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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에 관한 놀라운 기록

[청죽통한사 1] 윤동주

등록 2020.10.20 08:18수정 2020.10.3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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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 [기자말]
1945년 2월 16일. 청년이 죽었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외마디 소리가 독방에 가득 울려 퍼졌다. 부산에서 200km 떨어진 이 형무소는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형무소였다. 그 소리는 조선에 닿지 않았다. 그 소리 속에는 한 청년의 인생이 들어있었다. 별 헤는 밤 불러보았던 이름들. 기쁨, 슬픔, 그리움, 그리고 부끄러움까지 섞였다. 별이 보이지 않는 형무소 바닥에 누워 청년은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았다.

국가 밖 국가, 북간도

죽음의 순간 청년의 눈앞에는 북간도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태어나고, 성장한 곳. 삶의 소중한 추억을 쌓았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을 그곳에서 형성했다. 청년 윤동주의 일생을 돌아보기에 앞서, '간도'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특히 윤동주가 속했던 공동체는 어떤 특성을 가졌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꽤 중요하다.

간도에 집단으로 한반도 사람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9년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부터다. 이들은 큰 집단을 이루어서 간도 곳곳에 공동체를 구성해나갔다. 1910년 3월, 통감부에 보고된 국경지역 한인들의 동향에 관한 문서를 보면, 일제에 의해 조선이 패망할 것을 예상하고 간도로 넘어가거나, 흉년을 피해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이 이미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병합조약이 체결된 뒤로 간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1년에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은 1만 7753명이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한국학자 앙드레 슈미드는 북간도를 '국가 밖에 존재하는 국가'라고 지칭했다. 한국 근대사 속에서 간도의 위치를 이것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일본의 직접적인 통치에서 벗어났기에, 특히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이곳은 새로운 '국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국가 밖'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국가'였다. 돌아가야 할 국가가 있는 디아스포라 집단의 거주지, 이것이 간도를 부르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일본의 직접 통치를 벗어났지만, 간도 한인들은 간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 역학의 자장에 속했고, 이에 따라 간도 참변과 같은 수난과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명동촌: 진보적 기독교의 공간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항일운동가 김약연 선생을 비롯한 6가족 141명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북간도에 형성한 마을이다. 명동촌(明東村). 동방을 밝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김약연 선생이 붙인 이름이다. 동방은 한반도다. 이름에서부터 이 마을이 독립운동을 천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마을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법인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한 번에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 '집단의식'이 남다르고 상황에 따른 결속력이 강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간도 정착에 성공한 이들은 명동촌 구성원의 지속성을 희망했다. 이를 위해, 마을의 지도자들은 교육에 큰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제일 좋은 곳에 서당을 세웠다. 당시는 조선 시대였을뿐더러 김약연 선생을 비롯한 윤재옥(윤동주의 증조부), 문병규 등은 모두 훈장이었기에 서당을 세운 것이다.

김약연 선생은 이 학교가 민족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인재 중 한 인물이 바로 정재면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정재면은 학교에 성경 과목을 개설하고 매일 예배를 보아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숙고를 거쳐서 명동촌은 신문화를 받아들이고 좋은 선생을 모시기 위해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했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기독교 정서가 팽배한 명동촌에서 윤동주가 태어나고 성장했고, 묻혔다. 그의 시에 나타난 향수와 기독교 정서는 북간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인간 윤동주, 소년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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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사촌이자 좋은 친구였던 송몽규 ⓒ 윤동주 기념사업회

 
윤동주는 꽤나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평생 공부로는 송몽규를 이기지 못했다. 경도제국대학(지금의 교토대학) 입학 시험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나란히 지원했지만 송몽규만 붙고 윤동주가 떨어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경도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8년에 걸친 재수를 불사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경도제대의 문은 좁았다. 특히 전문학교 출신은 따로 선발했고 그 인원이 상당히 적었다. 당시 경도제대에 들어가기 위해 동아시아 전역의 수재가 경도로 모여들었고 그 엄청난 경쟁을 뚫고 이 시험에 합격한 인물이 바로 송몽규였다.

문제는 공부뿐 아니라 윤동주가 자신 있던 분야인 문학에서도 송몽규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송몽규는 18세인 1935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당선되었다. 당시는 신문사 수가 적었고 신춘문예 제도의 권위가 대단했던 때라서 당선은 매우 큰 명예였다. 물론 시를 쓰는 윤동주와 영역이 겹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속으로 질투가 나더라도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윤동주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송몽규의 당선 소식을 들은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음속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것일까.

1935년은 윤동주에게 참 안 풀리는 해였다.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해에 북간도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가 처음 한반도 땅을 밟았다. 당시 평양에 있던 숭실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윤동주는 편입 시험을 보았는데 낙제점을 받아 4학년이 아니라 3학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가세가 기울고 있어서 비싼 학비를 내고 평양 학교에 다닌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던 차에 한 학년을 낮춰서 편입하게 되어 부담감이 더 커졌다.

윤동주를 힘들게 한 것은 돈 문제만은 아니었다. 친구 문익환의 존재로 인한 자기비하였다. 윤동주와 달리 친구 문익환은 4학년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공부를 잘한 윤동주였기에 실패로 인한 충격이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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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중학교 시절 사진. 맨 오른쪽이 윤동주, 그 옆이 문익환 ⓒ 윤동주 기념사업회

 
평양은 윤동주에게 좋지 못한 기억을 남겼다. 편입 시험 실패의 충격보다 식민지배의 실상을 처음으로 목격한 충격이 더 컸다. 북간도와 한반도 내의 한민족은 전혀 달랐다. 한반도 내에서 자신의 민족이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실감한 곳이 평양이었다.

이 시기는 일제 통치가 말기 징후를 보이고 있던 때였다. 통치 말기로 가면서 일제는 미국과 사이가 나빠졌고 기독교를 심하게 탄압했다. 한반도 내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선교사 대부분이 미국인이었고 이들은 선교 방편의 하나로 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일제는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거나 일부 선교사를 강제로 귀국시켰다.

탄압을 받은 대표적 학교가 윤동주가 다닌 숭실중학교였다. 신사참배에 저항한 숭실학교 교장은 파면당했다. 민족 자존감과 기독교 신앙이 한꺼번에 짓밟히는 사태에서 조선인 학생들은 동맹퇴학을 감행했다. 윤동주와 문익환도 자퇴하고 북간도로 돌아갔다.

이미 전쟁의 기운이 가득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에 괴뢰국을 세웠고 1936년에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일제는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선포했고 다음 해 2월에는 조선육군지원병령을 공포했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앞세우며 조선을 전시 체제로 재편했다. 열등한 조선인을 1등 신민인 일본인으로 만들어주는 영광이란 식으로 내선일체를 홍보했지만 권리의 평등이 아닌 의무의 평등으로 사실상 조선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의 선전에 불과했다.

일제의 폭정이 심해지던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합격한 윤동주는 경성에 도착했다. 기독교계 학교인 연전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학풍을 가졌다. 캠퍼스에는 무궁화와 태극기가 널려 있었고 한국어 사용도 자유로운, 윤동주가 처음으로 마주한 약속의 땅이었다. 윤동주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마 이때가 아니었을까. 한반도 내의 무릉도원 같은 공간에서 윤동주는 동시를 5편이나 쓸 정도로 순수한 아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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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 졸업식 사진 ⓒ 윤동주 기념사업회

 
이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2학년이 되는 해에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제 역시 본격적으로 전체주의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80%에 가까운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월급을 받지 못했다. 학생은 학교에 갈 수 없었고, 만약 학교가 그런 학생을 정학시키지 않으면 폐교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희전문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윤동주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에 선 작은 청년에 불과했다. 기독교와 민족, 자기정체성이 모두 핍박받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이 청년은 언어까지 빼앗겼다. 문학과 민족을 사랑한 청년 윤동주에게 자기 민족의 언어로 시를 쓰지 못하는 상황은 괴로운 일이었다.

윤동주는 1년을 절필함으로써 당시 받은 충격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팔복>이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불신앙을 드러냈다. 성서에서 약속한 8가지 복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호소였다. 윤동주가 하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을 떠올려보면 그가 얼마나 절망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다

이후 그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많은 변화가 생겼다. 윤동주의 시에서 분열이 노정된다. 윤동주 문학을 분석하며 흔히 분열된 자아를 거론하는데, 주로 이 시기 이후의 시들이 그러한 성향을 띤다.

문학에서 표현된 자아의 분열은 윤동주의 인생사에서도 드러난다.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이 대표적이다. 더는 이 땅에서 시를 쓸 수 없게 된 시점에 내린 결정이었다. 윤동주가 문학을 사랑한 청년임을 감안하면, 이 시기의 문학이 자아의 분열을 나타내었음을 생각해보면, 타협점으로 일본 유학을 결행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문학 너머 역사에 대한 책임감 또한 강하게 느꼈다. 무엇을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과 패배감 속에서도 역사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 절대 절망 속에서 양심의 안간힘을 다하면서 윤동주는 송몽규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나중에 일경에 체포되어 작성한 일본 유학 동기는 송몽규와 같다. 조선독립을 위해서 민족 문화를 연구하기로 하였고 그러려면 전문학교 정도의 문학 연구로는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윤동주는 답했다.

그렇다고 윤동주의 일본 유학 동기가 전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문화 연구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윤동주는 원래 문학 자체를 사랑한 문학인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서 자신이 동경한 시인 정지용의 학교(경도제국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품었을 것이다. 동시에 문학이 민족운동에 (현 단계의 무장투쟁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송몽규의 주장에 분명 동의해 유학을 결심한 측면 또한 있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유학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기 때문에 원서 제출 하루 전까지 창씨개명을 미루다 결국 '히라누마 도오쥬(平沼東柱)'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쓴 시가 <참회록>이다.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거울을 보기 위해 손뿐만 아니라 발까지 써가며 거울을 닦는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까지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곤 돌아오지 못했다.

타향에서의 죽음,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1942년 윤동주는 도쿄에 소재한 릿쿄 대학에 진학한다. 1학기 만에 경도에 있는 기독교 대학 도오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을 간다. 송몽규가 있던 경도로 향한 것이다. 이 결정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고 윤동주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송몽규가 독립운동 혐의로 이미 감옥에 다녀와 '요시찰인' 명부에 올랐기 때문이다. 요시찰인은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들의 밀착 감시 대상이었다. 윤동주는 일제의 감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1943년 3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징병제를 8월부터 시행한다'라고 공표했다. 당시 많은 조선인은 일본이 자신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하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식민지 출신의 군사를 뽑는 것은 일본 정부에도 매우 꺼림칙한 일이었다. 징병하여 군대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군사교육을 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군사교육을 일본 정부가 대신해주는 꼴이 되어버릴 수 있었기에, 일제는 1943년까지도 조선인 징병을 꺼렸다.

일제가 조선인 징병을 시행한 것은 물불 가리지 않아야 할 정도로 다급해졌다는 의미였다. 이면의 흐름을 인지한 송몽규는 징병에 적극 찬성했다. 그는 "조선인은 종래 무기를 알지 못했지만 징병제도의 실시로 새로운 무기를 갖춘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의 전세가 기울 시점에 조선 독립에 힘이 될 수 있다는 견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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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첫해 여름. 앞줄 좌측 윤영선 송몽규 김추형, 뒷줄 좌측 윤길 윤동주. ⓒ 윤동주 기념사업회

 
이러한 상황에서 요시찰인 송몽규의 '불온한' 사상을 일제는 용인할 수 없었고, 1943년 7월에 송몽규가 체포되었다. 윤동주도 곧이어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금지하는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으로 경도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윤동주를 주로 시로 투쟁한 인물이라고 배우지만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재판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윤동주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부끄러워하던 소극적인 이미지의 시인은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저항의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다가온다.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할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다.

이 모든 주장과 발언은 고문을 일삼던 특고 앞에서 한 것이다. 사상범은 증거가 없어서 풀려나기 쉬웠다. "잘못했다" 혹은 "그런 적 없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다. 특고 앞에서, 판사 앞에서 당당히 조선독립을 주창한 데서 시인 윤동주의 지사적 기개를 확인하게 된다. 스스로 경도에 걸어들어올 때 이미 예견한 일인 것처럼 재판받을 때 그에게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1944년 4월 17일 혐의가 인정되었고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송몽규도 이곳에 수감되었다. 청년은 시집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시신이 북간도로 돌아가 묻혔다.

청년에서 항일민족시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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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보이는 윤동주 시비의 전경 ⓒ 박서윤

 
짧았던 윤동주의 인생은 북간도에서 시작해 평양, 경성, 일본 그리고 다시 북간도에 돌아가는 여정으로 구성된다. 가장 특이한 점은 한반도 밖에서 태어나, 한반도 밖에 묻힌 인물 중에서 한반도 내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28년이라는 짧은 세월 속에서 한반도에 거주했던 기간은 오직 4년이다. 어째서 윤동주라는 청년이 일제강점기의 대표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일까.

비록 송몽규처럼 진취적이지 않았지만 문학을 좋아했던 윤동주는 암담한 시대에 고통받고 사악한 역사에 저항하며 시를 썼다. 그의 삶에 대해,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썼다기보다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시를 썼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에게 시를 쓰게 한 동인은 북간도 한인들의 한과 염원이었고, 조선을 침탈하여 조선인을 착취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북간도라는 지역과 민족주의 기독교 공동체로 결속된 명동촌은 태생적으로 항일의 특질을 지닌다. 윤동주는 그곳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묻혔다. 윤동주의 인생을 보면, 조선과 간도가 보인다. 윤동주가 인생에서 겪은 좌절은 결코 시대와 무관하지 않기에, 그가 속한 간도와 간도의 조선인 전체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은 불행과 전혀 무관하지 않고, 그것이 확대되어 그 당시 한반도가 겪은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인생, 그의 고민을 통해 우리는 윤동주 개인뿐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를 목격하게 되고, 순진했던 청년의 삶은 그렇게 우리 민족의 수난과 희망을 은유하는 한 편의 시가 되었다.


- 강우정: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농구하며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한다. 법과 철학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많은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에 힘쓴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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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윤: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강유인화, 「식민지 조선과 병역 의무의 정치학」, 『사회와 역사』 109, 한국사회사학회, 2016,
2. 김신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과 동화정책」, 『동국사학』 60, 동국사학회, 2016.
3. 김응교, 「만주, 디아스포라 윤동주의 고향」, 『한민족문화연구』 39, 한민족문화학회, 2012.
4. 김치성, 「윤동주 시의 발생론적 시원 연구」, 『우리말글』 69, 우리말글학회, 2016.
5. 송우혜, 『윤동주 평전』, 푸른역사, 2004.
6. 송우혜, 「윤동주 시인이 꿈꾼 세상」, 『계간 서정시학』 25, 2015.
6. 유성호, 「윤동주의 시의 근원적 표상으로서 북간도」, 『서정시학』 제28권 제2호,2018.
7. 윤병석, 「한인(조선인)의 간도 이주 개척과 『간도개척사』」, 『백산학보』 79, 백산학회, 2008,
8. 이수경, 「윤동주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과 『문우』(1941. 3)지 고찰」, 『한국문학논총』 61, 한국문학회, 2012,
9. 홍용희, 유재원, 「분열의식과 탈식민성」, 『한국시학연구』 39, 한국시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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