영락없이 저승사자에게 끌려갈 상황이라 꾹 참았던 것이다.

김한근은 저승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는 6.25 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낙동강으로 가던 중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그렇게 탈출한 게 두 번이었는데, 집 헛간의 거름덩이에 숨어 있다가 쇠스랑에 찔리면서도 살아난 것이다. 동생 대신 경찰에 연행된 김영근은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같은 시각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인 경남여고 2학년 김학봉은 밀양읍 나카노공장에 구금되어 있었다. 당시 밀양군내 보도연맹원들은 밀양읍의 나카노공장과 밀양경찰서 유치장, 그리고 삼랑진지서, 삼랑진역 강생회 지하창고에 갇혀 있었다.

이후 그들은 1950년 8월 중하순경 경북 청도군 매전면 곰티재와 경남 밀양군 삼랑진면 안태리 뒷산, 검세리 깐촌 낙동강변, 미전리 미전고개 일대에서 집단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보고서』.

이 와중에 김씨 4형제도 학살되었는데, 김용봉, 봉기, 덕봉, 구봉이 그들이다. 이들은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의 동생들이다.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밀양읍 나카노공장에 구금되었다가 어린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천만다행으로 석방되었다.

김원봉은 누구인가
 

동아일보에 실린 의열단에 대한 기사. 왼쪽에 김원봉의 사진이 지면에 실렸다. ⓒ 동아일보

 
1974년 4월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유인태는 친구와 지인의 방을 옮겨 다니며 몸을 피하느라 바빴다. 밖으로는 일절 다닐 수가 없었다. 거리 구석구석의 담벼락과 전봇대에 유인태, 이철, 강구철 등의 현상수배 사진이 나붙었기 때문이다.

원래 현상금은 50만원이었는데, 몇 주 만에 4배가 뛰어 200만원이 되었다. 당시 간첩신고 현상금이 100만원이었으니 유인태를 포함한 민청학련 관계자들의 현상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이 내걸린 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의열단을 조직해 민족해방투쟁을 벌인 약산 김원봉이 그 주인공이다. 김원봉에 대해 일제는 현상금 100만원을 걸었는데, 지금 시세로 따지면 320억 원이다. 김원봉에 이어 김구의 현상금은 60만원이었다.

이 액수는 오사마 빈라덴에게 붙은 540억 원의 현상금이 있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라고 전해진다. 세계 최고의 현상금이 영광(?)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일제가 김원봉과 의열단을 공포스러운 존재로 느꼈음은 분명하다.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의열단을 조직해 단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우리나라 민족주의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다. 또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다. 김원봉은 1942년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고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는 군무부장에 올랐다.

하지만 해방 후인 1946년 대구 10월 항쟁 관련 혐의로 일제 형사 출신의 악질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는 수치를 겪었다. 남한에서 설 땅이 없었던 그는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에 올랐지만 1958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다. 즉, 남과 북에서 공히 버림받았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은 김원봉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김원봉의 동생 4명은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예비검속으로 학살되었고, 막내 여동생 김학봉도 죽음 직전까지 갔다.

500여구 유해 발굴

1960년 6월 4일 오전 11시 경남 밀양군 김봉철 집 안방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크지 않은 방에 20여 명의 '피학살자 유족'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유족들이 4.19혁명 직후에 모여 피학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즉석에서 '밀양군 피학살자 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 유가족의 '피해자 신고'를 받았다. 불과 몇 주 만에 200여 명의 유가족이 회원에 가입했다. 유족들은 1960년 7월 17일 밀양읍 영남루에서 장의위원회를 결성하고, 7월 19일 청도 곰티재와 밀양 삼랑진 안태리를 발굴해 각각 183구와 33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모두 513구의 유해였다.

유해 발굴 다음 날인 7월 20일 밀양읍 공설운동장에서 유족 200명과 읍민 500여 명이 참석해 합동위령제를 거행했다. 이 때 밀양유족회와 장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가 김원봉의 동생 김봉철이었다. 김봉철은 그 해 8월 28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결성된 '경남유족회' 이사를 맡았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이렇게 발로 뛰며 활동을 한 김봉철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단순히 김원봉의 동생으로서 자기 형들의 명예회복만을 바란 이가 아니었다. 500여 명이 넘는 밀양군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한 것이다.

김봉철은 고향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자동차 조수로 1년간 일했다. 귀국해서는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의 조카 김태영(1957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철은 해방 전후로 염색업을 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김봉철은 해방 후 김원봉이 조직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했고, 1949년 6월 2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미군정포고령2호 위반으로 벌금 3천원을 언도받았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 김원봉이 월북하고, 형 네 명이 학살되었다. 이런 아픔을 딛고, 그는 1956년 치러진 제2대 밀양읍의원에 당선되었다. 집안이 겪은 전쟁의 상처에도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밀양읍민들을 위한 '봉사의 길'에 뛰어들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 밀양유족회 및 경남유족회 간부를 맡고 사회단체 주요간부를 맡은 것도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이틀 후인 1960년 5월 18일 오후 5시경 밀양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이 겪은 역사의 비극
 

김원봉 기념관 앞 거리 ⓒ 박만순

 
연행된 김봉철은 소위 '혁명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특별사면을 받아 1965년 12월 24일 석방되었다. 김봉철은 1986년에 사망해 생전에 형들의 명예회복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자신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겪은 고초에 대해서도 국가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경남 밀양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5.16 직후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불법적으로 학살당한 형들과 밀양지역 보도연맹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쓴 김봉철의 의로운 행위가 역사적으로 복권되었다. 또 2010년 재심에서 김봉철은 5.16 후 선고된 '반혁명행위죄'에 대한 무죄판결을 받아 완전히 명예회복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6.25 때 죽은 형들이 살아 올 수는 없는 법이다. 또 남과 북에서 버림받고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한 김원봉의 역사적 복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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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선생의 조카 김태영씨가 지난 2019년 7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발족식에서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김봉철과 김학봉 가족들이 겪은 고초도 만만치 않다. 한국전쟁 이후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염라대왕한테 세 번이나 갔다 온 김한근과 결혼했다. 김학봉의 아들 김태영(미국 캘리포니아주 거주)도 6년간의 고아원 생활을 해야 했다. 김태영은 2020년 현재 경영학박사로 미국에 거주하며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 일로 수시로 국내에 와 일을 한다.

김태영의 아버지 김한근은 심장마비로 36세에 생을 달리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아픔 이외에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는 김태영을 평생 옥죄었다. 사촌형제 한 명은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최종 불합격되었다. 김태영이 김원봉 이야기하는 것이 마냥 기쁨이 될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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