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피아골 단풍, 살짝 보여드릴게요

등록 2020.10.26 11:49수정 2020.10.2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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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지리산이 아름다운 것은 피아골 가을단풍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지리산 피아골을 처음으로 찾았다. 지난 여름 보름 동안 지리산 언저리를 돌아다닐 때, 피아골은 이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 일부러 남겨두었다. 피아골 아래에 있는 연곡사의 절밥이 맛있다고 아내를 꼬드겨서 오랜만에 부부가 함께 가을산행을 했다. 3박4일 일정의 지리산 여행이다.

둘이서 함께 산행 길에 나선 것은 오랜만이다. 더구나 야간 산행은 처음이었다. 아내는 나와는 라이프스타일이 다른 사람이어서, 이런 무모한(?) 산행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따라나서지도 않는다.

내가 몇 년 전 국토종단 도보여행을 할 때, 눈이 소복하게 쌓인 정월 초하룻날, 함양군 마천면 음정마을을 출발하여, 벽소령을 넘어, 화개 의신마을로 함께 내려온 적이 있긴 하다.

지난주 21일,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1시 50분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4시경에 지리산 성삼재에서 내렸다. 등산하는 손님은 예상 외로 적어서 10여 명에 불과했다. 첫째 날 코스는 성삼재-노고단-파아골삼거리-피아골-연곡사로 잡았다.

지리산은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 흔히 말한다. 효자든 불효자든 자식이면 모두 내 품안에 따뜻하게 품어 안는 어머니 같은 산 말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치열한 이데올로기 공방을 벌였던 빨치산과 토벌대를 모두 품안에 안은 것도 지리산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너무 컴컴해서 라이트를 켜고 걸었다. 대피소에서 초콜릿과 삶은 계란 등 간식거리로 대충 아침을 때우면서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40여년 만에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지리산에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했다.

의사인 그 친구는 등산이나 산책을 치료레크레이션의 하나로 연구하고 있다. 그는 병원에서 의사들이 흔히 하는 외과적/내과적 처방 외에도, 등산이나 산책도 환자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산에 널려있는 임도를 활용하여 환자치유프로그램을 만드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노고단에서 피아골삼거리로 가는 오솔길은 정말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가을 산길의 정취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피아골삼거리에서 피아골로 들어서서 8부 능선쯤 내려가자, 드디어 단풍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아골 단풍은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화이불치(華而不侈).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은 그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 단풍 ⓒ 고태규

 
피아골 중턱으로 내려가자 단풍은 절정이었다. 정비석은 <산정무한>에서 금강산 단풍은 계곡물에 녹아내릴 정도로 진하다고 했는데, 여기 피아골 단풍은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산 전체의 자연색과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피아골 단풍은 잎이 작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환상적인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옅은 노랑, 중간 노랑, 진한 노랑, 샛노란 단풍.
옅은 연두, 중간 연두, 진한 연두, 녹두에 가까운 연두색 단풍.
옅은 주황, 중간 주황, 진한 주황, 빨강에 가까운 주황 단풍.
옅은 빨강, 중간 빨강, 진한 빨강, 새빨간 단풍.

그리고 그 색깔을 알 수 없는 숲의 나무와 풀만큼 많은 단풍이 제각각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 단풍 ⓒ 고태규

 
피아골은 가을 햇살을 듬뿍 받아 빛의 축제도 함께 벌이고 있었다. 햇빛을 듬뿍 담아 반짝이는 현란한 단풍은 내 눈을 어지럽혔다. 레크리에이션 이론에서 말하는 어지러움을 이용한 놀이(Ilinx: 일링크스)가 테마파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아골에도 있었다. 현란한 단풍 색깔과 반짝이는 햇빛의 조화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과장이 좀 심한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 걸까?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서, 한 시간에 1킬로미터도 나아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도시에서는 맑은 햇살을 느끼기 어렵다. 햇빛도 온갖 공해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염된 공기를 투과하여 내려오는 햇빛이 맑을 리가 없다. 지리산 공기는 청청 그대로인 공기다. 그런 공기를 마시면서 내려오는 햇빛은 맑고 깨끗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맑은 공기와 햇빛을 하루 종일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한 일인가. 거기에 황홀한 단풍까지 마음껏 바라보고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이 아니면 어디가 청학동이란 말인가? 아, 애석하도다. 신라 때 최치원이나, 고려 때 이인로나, 조선 때 사대부들은 모두 엉뚱한 곳에서 이상향을 찾고 있었구나.

피아골대피소 아래로 내려가자 계곡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곳곳에 계곡물이 모이는 작은 연못이 있고, 주위의 오색찬란한 단풍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자기 색깔을 물 위에 비추고 있었다. 성질 급한 어떤 단풍잎들은 함박눈처럼 하늘하늘 휘날리면서 작은 연못에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 순간 피를 토하면서 하릴없이 떨어지는 선운사 동백꽃이 떠올랐다. 선운사 동백꽃은 땅에 떨어지고, 피아골 단풍은 물에 떨어진다. 그렇게 떨어져 이생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다음 생을 준비한다. 온갖 욕심으로 끝없이 더 채우려고만 하는 우리 인간이 배워야 할, 자연의 참된 가르침이다.
 

지리산 피아골 단풍 ⓒ 고태규

 
육이오동란 때, 바로 이 계곡에 갇혀 살았던 빨치산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피아골 단풍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산길을 걸으면서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피아골 계곡에서 수많은 좌우익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서 아까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아골은 이렇게 우리 현대사의 슬픈 아픔도 아름다운 단풍과 함께 간직하고 있는 그런 곳이다.

그때 피아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계곡에 피가 넘쳐흘렀다고 해서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말도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피는 '피'라는 한 식물을 말한다. 한자로는 '직(稷)'이라고 쓰는데, 그래서 피아골 아랫마을 이름이 '직전(稷田)마을'이다. '피가 많이 자라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피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식물이기도 하다.

어릴 때 가을만 되면,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논에 피를 뽑으러가곤 했다. 벼 사이에서 자라는 피는 뽑기가 만만치 않은 놈이다. 언젠가는 추석날 아침밥을 먹자마자, 어머니는 놀고 싶어 하는 우리를 반강제로 데리고 피를 뽑으러 간 적도 있다. 그러니 내가 피를 얼마나 싫어했겠는가. 어릴 때 마음껏 놀고 싶은데 농사일 돕느라 놀지 못한 사람들은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위에 떨어진 단풍잎은 어디로 흘러갈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이나 물가에 앉아 있었다. 아내와 친구가 아래에서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황홀한 피아골 단풍에 내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 이 따사로운 가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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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실크로드 여행을 좋아합니다. 앞으로 제가 다녀왔던 지역을 중심으로 여행기를 싣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성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국내 도보여행기도 함께 연재합니다. 현재 한림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관광레저학박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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