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1987년 화염병 던진 '센 언니', 차별에 맞서다

[인터뷰] '국가보안법 전시회' 포스터 주인공 윤은영씨의 미국 살이

등록 2020.10.18 20:39수정 2020.10.18 21:01
10
원고료로 응원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이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개관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전시기획팀 인터넷 모임방에 메시지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전시 포스터) 사진 맨 왼쪽에 있는 분이 미국에 계신데 9월 중으로 방한한다고 합니다. 전시회 관람이 가능할지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홍보 포스터 1987년 6월 항쟁 당시 이화여대에서 집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장면의 사진을 이미지로 사용하여 제작된 전시회 포스터. 사진 맨 왼쪽이 윤은영이다. ⓒ 국가보안법을박물관으로추진위원회

  
전시회 홍보 포스터에 실린 사진은 1987년 6월 항쟁 즈음 이화여대 학생들이 교문을 진출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던 장면이다. 기획팀 내에서는 포스터 시안을 놓고 이 사진이 가진 '국가보안법=데모=짱돌'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구태의연하고 식상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본 젊은 세대의 반응은 달랐다. 이른바 '센 언니들'이 나와서 너무 '핫'하다는 것. 그렇게 이 사진이 전시회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핫한 사진의 센 언니들 중 한 명이 바다 건너 귀국하여 전시회장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근 2년 가까이 이 전시회 1부 '여성 서사로 보는 국가보안법' 섹션 준비에 참여하면서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여성들의 구술 기록을 진행했던 나는 그이를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 사진에 나온 20대 여성, 그리고 이제는 50대가 되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9월 25일, 귀국하여 2주간의 자가 격리를 마치고 전시관을 방문한 윤은영씨를 만났다. 당시 전시회는 온라인으로만 개관한 상태였지만 전시 관계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관람이 허용되고 있어 민주인권기념관 측의 양해를 받아 전시장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이대 교문 앞 화염병 던지던 그날


- 당시 사진에 찍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그때는 전혀 몰랐어요. 20년이 지나서 제가 찍힌 사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저는 1992년에 미국 LA로 가서 거기서 쭉 살고 있거든요. 한국에 있는 제 큰 오빠의 부인, 새언니한테서 전화가 와서 아가씨 사진이 신문에 났다고, <한겨레신문>에 났는데 신문사에서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요. 19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 특집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겨레> 기자님과 연락이 되어서 이메일로 사진 파일을 받아서 보게 되었죠."

그러니 일단 이번 전시회 포스터를 통해 처음 이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닌 셈이다. 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찍혔고, 그것이 또한 6월 항쟁 20주년 특집으로 신문에 실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되게 묘했어요. 당시에는 찍혔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그리고 그날 제가 화염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던진 것이었는데, 그 이후로 던진 적도 없는데 그게, 그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되게 묘한 기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보다 더 열심히 싸운 친구들, 날마다 던졌던 이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이 포스터를 아이들에게도 보여주며 '엄마, 한 번밖에 안 던졌는데 좀 창피하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아니라고, '엄마, 멋있다'고 이야기해 줬어요."
 

인터뷰 중인 윤은영(왼쪽) 전시관인 남영동 옛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 1층 로비에서 윤은영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종문

  
당시 <한겨레신문>에 실린 사진 설명에는 '짱돌'을 던지고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은영씨는 자신이 던진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화염병이었다고, 바로잡아달라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은 6월 항쟁, 6.10 대회가 있기 직전, 아마 5월 27일인가 그럴 거예요. 저는 1986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1학년 때부터 5월이 되면 5.18 민주항쟁 기록들 전시회도 하고, 독일 기자가 찍은 영상 상영회도 하고 그랬죠. 저도 처음 보고 진짜 충격을 받았고. 1987년에는 더했죠.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이 여전히 대통령으로 있는 상황에서 우리 학생들이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학생 총투표를 했고 거의 90% 찬성으로 수업 거부를 결의하고, 대운동장에 모여 결의대회를 열고 이화민주광장이라는 데를 지나서 교문으로 나가던 때였어요. 교문 앞에 이화교라는 구름다리가 있는데 거기 항상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화염병을 던졌죠."


영화 <1987>을 통해 널리 알려진 그해 5월과 6월. 도심은 늘 최루연기로 자욱했고 대학가에서는 가두시위와 토끼몰이 진압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윤은영씨는 당시 기독학생회에서 활동을 했으며 굳이 나누자면 동아리연합회 소속이라 할 수 있었다. 

"기억에는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던질 사람을 시위가 있을 때마다 모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싸움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지치거나 피곤해서 그랬는지 이번 시위에서는 동아리연합회에서도 참여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저랑 또 한 명이 화염병을 던지는 데 참여를 하게 된 거죠. 되게 무서웠어요. 짱돌보다 화염병이 더 가벼워서 던지기는 쉬웠지만 불을 붙인 상태에서 이게 내 손에서 터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서로 대치를 하고 있다가 우리들이 막 뛰어나가서 화염병을 던지면 그것을 신호로 전경들이 우리를 잡으러 막 치고 올라오는 게 보통 정해진 순서였거든요.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던지는 폼이 되게 엉성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던지자마자 바로 전경들이 잡으러 튀어나오는 거예요. 전경이 제 나이 또래 남자다보니까 아무리 무겁게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보다 훨씬 달리기가 빠르겠죠. 저는 너무 놀라서 다리가 막 후들후들 거리면서 제대로 뛰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어떤 전경이 제 앞을 지나서, 저를 휙 앞질러 가는 거예요. '아, 나를 잡을 생각은 없구나' 하면서 옆 골목으로 빠져 다행히 그날 잡히지는 않았죠. 그때 다리가 후들후들하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해요. 도망가야 하는데 다리가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던 것."


은영씨는 이후 기독학생회 활동을 계속하다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2년 정도 출판사를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갔다. 

"남자친구가 이민을 갔는데 결혼을 하면서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죠. 결혼하고 아이들 세 명을 낳고 키우면서 토요일 한글학교 선생님을 했어요. 교포 2세 아이들이 한글을 잘 모르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1절이면 유관순 이야기도 하고, 4.19, 5.18 이런 시기마다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이 바람직한 역사관, 의식을 갖고 이민자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런 교육을 하면서 참 좋았어요. 그리고 저도 제 아이만 잘 컸으면 하는 게 아니라 내 학생인 다른 아이들도 다 잘 살아야지, 바람직하게 살아야지 세상이 보다 나은 세상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시야도 더 넓어지고."

그리고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뭔가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지금 상근 활동을 하고 있는 '한인 타운 노동연대(Koreatown Immigrant Workers Alliance, KIWA)라는 단체다. 

"1992년에 만들어진 단체예요. 처음에는 한인 노동연대였지만 지금은 한인 타운 노동연대로 이름이 바뀌었죠. 꼭 한인 교포만이 아니라 한인 타운에서 노동하는 이민자,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단체로 단체 사업도 확장한 거예요. 임금을 제대로 못 받거나, 연장근로 수당을 못 받거나 이런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노동법을 위반한 업체를 대상으로 법적 고발 같은 것도 하고. 그리고 'LA 내일을 여는 사람들'이란 단체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해요. 정말 다양한 일들을 하는 단체인데 최근에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남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서 미국 의회를 압박하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어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게 기가 막히죠"
 

5층 조사실에 앉아 구술을 보고 듣고 있는 윤은영씨 5층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나의 말이 세계를 터트릴 것이다'에서는 각 조사실마다 한 명 한 명 구술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은영씨도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 강곤


1980년대 중반 민주화를 위해 화염병을 들었던 20대 젊은이가 이제 50대 중년이 되어 바다 건너 미국에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사람을 여기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 만나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한 편의 영화 에필로그를 찍는 느낌이었다.

- 잘 아시다시피 국가보안법은 아직 건재하고 그래서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어요. 특히 이번 전시회는 '여성 서사'에 초점을 맞춰 준비했고요.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이 어떤지요?
"기가 막히죠.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사실이. 5층 조사실 방 하나하나마다 글씨가 써있고 그걸 들추고 들어가면 그 안에 거기서 견뎌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는데, 뭔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왜 그것밖에 못했지? 우리가 너무 약했나? 저들이 너무 힘이 셌나? 그런 반성을. 또 하나는 그때 남학생들은 군대에 가는데 여학생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4년 내내 학생운동을 해야 하니까 그게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싶었고 감옥에 가서 책이라도 실컷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오늘 전시를 보며 정말 철딱서니 없는 생각이었구나. (웃음)

저는 국가보안법은 아니고 집시법 위반으로 2박 3일 정도 잡혀 있었던 게 다예요. 실질적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국가보안법은 여기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것 같아요. 말할 수 있는 자유, 생각할 수 있는 자유, 이런 것을 모두 억압하고 정권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반공으로 빨갱이라고 하면서 잡아가니까. 인간이라면 자기 삶을 반성하고 역사를 성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꼭 필요한 일인데 그것을 막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니까 가장 비인간적인 법이고 또 체포되고 끌려가는 사람만 피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니 참 교묘하고 악랄한 법이라고 할 수 있죠."

-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한국 시민사회에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전시도 여성 서사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는데, 사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잘 알지는 못해요. 다만 제 아이들이 딸 둘, 아들 하나인데 미국에서 한인들은 소수자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많은 차별을 받는데, 남자 아이들보다 여자 아이들이 그런 것에 훨씬 더 민감해요. '세상이 왜 이래?' 문제의식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늘 타자였고 전 세계적으로 아무리 민주주주의가 발달했고 여성 인권이 나아진 나라라고 하더라도 아직 남녀가 평등한 사회는 없는 것 같아요. 또 신자유주의가 사람을 더욱 상품화하니까 남성, 여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여성에게는 2중, 3중으로 더 힘든 측면이 있죠.

그래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인 여성이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들과 같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게 5층 바닥에 쓰인 구절 '나의 말이 세계를 터트릴 것이다'라는 슬로건처럼 페미니즘이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라며 우울해 하던 딸이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에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유색인종 여성이 역사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a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윤은영씨(오른쪽)와 필자 ⓒ 이종문

덧붙이는 글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은 코로나19 여파로 한동안 온라인(VR) 전시로 이어지다가 10월 18일까지 오프라인 현장 전시가 열리고 있다.(온라인 전시(클릭) : https://www.dhrm.or.kr/online-exhibit)
#국가보안법 #말의세계에감금된것들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억과 기록에 관심이 많다. 함께 쓴 책으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여기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재난을 묻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이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3. 3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4. 4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