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대충 살자' 외치던 우리 엄마, 집 나오니 이해합니다

[새둥지 자취생 일기 ③] 자취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된 가사노동의 무게

등록 2020.10.26 14:37수정 2020.11.17 10:31
4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자취생활 ⓒ 정누리


"밥 해 먹지 말고 그냥 햇반 사."
"집에서 요리하면 냄새 배니까 그냥 사 먹고 와."
"세탁은 코인 빨래방 가서 해."



놀랍게도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엄마다.

"오늘 현미밥이랑 된장국 해 먹었어."
"그래도 집밥이 속 편하지."
"이불 커버랑 베개 커버까지 세탁하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이 말을 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나다.

배달 중독자, 극한의 미니멀리스트 우리 엄마 

어릴 적부터 엄마는 '합리'의 여왕이었다. 배달의 민족이 자리잡지 않은 10년 전에도 설거지가 필요 없는 피자와 치킨, 회, 초밥 등을 주로 시켜주었다. 소풍날이 되면 집에서 손수 만든 유부초밥보다 식당에서 만든 게 더 깔끔하고 맛있다며 김밥을 새벽부터 사왔다.


엄마가 요리를 못 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가끔씩 엄마가 찌개를 해주는 날은 정말 세상에서 따라올 만한 음식이 없었다. 엄마 왈, "나 신혼 때는 요리 정말 많이 했어. 너희 아빠가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데." 그럼 지금은 왜 안 해주냐 물으니, "밖에서 먹는 게 더 싸고 편해. 집에서 요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아, 그냥 귀찮아서 그런 거구나.

여하튼 내가 싸간 도시락은 언제나 친구들에게 인기 만점이었고, (밖에서 음식을 사 온 거니까) 나도 불만 없이 먹었다. 하루는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소파랑 TV가 모두 온데간데 없길래 물어보니 청소 편하게 하려고 치웠단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빠도 없이 어떻게 그 큰 가구들을 다 옮긴 거지? 아빠도 집에 돌아와서 입을 쩍 벌렸다. 한동안 식구들 모두가 땅바닥에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집이 텅 비니 한마디를 해도 벽이 웅웅 울렸다. 극한의 미니멀리즘이었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 내 취향대로 살리라 마음먹었다. 매일 색다른 요리 메뉴를 고민하고, 직접 장도 보고, 퇴근 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재료도 미리 손질해 놓았다. 냉장고에 그득그득 찬 양파와 부추, 소분된 밥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매일 만든 요리를 사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 오늘은 부추계란찜", "오 잘하는데".

인테리어도 꽉꽉 채웠다. 밥 먹을 때 필요한 좌식 탁자, 귀여운 무드등, 적막함을 없애 줄 TV, 포근한 카펫, 싱그러움을 더해줄 화분들. 가득 찬 소품들이 내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내친 김에 협탁과 티비 테이블까지 DIY로 직접 조립했다. 베개 커버와 이불 커버는 물론 일주일마다 깨끗하게 세탁해준다. 내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재밌는 일인데, 엄마는 왜 귀찮아 하지? 난 그때까지 몰랐다.

돌아서면 일하고, 돌아서면 일하고... 자취 초반엔 몰랐다  

나의 요리 시간은 저녁 약속이 하나둘 잡히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한 끼를 밖에서 먹고 오니 채소들을 쓸 시간이 없었고, 며칠 지나고 나면 시들어 먹을 수 없었다. 또 회사 갔다가 와서 요리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 어느 날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밥을 다 먹고도 쉴 수 없었다. 설거지는 물론이요 카펫에 떨어진 머리카락 줍기, 탁자 치우고 청소기 돌리기, 가구 사이사이 틈새 먼지 털기 등 이 과제들을 다 끝내고 나면 기진맥진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엄마가 떠올랐다. 어머니, 당신은 이미 이 과정을 겪어본 거였군요. 그제야 난 살림의 고수에게 SOS를 신청했다. 엄마 왈, "아침은 전날 밤에 미리 준비해 놨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그래야 시간을 절약하지", "큰 빨래는 코인 빨래방 가서 하고 와. 드럼세탁기는 작아서 빨래도 잘 안 되고 고장 날 수 있어", "당장 쓰지 않는 것은 모두 수납해. 잡동사니가 많이 나와 있으면 방이 지저분해 보여".

엄마가 살아온 삶의 지혜가 느껴졌다. 사실 나는 엄마가 대충 사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한 마디 덧붙였다. "너 직접 해 먹는 거 좋아 보이더라. 알뜰하고 솜씨도 좋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 먹어, 그게 건강에도 좋으니까. 엄마도 응원할게." 나는 갑자기 가슴이 찡해졌다.
 

자취생활 ⓒ 정누리


엄마에겐 엄마의 속도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대충 사는 주부가 아니었다. 항상 내가 단추를 제대로 여몄는지, 치마 올이 나가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매일 아침 옷을 다림질해서 입혀주었고, 가다가 넘어지지는 않는지 창문 밖으로 내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두 시간 내내 나의 학교 생활 얘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놀다가 다칠까봐 가구를 모두 없앤 것이었고, 당신은 끼니를 대강 때우고 나랑 있을 때 고급 음식을 사준 것이었다. 혼자 살아보니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주부였다.

나는 조금씩 자취 생활에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요리 재료는 욕심내서 사지 말고, 외부 약속이 있을 것을 감안해서 조금만. 가구는 옮기기 쉽게 가벼운 것 위주로. 청소기는 시도 때도 없이 돌리려 하지 말고 횟수를 정해서 한 번에.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시소 위에서 휘청거리는 내 손을 잡아주는 것은 엄마다.
 
#자취 #자취생활 #혼자살기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