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과 함께 살겠다며 완도로 내려온 97세 아버지

[서평] 아버지와 함께 완도 토방에서 지낸 곽의진의 이야기 '섬, 세월이 가면'

등록 2020.10.21 15:52수정 2020.10.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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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사람 이야길 읽는다. 섬 여행기이긴 한데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에 사람 사는 냄새가 없을까마는 100살이 넘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이와 섬의 이야기가 따스하다.

요즘 부쩍 섬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종종 하는 일이 지도 펼치고 서해, 남해의 섬을 찾아보는 일이거나 인터넷을 뒤져 섬과 관련 글이나 책을 찾아보는 일이다. 그러다 주말이면 종종 집 가까운 섬들을 돌아보고 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만난 책이 곽의진의 <섬, 세월이 가면>이다.
 

<섬, 세월이 가면> / 곽의진 ⓒ 김현

 
섬과 세월, 두 단어가 좋아 선택한 책. 책을 읽기 전에 책 표지의 두 단어를 곰곰이 연결하며 어떤 의미로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생각해봤다. 그리고 첫 장을 열었다. 필자의 프롤로그에 '세월이 간다'라는 구절이 여덟 번이 나왔다. 그 세월은 필자가 '학바우'라 지칭하는 아버지의 삶과 세월이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세월이다.
 
문득 세월 꽁무니를 거침없이 따라 가버리신 아버지 생각 간절하다.
세월은 사람을 데리고 간다.
세월이 간다.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지천으로 피어난 들국화를 보며 읊조린다.
토방 주변에 노란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곽의진은 서울 생활을 접고 글을 쓰면서 살고자 홀로 고향 완도에 내려왔다. 그곳에서 어떤 구애받음도 없이 새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며 글을 쓰고 늙음을 즐기고자 했다. 그래서 갯가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터를 마련하여 흙집을 지었다. 자운토방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그곳에 막내딸과 함께 살겠다며 97세의 학바우씨가 찾아왔다. 오빠들은 잠시만 함께 있으라 하며 도시의 삶의 터전으로 올라갔다. 곧 모셔간다는 말은 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 함께 한 학바우씨와 티격태격하면서 저자의 귀향 생활은 7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다 곽의진은 학바우씨와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답답함을 떨치기 위해 섬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전남일보에 '곽의진과 함께 하는 섬기행'이란 이름으로 연재했다.

이 책은 그때 연재했던 내용을 조금 수정해 묶은 것인데 세상에 나온 지는 세월이 좀 흘렀다. 세월이 흐른 만큼 학바우씨는 10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저자 또한 배우인 사위 우현과 함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68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세월은 사람을 데리고 간 것이다.
  
텁텁하지만 맛깔나는 막걸리 같은 부녀 모습

섬여행을 떠나기 전 아침 일찍 일어나 학바우씨 조반을 차려준다. 일정이 늦을 때는 점심 저녁까지 미리 준비해 놓는다. 늘 자신을 기다리는 학바우씨 때문에 그녀의 여행은 늘 당일치기다. 하룻밤을 자고 오는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자신을 눈 목 빠지게 학바우씨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통통한 조기 두 마리를 굽는다. 검은 콩 섞인 쌀밥을 흰 주발에 담아 뚜껑을 덮어 두고 조기가 익기를 기다린다. 지글지글 노릇노릇 잘 익는다. 맛도 솔솔 빠져나온다. 학부우 씨가 부엌 쪽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넘겨다 보신다. 고기 굽는 냄새에 회가 동하신 터다. 학바우씨의 조반상엔 어린배추 토장국과 나박김치, 구운 조기, 콩자반이 올려졌다. 나는 조반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식사요~"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막둥이 목 아프다. 소리 지르지 마라."
학바우씨는 손사래를 치신다. 당신 귀가 어두워 노상 소리지르는 나를 걱정하신다.
 
두 사람은 투닥투닥 하면서도 서로를 생각한다. 그 마음이 텁텁하면서도 맛깔스런 막걸리의 맛처럼 글 전반에 나타난다. 귀가 어두운 학바우씨에게 식사하라는 딸내미의 큰 소리에 목 아프니 소리 지르지 마라는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안방을 내주고 거실 찬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면서도 매 끼니를 따박따박 학바우씨의 입맛에 맞게 밥상을 차려주려는 막내딸. 그러면서도 그걸 예쁘게 포장하지 않고 가끔 툭툭 대는 딸내미의 현실감이 글 속에 드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한다.

팔십 구십이 넘는 노인과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잔소리가 많아진다. 그 잔소릴 귀찮아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서로 후회한다. 그리고 또 잔소리에 다툰다. 그러다 집을 떠나 좋은 것을 보면 함께 보고 싶다. 맛있는 걸 먹으면 또 생각난다.

"천 년의 섬 흑산도 가는 길은 멀다. 목포에서 쾌속정을 타고 뱃길로 두 시간 남짓인 터, 흑산도를 떠올리면 멀게만 느껴지는가?"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를 입속에 굴리면서 오른 여행길. 그곳에서 여행 대신 흑산도 할매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인다. 막걸리 한 사발에 홍어를 안주 삼아.

세 여자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얼큰히 취하는 중에 막걸리 반 되가 바닥나자 주인 할매가 다시 반 되를 더 가지고 왔다.

"이 놈 값은 안 받을 텐께."
"학바우 씨홍어 좋아하시는디……."
"이녘 남편도 홍어 좋아하시는가? 그럼 한 접시 사가지고 가! 여그서 사야 진짜 흑산 홍언께."


학바우씨가 남편인 줄 알고 맛난 홍어를 권하는 할매들. 굳이 학바우씨가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 글쓴이. 학바우씨를 위해 홍어 한 접시를 사서 검은 봉지에 넣어가지고 오다 깜박하고 배에 두고 내려 후다닥 배에 뛰어 올라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홍어 검은 봉지를 발견하고 안심하는 딸내미. 학바우씨가 숨을 거두는 순간 '편히 가세요'라는 말을 한 것이 가슴에 남아 회한의 마음을 드러내는 저자의 마음은 우리네와 다를 게 없다.

세월이 간다
 
학바우씨 오신 지 7년째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살았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사라졌다.
처음엔 학바우씨 미워하며 함께 살았고 다음엔 귀여워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고 이젠 학바우씨와 서로 눈맞추며 살날이 얼마 남았을까,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당신, 내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얼마쯤인가.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무엇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런데 시나브로 흘러가는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금의 시간이 계속되리라 믿는 게 우리네다. 세월이 흘러감을 인정하면서 그리운 이와 미워하며 사랑하며 눈 맞추며 살아가는 곽의진의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제 그 세월이 두 사람을 데려갔지만.

섬, 세월이 가면

곽의진 (지은이),
북치는마을, 2012


#섬,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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