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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티아고', 홀로 조용히 걷는 순례길

[기점·소악도 순례길 ①] 허리를 굽혀 종을 울리면, 순례가 시작된다

등록 2020.10.21 09:28수정 2020.10.2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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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소악도 순례길. 길 끝에 4번 야고보의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 차노휘


만조로 발이 묶인 사람들
 

"물이 차면 발이 묶이긴 하지만 풍경이 깨끗해지면서 단순해져요."

전남 신안군 기점‧소악도 순례자 게스트하우스 실장이 한 말이다. 목포에서 살고 있지만 주방 일 때문에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일을 하고 있다던 그녀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조명에 빛나는 천사대교를 내가 더 잘 볼 수 있게 식당 유리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섬 생활의 외로움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푸는 대답처럼 들렸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 차노휘

노두길이 물에 잠겨서 8번 마태오의 집(성당)에 갈 수가 없다. ⓒ 차노휘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게스트하우스 데크 의자에 앉아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봤다. 물이 점점 차오르면서 소기점과 소악도를 잇는 노두길(섬과 섬 사이를 잇는 길. 처음에는 주민들이 돌멩이 등을 놓아 만든 길이나 지금은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 차 한 대 정도 지나갈 정도의 넓이이다)과 낮은 둔덕을 만들던 너른 갯벌을 집어삼키면서 게스트하우스 마당 아래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풍경이 단순해지고 깨끗해진다는 그녀의 말에 공감하면서 사진을 찍거나 서성거리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순례자들을 보았다. 메모를 하고 있는 내 뺨을 해풍이 건드리고 가긴 했지만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바람이어서 견딜만했다.
  

소기점에 있는 순례자의 섬 게스트하우스와 카페. 모든 순례자들에게 이곳은 경유지이다. ⓒ 차노휘

 
순례자

전날 송공(宋孔) 선착장에서 마지막 배를 타고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소기점으로 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신문이나 블로그 등에서 해시태그 붙어 있는 '섬티아고'는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두 번이나 다녀와서인지도 모르겠다.

가봐야지 하면서도 늦춰지기만 했다. 코로나바이러스19 영향으로 추석 연휴 때까지 아예 섬으로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로 완화되어 게스트하우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일상이 여행인 여행자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소기점 선착장에 나를 내려주고 떠나고 있는 여객선. 송공 선착장에서 소기점까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 차노휘

 
배를 타기 전부터 잿빛 구름 탓인지 늦은 오후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좁은 아스팔트길은 낯설고 스산했다. 먼 바다 김 양식장 표지와 칙칙한 갯벌, 몸을 뒤채는 갈대들의 몸놀림, 띄엄띄엄 있는 비닐하우스, 새우 양식장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물줄기, 약품을 담았을 법한 파랑색 플라스틱 통들, 길가에 묶여 있는 개… 코로나바이러스19의 여파일까. 순례자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의 첫날은 인적 끊긴 섬처럼 보였다.

섬은 도시보다 어둠이 일찍 왔다. 나는 고독한 적막을 안주 삼아 식당에 달랑 두 병 남아 있는 지도(智島) 막걸리를 마셨다. 말동무는 실장이었다. 순례길은 다음날 동 트고 나서 출발해도 늦지 않았다. 도상 거리 12km이다.

이렇게 해서 12사도(使徒) 성당 순례길이 만들어졌다
  

순례길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어우러져 있다. 붉은 맨드라미가 있는 순례길. ⓒ 차노휘

 
12사도 성당 순례길의 출발은 2017년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되면서부터였다. 증도(曾島)에 있는 문준경(文俊卿, 여, 1891-1950) 전도사 기념관에서 영감을 얻었다.


살아생전 그녀는 노두길을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이곳 주민 90% 이상이 개신교도이다. 상징적인 교회를 짓자는 발상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해서 증도면에 있는 네 섬(대기점, 소기점, 소악도, 진섬을 묶어 '기점‧소악도'라고 한다)을 묶어 섬 구석구석에 12개의 성당을 들여놓았다.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솜씨가 빛났다. 작가들이 각각 해석한 사도들의 특징과 의미가 성당 형상물과 풍광에 잘 녹아들었다. 네 군데의 섬에 흩어져 있는 성당을 연결해서 작은 산티아고 '기점‧소악도 순례길'이 탄생했다. 유럽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을 빗대어 사람들은 '섬티아고'라고도 부른다.

순례길의 시작점인 베드로 성당
  

대기점 선착장 끝에 1번 베드로의 성당이 있다. ⓒ 차노휘

 
'섬티아고 순례길'은 종을 쳐야 제대로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다. 그 의미는 다르다. 시작점 종탑은 그 키가 작다. 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몸을 숙여야 한다. 겸손과 건강을 기원한다. 마지막 종탑은 배배 꼬여 있다. 순례가 다 끝나도 '당신'의 마음이 꼬여 있다면 다시 순례를 시작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나는 10월 16일 아침 일찍 대기점 선착장에 등대처럼 서 있는 첫 번째 사도인 '베드로의 성당' 앞에 '시작'을 알리기 위해서 도착했다.

종탑 앞에서 무릎을 구부리고는 종 줄을 잡았다. 해풍 리듬에 맞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기 뱃고동 울림 같은 소리가 퍼졌다. 아무도 없는 그 공간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이번에는 온 힘을 다하여 줄을 흔들어댔다. 절제력 잃은 종소리가 사방 사납게 달음질해댔다.

저 멀리서 노부부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난잡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모른 척하며 등에 멘 배낭을 한번 추키고는 두 번째 '안드레아의 성당'으로 향했다. 이렇게 순례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대기점 마을 돌담과 순례길. 자전거 타기에도 좋다. ⓒ 차노휘

물이 빠져 갯벌 맨살이 드러났다. ⓒ 차노휘

#기점소악도 #섬 #순례길 #섬티아고 #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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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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