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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3시간 동안 꼼짝없이 갇히는 성당

[기점·소악도 순례길②] 순례자란 결국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등록 2020.10.24 19:52수정 2020.10.2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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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숙박
  

1번 베드로의 집(건강의 집, 김윤환 작품): 대기점 선착장에 있어서 등대와 대기소 역할을 한다. 낮은 종탑 종을 울리면 순례의 시작을 알린다. ⓒ 차노휘

 
첫 번째 사도인 '베드로의 성당'을 포함하여 다섯 개의 성당이 있는 대기점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뉜다. 이곳에 민박집이 더러 있고 음식 맛도 좋다. 2인 기준 5만 원인 민박에서 이틀을 보낼 생각도 했지만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사치이지 싶었다.

소기점에 마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그곳에는 사무장과 실장 그리고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카페 주인이 근무하고 있다. 침대 당 가격은 2만원이다. 2층 침대가 4개 있는 룸이 2개 있다. 각 룸에 8명이 잠을 잘 수가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묵었던 '알베르게(albergue)'에 비하면 최상급이다. 알베르게 침대 당 5천원에서 2만 원까지 지불해봤다. 남자여자 상관없이 온 순서대로 그들은 침대를 배정해주었다. 그곳에서는 이성이 있을 수 없었다. 순례자들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섬티아고'라는 애칭이 내게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모양이다.
  

2번 안드레아의 집(생각하는 집, 이원석 작품): 이곳에서 노래를 한 곡 불러도 좋다. 공명이 좋다. 어느 수녀님은 이곳에서 노래를 부른 덕에 7번이나 기점소악도 순례를 했다고 한다. 정자 뒤로 병풍도로 향하는 노두길이 있다. ⓒ 차노휘

 
순례의 방식은 산티아고처럼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대기점과 소악산 선착장 두 군데에 자전거를 임대해주는 컨테이너박스가 있다. 대기점 1004 자전거 대여소에는 나보다 일찍 아저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걷는 순례가 좋아서 걸었지만 2번 안드레아의 성당에 갔을 때에는 자전거를 타도 좋을 것 같았다. 작은 성당 뒤로 병풍도(屛風島)로 이어지는 노두길이 길게 드러나 있는 것을 봤을 때 순간, 자전거로 질주하고 싶었다.

사도들의 성당들
 

2번 안드레아의 성당 앞 고양이 동상. 푸른눈이 인상 깊다. ⓒ 차노휘

 
안드레아의 성당 앞에는 수호신처럼 고양이 동상이 있다. 옛날 이곳 주민들은 들쥐 피해를 막기 위해 고양이를 키웠다. 개와 고양이가 싸우자 동네 사람들은 개를 육지로 추방시켜버렸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보다 고양이가 많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동물로 남아 있다. 주민들의 마음을 반영하여 고양이 동상을 세운 듯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푸른 눈의 고양이 동상을 일별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으로 나 있는 창을 통해 바다를, 반대 쪽 창으로는 마을 풍경을 감상하고는 둥그런 탁자 위에 길쭉한 문 모양의 빛이 비치는 것을 신비롭게 보았다. 해와 달. 밀물과 썰물. 그리고 마을과 바다. 햇살과 어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함께하고 있었다.
  

3번 야고보의 집(그리움의 집, 이원석 작품): 풍경과 잘 어울리게 수풀 사이에 오두막처럼 서 있다. 뒤로 뚫린 구멍으로 핑크빛이 흘러들어와 실내를 유독 밝고 따뜻하게 한다. ⓒ 차노휘

   

4번 요한의 집(생명평화의 집, 박영균 작품): 자궁을 형상화 했다. 밝고 따뜻한 분위기이다. 바닥 모자이크에는 평화의 열쇠가 숨어있다. 평화의 열쇠 형상은 또한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기의 모습이다. 사랑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가 평화의 꽃을 피우고는 죽음에 이른다는 메시지가 곳곳에 있다. 바다 쪽이 아닌 밭쪽으로 뚫려 있는 긴 창으로 바깥을 자세히 보면 무덤이 보인다. 작가의 숨은 의도인 셈이다. ⓒ 차노휘

 
자연과 한 몸이 된 듯한 성당은 3번 야고보의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풍경과 잘 어울리게 수풀 사이에 오두막처럼 서 있었고 뒤로 뚫린 구멍으로 핑크빛이 흘러나와 실내가 유독 밝고 따뜻하게 보였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4번 요한의 성당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비늘 모양의 날렵한 박공지붕이 있는 5번 필립의 성당에 당도했다.
 

5번 필립의 집(행복의 집, 장미쉘, 브루노, 파코 작품): 계절과 시간 변화를 잘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대기점과 소기점을 잇는 노두길에 물이 차고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붕은 비늘, 실내는 배를 형상화했다. ⓒ 차노휘

   

6번 바르톨로메오의 집(감사의 집, 장미쉘과 알룩 작품): 호수 안에 있다. 작가가 대기점 웅덩이에 있는 연꽃을 모티브 삼아 호수 위에 건축물을 올렸다. 건축물은 새와 파도를 형상화 했다. 예전에는 나룻배가 있어서 호수에 떠 있는 호루라기 같기도 하고 독수리 옆모습 같기도 한 성당에서 별을 볼 수 있게 했다(사진은 뒤쪽에서 찍었다). 지금은 눈으로만 갈 수가 있다. ⓒ 차노휘

   
기점소악도에 2박 3일 머무르면서 나는 대기점과 소기점을 두어 번 오갔다. 오가는 길목에 있는 성당이 필립의 성당과 6번 바르톨로메오의 성당이다. 바르톨로메오의 성당은 호수 위에 떠 있다. 언뜻 보면 호루라기 같기도 하고 독수리 옆모습 같기도 한 이 성당의 모티브는 물 위 떠 있는 연꽃이다. 그리고는 새와 파도를 형상화했다.

호수 주변을 좀 더 단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첫인상의 아쉬움은 곧 사라졌다. 매번 볼 때마다 요술을 부리듯 인상이 달라졌으니까. 아마도 시간과 날씨 영향으로 빛이 반사하는 양에 따라 조형물의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일 거였다. 바르톨로메오의 성당부터 게스트하우스 뒤편에 있는 7번 토마스 성당과 노두길 중간에 있는 8번 마태오의 성당이 소기점에 위치하고 있다.
  

7번 토마스의 집(인연의 집, 김 강 작품): 불빛 영향을 받지 않고 별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바닥에는 하늘의 별을 상징하는 유리알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그림도 찾아볼 수 있다. 아주 조용해서 명상하기에 좋다. ⓒ 차노휘

  

8번 마태오의 집(기쁨의 집, 김윤환 작품): 아랍 건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곳 작물인 마늘과 양파를 형상화 했다. 사방에 문이 있어 갯벌을 관찰하기 좋다. 하절기에는 낙조가 금빛 계단으로 바로 떨어진다. 붉은 노을과 금빛이 만나서 붉으면서도 노란 빛이 황금 계단을 물들인다. 사진작가들에게 제일 사랑 받는 곳이다. 가을 일몰은 세 시 방향이다. ⓒ 차노휘

 
어떤 성당이 제일 인상 깊은가요?


오후 3시 24분에 소기점과 소악도를 잇는 노두길이 열렸다. 온통 잿빛인 섬은 음산하기까지 했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해서 작은 기도처인 프로방스풍의 9번 작은 야고보의 성당을 거쳐 삼거리에 있는 10번 유다 타대오의 성당, 유일하게 문이 없는 11번째 시몬의 성당을 지나 좁은 오솔길이 아니라 해안가로 곧장 순례의 끝 종을 칠 수 있는 12번 가롯 유다의 성당으로 향했다. 미숫가루 같은 모래사장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은 마지막 성당에 드디어 발을 디딜 수 있었다.
  

9번 작은 야고보의 집(소원의 집, 장미쉘과 타코 작품): 유럽 어부들의 기도처이다. 문틀 위 기둥들은 마을에 있는 백년 된 고가 기둥을 뜯어서 만들었다. 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문 위에는 물고기 형상이 있다.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한 평 반 정도 마루가 마련되어 있다. ‘야박(夜泊)’도 할 수 있다. 대문 왼쪽에 6미터 하얀 벽이 있다. 지붕은 동판이다. 동록(銅綠)이 하얀 벽에 흘러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지도록 의도했다. 세월의 흔적이 그림인 셈이다. 문 오른쪽에는 소원을 비는 기도문이 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 차노휘

   

10번 유다 타대오의 집(칭찬의 집, 손민아 작품): 삼거리에 위치한다. 지붕의 곡선이 독특하다. 곡선이 올라가면 만남, 내려가면 헤어짐을 나타내는데 인연에 따라 만남과 헤어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인연의 중요함을 말한다. ⓒ 차노휘

 
앞서 간 순례자들은 물이 빠지지 않아 먼발치에서만 보고 돌아가야 했다.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행운을 쥔 나는 다음 순례자가 올 때까지 오랫동안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복잡한 머리를 순례를 마쳤다는 종소리로 날려버리고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사무장이 물었다.

"어떤 성당이 제일 인상 깊은가요?"

나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마지막 사도인 가롯 유다의 성당이라고 답했다. 순례를 다 마쳤다는 만족감이 제일 컸을 수도 있다. 진섬에 홀로 유배시켜놓은 듯한 위치 선정(대기점 5곳, 소기점 3곳, 소악도 3곳, 진섬 1곳)도 그랬다. 간조 두 시간 전후로만 길을 허락해서 접근이 용이하지도 않았다. 물이 들어차면 나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11번 시몬의 집(사랑의 집, 강영민 작품): 문이 없다. 육지에서 바다를 볼 수 있고 바다에서 바로 육지를 볼 수 있다. 육지와 바다가 하나이다. 작가의 심벌마크는 ‘Sleeping Heart’이다. 잠자는 심장. 사람은 잠을 잘 때 가장 자연과 가까워진다고 한다.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으며 낚시하기가 좋은 곳이다. ⓒ 차노휘

 
내가 좀 더 가롯 유다에게 호감을 보인 것은 제일 인간적인 사도라는 내 나름대로의 견해 때문이다.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있긴 했다. 그는 명예욕이 강했지만 신앙 고백을 잘했다. 결국 순교하여 제일 큰 제자가 되었다. 가롯 유다는 순교가 아니라 자살을 택했다. 성경에서는 마귀의 짓이라고 했지만 어찌했든 그도 예수가 선택한 제자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끊임없는 '의심'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진짜 신일까, 아니면 정치적 리더일까…. 로마의 박해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혁명가를 당시 민중은 원했다. 가롯 유다도 그 중 한 사람이겠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의심도 무시할 수 없을 거였다. 나 또한 가롯 유다와 다름없다. 이 시대의 리더들의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간혹 나와 내 주변의 신뢰까지도 부정할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기다림의 미학
  

가롯 유다 성당으로 가는 길. 저 먼 곳 작은 섬이 진섬이고 진섬에 오롯이 가롯 유다 성당만 있다. ⓒ 차노휘

 
의심만큼이나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만조 때 세 시간 동안의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은 강한 인내를 요구했다. 도상 거리 12km였지만 내가 걸은 거리는 22km였다. 걷는 동안은 어떤 잡념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메모를 하던 나는 더 이상 쓸 거리가 떨어졌다. 해가 없는 대낮 바람은 서늘했다.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담백한 풍경은 변화가 없었다. '만조는 사색의 시간이다'라는 애초의 마음이 흩어질 것 같아 내 자신을 다독였다.
  

12번 가롯 유다의 집(지혜의 집, 손민아 작품): 호락호락하지 않아 접근하기가 쉽지 않는 곳이다. 혼자서 깊은 생각을 하려는 사람들이 일부러 침낭을 가지고 와서 잠을 잔다고 한다. 순례를 마쳤다는 종을 칠 수가 있다. 종탑이 틀어져 있다. 틀어진 마음이 아닌지,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되돌아보라는 작가의 의도이다. ⓒ 차노휘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점점 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의 힘.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무엇. 시간이 흐르면 절로 해결되는 일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만남과 헤어짐도 그리고 그 아픔을 잊는 것도… 결국은 순례자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초초해하며 불안해하는 마음을 '잘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해가 세 시 방향으로 지자 갯벌은 어둠에게 몸을 허락했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은 전등이 꺼졌지만 카페 턴테이블에서는 LP판 음악이 흥겹다. 서울 모 성당 성가대원 몇은 그들만의 성가를 부른다. 각자의 성당을 가슴에 들였을 순례자들. 나 또한 순례길 끝에 작은 성당(명상의 장소) 하나를 들인다.

자기를 극복하고 더 넓고 깊은 세계를 깨우쳐 갔던 사람. 현대 기독교 교리를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적‧영적 훈련으로 다져진 사람. 사도 바울의 성당. 그 성당은 어떤 형상으로 빛날까.
  

가롯 유다 성당에 있는 비틀어진 종탑. ⓒ 차노휘

#기점소악도 #섬티아고 #순례길 #12사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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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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