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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신문배달원 수입은 동아, 조선, 한국 순이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3부 소년의 꿈 (13)

등록 2020.11.11 11:06수정 2020.11.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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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배달 코스인 옛 창덕여중고 자리로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다. ⓒ 박도

  
시내버스 노선과 같은 배달 순서

신문배달은 시내버스 노선처럼 배달 차례가 정해져 있었다. 첫집부터 끝집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배달해야 한다. 배달이 끝난 뒤, 간혹 신문이 한두 부 남으면 어느 집을 빠뜨렸는지 기억을 되새기며 헤매기 마련이다. 대문 틈으로 신문을 넣으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상큼하다.

좁은 문틈으로 신문을 재빨리 넣는 것도 솜씨가 필요했다. 그것은 말로 터득되지 않고 세월이 말해줬다. 담 너머로 신문을 던지는 솜씨도 마찬가지였다. 배달 초기에는 선임들의 재빠른 손놀림에 탄복했다.

그런데 나도 세월이 지나자 그들 못지않게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도 축대 위에서 대문 안으로 신문을 던질 수 있었다. 또 담 너머로 정확히 사뿐하게 대청마루까지도 날릴 수도 있었다.

신문을 가지런히 추리거나 부수를 정확히 빨리 헤아리는 솜씨도 세월에 비례했다. 기능이란 밥그릇 수에 비례하기 마련이었다. 내 배달 구역은 가회동과 삼청동이었다. 그 지역은 지대가 높았다. 어떤 집은 계단을 스무 개 올라야 했고, 한 집 때문에 삼청공원 들머리까지 500여 미터는 가야 했다.

그러나 그 구역은 유명 인사와 부자들이 많이 살아서 보급소에서는 에이(A)급으로 쳤다. 그것은 수금실적으로 판가름했다.
   
신문배달원이면 수입이 똑같은 줄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월급제가 아니고 부수에 따른 수당제였다. 월말에 수금해 먼저 일정액을 보급소에 입금하고 나머지 돈은 배달원몫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집 수금은 참 힘들었다. 매달 한 달씩 늦게 주는 집, 열흘씩 보름씩 늦게 주는 집, 신문대금을 깎아서 주는 집 등 천차만별이었다. 그걸 따지고 들면 당장 신문 안 보겠다고 말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런 독자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눈치껏 수금했다. 세상만사 힘들지 않는 일은 없었다. 신문배달보다 수금이 더 어려웠다.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상감청자(2012. 6. 촬영) ⓒ 박도

 
어떤 온정


그때 <경향신문>을 60여 부 배달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에 견주면 구역은 두세 배나 넓었지만 수입은 1/3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무렵 <경향신문>은 4.19혁명 덕분으로 복간돼 잠시 인기를 누리다가 5.16 쿠데타로 장면 정권이 무너지자 독자가 폴싹 줄었다.

지역 주민들도 신문의 인기에 따라 배달원을 대하는 것 같아 속이 몹시 상했다. 당시 가회동, 삼청동 등 북촌에는 유명 인사들이 많이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댁은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댁과 박흥식 화신백화점 회장 댁이었다.

어느 하루 김활란 총장 댁에 수금을 하러 가자 가정부가 신문대금 외에 별도의 가외 돈을 건네줬다. 총장님 뜻이라고 했다. 박흥식 회장 댁 수금은 신문 배달 장소와는 달리 신문로 경기여고 앞 화신상회 회사로 가서 수금해야 했다
 

나의 경향신문 첫 배달지역이었던 현재 북촌 가회동 거리 ⓒ 박도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아일보 배달원

당시는 <동아일보> 배달원 수입이 가장 많았다. 그 다음 <조선일보>, <한국일보> 순서였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한 배달원의 배달부수가 200~300부 정도였으나 그때 <경향신문>은 50~60부 정도였다.

그때 나는 배달구역도 좁고, 부수가 가장 많은 <동아일보> 배달원이 몹시 부러웠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배달원들은 경쟁자지만 서로 알고 지냈다.

어느 날 나는 김대식이란 <동아일보> 계동 배달원에게 배달 자리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대뜸 학교 다니느냐고 물었다. 휴학 중이라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자기네 보급소에서는 재학생만 배달원으로 쓴다고 했다. 그 말이 송곳으로 가슴에 찔리듯 아팠다. 그는 시무룩 돌아서는 내가 측은하게 보였던지 위로했다. 그 무렵 자기네 보급소에는 자리도 없다면서 내가 학교에 복학을 하면 꼭 알아봐주겠다고 말했다.

나의 배달 코스는 보급소인 낙원동에서 재동 창덕여고(현 헌법재판소)를 시작으로, 가회동 한옥마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왼편 삼청동으로 넘어가서 화동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안국동 당시 윤보선 대통령 댁에 이르면 끝이었다. 조간 배달 때는 거의 사람들이 없었지만 석간 배달 때는 학생들이 몹시 붐볐던 지역이었다.

그 무렵 그 일대는 경기, 덕성, 풍문, 창덕, 중동, 숙명, 수송전기공고 등 학교가 많았다. 석간 배달 때 마름모꼴 명찰을 단 경기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보면 열등감에 젖었다. 덕성이나 풍문여고 학생들과 마주치면 무척 창피한 감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며칠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하니까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 신문배달이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학비를 벌기 위한 일이 아닌가. 차츰 열등감이나 창피하다는 생각이 무뎌지면서 그때부터는 고개를 들고 다녔다.
    

왕눈이에게 멱살을 잡혔던 계동골몫 ⓒ 박도

   
닦새 왕눈이

어느 새벽 신문을 돌리다가 휘문학교 앞 골목에서 <조선일보> 계동 배달원 왕눈이에게 멱살을 잡혔다. 그는 별명대로 눈이 크고, 우락부락 험한 인상이었다.

"야! 경향, 너 이 새끼! 왜 싫다는 집에 신문을 넣어! 너 때문에 내가 신문을 못 넣잖아. 그 집에 한 번만 더 넣으면 네 꼴통 까버릴 테다."

월말에 한 독자 집에 수금 갔더니, 다른 신문을 보겠다고 하면서 그만 넣으라고 했다. 하지만 신문을 남길 수 없어 계속 넣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독자들의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면 배달 부수가 10여 부 이상 줄어들 판이라 어쩔 수 없이 계속 넣었다. 게다가 보급소에서도 호락호락 신문부수를 줄여주지 않을 뿐더러, 부수가 줄면배달 수입도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며칠 뒤, 배달 중 왕눈이가 다시 불렀다.

"야, 경향. 너, 내 보조할 생각 없냐? 보조하다가 우리 보급소에 배달원 자리 나면 네가 꿰차고. 너 지금 수입보다는 내가 더 생각해 줄게."

나는 기왕에 배달원이 된 이상 수입이 더 나은 곳으로 옮기려던 참이라 그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내 구역을 다른 아이에게 인계한 후, 마침내 왕눈이의 보조 배달원이 됐다.

보조 배달원은 신문뭉치를 들고 사수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신문을 돌리는 일이다. 독자집이 다 익자 사수는 큰길에 서 있고 보조는 골목골목을 배달하거나, 두 사람이 구역을 분담해 한 사람은 역순으로 배달하면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왕눈이의 또 다른 별명은 '기관차'였다. 그는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배달구역 끝 독자 집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보통 배달원이 2시간 정도 걸릴 곳을 그는 1시간이면 족했다. 그때 나도 신문배달에 이력이 났지만 그의 속도를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석간 배달 중, 중앙학교 앞 찐빵 가게를 지날 때면 왕눈이는 한꺼번에 찐빵을 대여섯 개나 후딱 먹어치웠다. 왕눈이는 험악한 인상과는 달리 정이 많았다. 내가 찐빵을 몇 개나 먹든지 상관치 않고 값을 치렀다.

그는 아침 배달이 끝나면 구두닦이 통을 메고 명동으로 갔다. 어느 날 배달 중, 내가 독자 집 한문 문패를 죄다 읽자 그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너 먹물 좀 들었군. 어느 학교 다녔어?"
"중동."
"뭐! 중동? 퇴학 맞았냐?"

"아니, 돈이 없어서 그만뒀어."
"X팔 돈이 뭔지..."

 

옛 휘문중고 자리에 현재는 현대건설 사옥이 들어서 있다. ⓒ 박도

 
내년에 복학해라

내가 배달 구역을 완전히 익히자 왕눈이는 조간 때만 드문드문 나왔다. 석간 때는 아예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닷새 만에 나온 그는 내게 자기 대신 구역을 아예 맡으라고 했다.

"마침 명동 증권회사 빌딩 하나를 잡았어. 요즘 거기 일만 해도 벅차. 그래서 딱새(구두닦이) 보조 둘을 두고 있어. 이달 입금하고 남는 돈 너 다 가져. 내년 봄에 꼭 복학해라."
"고마워."

"고맙긴. 이게 뭐 대단한 자리라고."
"그래도 나한테는."
"명동에 오거든 꼭 들려. 국립극장 앞 딱새들에게 왕눈이라고 하면 가르쳐 줄 거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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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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