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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로부터 시민기자 명함을 받았습니다

새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옷걸이'를 바라보았다

등록 2020.10.18 17:59수정 2020.10.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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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낯선 사람과 명함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비즈니스에서는 거래 상대에 대한 예의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론 간단한 신상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다. 때론, 명함에 적힌 회사와 직급은 상대방의 경제 수준까지도 가늠하게 해 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대체로 명함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고 믿는다. 사기꾼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럴듯한 명함부터 판다.

사회생활에서 명함이란 무엇인가?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스틸 컷. ⓒ 길벗 영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는 소위 성공한 남자들끼리 명함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은 자기보다 좋은 폴 앨런의 명함을 보고,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땀까지 흘린다.

'저 미묘한 하얀 색감 좀 봐. 딱 맞는 농도까지. 맙소사. 워터마크까지 있잖아.'  

감독은 스크린 속 말끔하게 차려입은 배우들의 표정과 태도를 진지하게 다룬다. 물론 명함은 겉보기엔 모두 다 비슷하여 딱히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그 때문에 상황이 더욱더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영리한 연출이다.

내가 패션 전공을 살려 처음 사업을 시작한 나이는 27살이다. 사업을 한다는 것, 대표직 자리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신나서 까불던 시절이었다. 그땐 어찌나 명함에 힘을 주고 싶던지.

인쇄소에서 근무하는 친구와 함께 종이의 재질과 두께, 컬러, 글씨체 등 손바닥보다 작은 85mm X 54mm 규격 안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몇 날 며칠 고민했다. 온갖 좋은 것은 다 하고 싶은 욕심에 휘황찬란한 색감과 무늬, 손끝에서 느껴지는 우아한 종이 재질과 두께, 은은하게 반짝이는 진줏빛 펄감까지 죄다 넣었다. 결국, 너무 눈이 부셔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웃음)

그 뒤로 명함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디자인뿐만 아니라 명함 안에 들어가는 내용 또한 달라졌다. 계절이 바뀌면 갈아입어야 하는 옷처럼, 세상 속에서 나를 증명해주던 명함도 그랬다.

어떤 해에는 대표로, 또 어떤 해에는 팀장으로 또 과장으로, 직업도 직함도 나뭇잎 색깔이 바뀌듯 변하고 있다.

명함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요?

지난 2019년 11월 말 이후로 내 명함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사라졌다. 퇴사와 동시에 회사에서 만들어 준 명함은 사회에서 더는 나를 증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 겪는 명함의 부재는 인간에게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과 함께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다. 어느덧 나는 살아온 햇수만큼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 후자에 속하는 부류가 됐다.
 

시민기자 명함 <오마이뉴스>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기자회원에 한해 명함을 발급하고 있다. ⓒ 이은영

 
오늘 아침에 <오마이뉴스>로부터 시민 기자 명함을 받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따끈따끈한 명함이었다. 참고로 오마이뉴스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기자회원에 한해 명함을 발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명함이란 자신이 속한 회사나 소속을 표기한 소형 종이로 성명, 주소, 회사, 직급, 전화번호 등이 적혀있다. 나는 종종 그런 명함 없이 사회생활을 할 때가 있다. 흔히 말하는 프리랜서나 백수 생활이 그때다.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던 어린 시절에는 명함 없는 상태에 불안과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처음 명함의 부재를 겪으며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타고난 성향인지는 몰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나는 끊임없이 질문과 답을 한다. 그렇게 엉킨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지혜를 얻을 때 기분이 좋다. 이는 곧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소속된 회사와 별개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믿어주고, 내가 나로서 당당하고 겸손해질 방법이 있을까? 있다면 찾고 싶었고, 찾았다면 삶에 적용하고 싶었다.

어차피 은퇴 후에는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또한 젊은 시절에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하며, 미리 훈련해 보는 것이 현명한 태도처럼 여겨졌다.

내 존재 자체가 명함이 되어야 하는 이유

코로나 팬데믹으로 2020년은 전 세계가 마비됐다. 대한민국 역시 코로나로 인해 20년 만의 최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잘 나가던 일터가 사라지고, 익숙했던 직업마저 바뀌는 일은 너무 흔한 일상이 됐다.

오래전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야기 중에, 짧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 알려진 고 정채봉(1946~2001) 동화 작가가 쓴 <옷걸이들 세상>이다.
 

옷걸이 인생답게 나는 나를 계속해서 알아가는 수단으로 옷을 입고 벗으며 기록하는 중이다. ⓒ pixabay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고참 헌 옷걸이가 한마디 했다.
 
"너는 옷걸이란 것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새롭게 입은 옷이 나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기 위해, 새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행거에 걸린 옷걸이를 바라본다. 왠지 자기 분수를 잘 아는 옷걸이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이 기자님. 명함 받았으니 아무튼 글 쓰셔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은영 기자 브런치에도 함께 올라갈 예정입니다. https://brunch.co.kr/@yoconis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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