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5 11:18최종 업데이트 20.10.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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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이승만이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1945년 직후는 혼돈의 시기였다.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아직 새로운 질서가 정착돼 있지 않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런 과도기에는 질서를 만들어낼 만한 역량을 보유한 쪽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승리를 거두는 이들이 있다. 시대 흐름을 관찰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는 이들이 그런 이례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있다.

해방정국 하의 남한에서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승리를 거둔 인물로 이승만을 들 수 있다. 그는 남한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미군정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의 이익을 정확히 대변한 것도 아니고, 한국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승만은 한민족의 염원인 친일청산과 분단반대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 시기의 승자가 됐다. 그가 그런 승리를 거둔 비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 바로 미국 육군 제24군단장으로 남한을 점령한 존 하지(1893~1963) 중장과의 라이벌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존 하지는 누구인가

존 하지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95년에 김학준 당시 단국대 이사장이 그해 9월 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해방공간의 주역 (4): 미점령군 사령관 하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지는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미국의 중서부 일리노이 주의 농촌인 콜콘다에서 태어났다. 고아원에서 자라 24세 때 포트세리단 장교양성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됨으로써 직업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힘든 유아기를 겪고 장교가 된 하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24세) 육군 소위에 임관되고 프랑스 및 룩셈부르크 전선에 파견됐다. 제2차 대전 때는 태평양전쟁에서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랬던 그는 자기 군단인 제24군단 휘하의 제7사단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게 되면서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인물이 됐다.

제24군단의 인천상륙은 52세 된 군단장 하지의 인생이 70세 된 이승만의 인생과 뒤엉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나중과 달리 매우 좋았다. 해방 뒤 미국 국무부의 견제로 귀국 길이 막혀 있었던 이승만을 도운 것은 하지를 비롯한 미 군부 인사들이었다.

국무부는 임시정부 대통령 경력을 앞세워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 하는 이승만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해방 뒤에도 미국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런 이승만이 백범 김구(11월 23일)보다 빠른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하지 중장 등의 호의 덕분이었다.
 

존 하지 장군. ⓒ 위키피디아백과사전

 
하지 중장 등이 이승만을 도운 이유에 관하여 2011년에 <한국정치연구> 제20집 제2호에 실린 김용호 인하대 교수의 논문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는 "미군정의 하지 중장을 비롯하여 베닝호프·윌리엄스 특별보좌관 등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돌아와 미군정을 지지해주면 한국의 정치가 크게 안정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에 대해 어두웠던 군부 인사들은 '친미적이면서도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이승만 같은 인물이 협조해야만 미군의 한국 점령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판단에 따라 이승만의 귀국을 열렬히 후원했던 것이다.

만약 이승만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진 12월 28일 이후에 귀국했다면, 그는 남한에서 지도자 지위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반탁운동을 계기로 남한 정치질서가 새롭게 짜였을 뿐 아니라, 그 뒤로는 미국과 하지 중장이 한국 우파보다는 한국 중도파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귀국이 2개월 보름만 늦춰졌어도 이승만의 정치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입장에서는 자신을 반탁운동 이전에 귀국시켜준 하지 중장이 인생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본색

하지만 이승만의 고마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 회의(3국 외무장관 회의)의 결과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이에 맞선 반탁운동이 전국을 휩쓸면서 미군정의 정책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변화가 이승만의 이익을 건드렸고, 이승만과 하지는 적대적 관계로 바뀌게 됐다.

해방 당시의 한반도에서 좌파가 우세했다는 점은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자국이 포함된 4개국이 한반도 전역을 최고 5년간 신탁통치하는 방안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해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국이 해방될 당시,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통치권을 잃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장제스가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당 군대를 몰아내면, 한반도는 두 개의 친미국가에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가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좌파가 우세한 한반도가 신탁통치 기간 내에 친미 국가로 바뀔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점칠 수 있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가 한국에 보도된 다음날인 1945년 12월 28일부터 미국은 뜻밖의 상황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넉 달 전만 해도 해방의 감격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한국인들이 신탁통치 문제가 나오자마자 반탁 대 찬탁의 극한 대결을 불사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신탁통치 계획이 초장에 무산될 가능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 중장은 자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신탁통치계획에도 차질을 주는 이 같은 극한적인 좌우 대결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다. 신탁통치 논쟁을 제어할 목적으로 그가 안출해낸 방안은 중도파를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좌파와 우파를 둘 다 약화시키고 중도파에게 힘을 실어준 뒤 자국의 의도대로 상황을 이끌고 나겠다는 것이 하지의 새로운 전략이었다.

이런 전략에 따라 하지의 환대를 받게 된 인물들이 여운형과 김규식이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바친 삶, 김규식>은 이렇게 설명한다.
 
미군정이 추진한 정책이 중도파를 중심으로 한 좌우 합작이었다. 미국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대표로 하는 중도파가 일방적으로 소련에 치우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중시했고, 더 나아가서는 중도파의 진보적 성격을 잘 이용하면 미군정이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개량주의적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좌익에 대신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구미외교위원부 시절의 김규식(오른쪽)과 이승만. ⓒ 위키백과

 
1946년 상반기의 이 같은 정세 변화는 이승만의 입지에 위협이 됐다. 가만히 있다가는 이승만이 여운형·김규식에 밀려날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승만은 판을 흔들어대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그해 6월 3일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의지를 천명하는 정읍 발언을 발표했다. 분단 고착화를 전제로 노골적 행보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는 한국임시정부를 세우고 신탁통치를 실시해 한반도 전체를 친미 국가로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반면,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 남한을 친미국가로 만든다는 목표를 표방했다. 이승만이 친미노선을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이익을 부분적으로 침해했기 때문에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대립관계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치한 싸움

이로 인한 두 사람의 갈등은 유치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들의 대결이 유치했다는 점은 이승만이 꺼내든 무기에서도 드러난다. 이승만은 얼마 안 있어 자기 정권의 주 특기가 될 비장의 무기를 하지를 향해 꺼내들었다. 하지를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중도적이기는 하지만 좌파로 약간 기운 여운형과 제휴하는 하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방식이었다.

1946년 12월 하지 중장의 축하를 받으며 미국 방문에 나선 이승만은 미국 활동의 상당부분을 하지 중장 비판에 할애했다. 그는 중도파와 접촉하는 하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다. 이승만의 선전전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이 하지를 공산주의자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인들이 한국인의 말을 믿고 자국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오해했으니, 그 선전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한 하지의 반응이 위의 김용호 논문에 이렇게 소개돼 있다.
 
하지는 1947년 9월 한국을 시찰 중이던 육군성 차관 드레퍼에게 '미국에서 이승만의 나에 대한 공격이 너무 심하여, 내가 1947년 2월에 미국에 갔을 때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변호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의회 지도자와 내가 만난 그룹과 언론들은 나를 친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였다. 나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위 논문에 따르면 그는 1947년 4월 이승만의 귀국을 저지하려 했을 뿐 아니라, 이승만이 돌아오면 가택연금을 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시도는 "하지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하지 자신도 자신이 그런 계획을 세웠음을 인정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소련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던 시기에 이승만은 하지 중장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이승만의 증오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는 그런 이승만이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한국에 들어오더라도 집 밖에 나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의 증오심 역시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이들이 서로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다.
 

대한민국정부수립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과 하지(왼쪽), 맥아더(가운데). 하지의 생각이 아니라 이승만의 생각대로 한반도 정세가 굳어졌다. ⓒ NARA / 눈빛출판사

 
정상적인 경우라면, 두 사람의 대결은 하지의 승리로 끝나기 쉬웠다. 개인적인 정치 역량은 당연히 이승만 쪽이 탁월했지만, 하지는 세계 최강 미국의 대리인이었다. 거기다가 군대를 이끌고 한국에 주둔한 점령군 사령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결은 이승만의 패배로 끝나기 쉬운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대륙의 정세변화가 이 경쟁에 영향을 끼쳤다. 당초 예상과 달리 공산당이 승세를 타면서 중국이 친미 국가가 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게 됐고 이것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줬다. 중국이 반미국가가 되면 '친미국가 중국'과 '친미국가 일본' 사이에 낀 한반도 역시 친미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당초 계산이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반도 전체를 친미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미국의 자신감에도 영향을 미치는 정세변화였다.

중국대륙의 정세변화는 미국이 중국 대신 일본을 소련 방어를 위한 동북아 전초기지로 삼는 한편,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기보다는 한반도 절반에 만족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1947년 하반기부터 구체적 행동에 착수했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것은 남북분단을 현실로 받아들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자

이런 정세 변화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속에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는 원인이 됐다. 동시에, 하지의 생각이 아니라 이승만의 생각대로 한반도 정세가 굳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한반도 절반의 친미국가화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미국은 이승만과 함께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쪽으로 에너지를 집중하게 됐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남북분단을 염두에 두고 단독정부 수립을 지향했다. 이에 관한 그의 일관적인 태도는, 결과적으로 보면 조만간 정착될 한반도 냉전 시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세계적 냉전 시대에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북의 김일성 역시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에 착수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분단 고착화 활동이 한층 더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곧 임박할 세계적 냉전의 흐름에 일찌감치 편승했다는 점은 이승만이 세계 최강국의 대리인인 하지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을 설명해준다. 이승만은 민족의 이익을 무시하면서까지 시대의 흐름에 편승했고, 결국에는 미국과 함께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를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됐다. 이는 이승만이 1948년에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승만의 시대 흐름 편승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한반도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승리는 12년 뒤에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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