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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 정리만 하면 어때서, 밤식빵 그걸 왜 버리니?"

[그림책일기 39] 오소리 지음 '빨간 안경'을 읽고 부부 싸움을 종료하다

등록 2020.10.30 08:26수정 2020.10.3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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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왜 냉동실에 넣어. 다 먹어야지."
"식빵을 어떻게 다 먹어. 남는 건 냉동보관했다 먹는 거야."
"떡도 아니고 빵을 왜 냉동보관 해. 다 버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다 고춧가루가 쏟아졌다. 화가 난 남편이 씩씩 거리며 냉동실을 정리한다. 말린 표고버섯, 들깨가루, 고춧가루, 들기름, 참기름, 찰떡, 쑥절편, 크로와상 생지, 식빵, 밤식빵 등 먹을 거리가 한가득이다. 얼마 전 찾다 포기한 또띠아 한 장도 나온다. 

"버리지 마. 다 먹는 거야. 표고 버섯은 창원 어머님이 직접 말려서 주신 거고, 빵도 다 먹는 거야."

버리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집을 나갔다. 정리를 제대로 못 해서 얼음에 고춧가루가 묻게 한 건 미안하지만 정리하라고 하면 될 걸 보란 듯이 꺼내서 구시렁 거리며 정리하는 꼴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야외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돌아왔더니 상황이 종료됐다. 오기가 생겨 저녁 준비하면서 냉동실은 열지 않았다. 

아이를 재우고 다음 날 아침 때문에 국물 다시마와 멸치를 꺼내려고 냉동실을 열었더니 휑하다. 칸칸이 정리하고 수산물, 육류 네임스티커까지 붙여 놓았다. 

'호, 제법이네. 근데 내 빵은? 빵 어디 갔지?'

밤식빵을 비롯한 생지부터 빵이 안 보인다. 버렸냐고 물었더니 버렸단다. 이 밤식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별스타그램에 있는 식빵 맛집에서 기습적으로 판매 공지를 한 날, 정해진 판매 시간에 맞춰 광클릭을 해야 살 수 있는 무려 1만5000원 짜리 식빵이다. 냉동 상태로 배송온 걸 고이 모셔 보관해 둔 거였다. 2분 안에 매진되어 한 번 주문 실패를 겪고 두 번째에 성공해서 '겟한(얻은)' 건데 그걸 버렸다. 분명 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버렸다.

발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남편의 게임 캐릭터 인형, 전시도 안 하면서 이사할 때마다 안 버리는 그걸 가져와 던졌다. 이것들도 다 버릴 거라면서.

남편은 먹다 남은 건 그냥 버려야 된다고, 냉동실 들어가도 안 먹고 자리만 차지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전적이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빵은 아니지 않은가. 식빵 같은 경우 한 봉지 사면 다 못 먹으니 냉동 보관해 먹는 건데 그걸 뭐라고 한다. 

냉전이 시작됐다. 상대방이 아끼는 물건으로 주고 받고 했으니 누구도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일주일 넘게 필요한 말만 하고 지내는데 오히려 서로 부딪칠 일이 없다. 조금 편하기까지 하다. 나나 남편이나 서로 상대방 일에 간섭하지 않으니 집안 기류만 이상할 뿐 일상은 잘 돌아간다. 

그러던 중 아이가 잠자리 책으로 <빨간 안경>을 가지고 왔다. 안경 쓰고 보면 책 내용이 다르게 보이는 책이라 아이가 보고 또 보고 좋아하는 책이어서 자주 읽었는데 빵 사건 이후 보니 달라 보였다.
 

빨간 안경, 오소리(지은이) ⓒ 길벗어린이

 
어느 날, 파란 늑대는 이상한 꿈을 꿨어요. 그리고 세상은 그전과 완전히 다르게 보였어요. 잠에서 깬 파란 늑대는 하늘이 온통 빨갛고 어항에 물고기가 없는 걸 발견했어요. 식탁 위 음식은 사라지고 거울 속에 자신은 잿빛털 늑대였죠.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주황늑대 목소리가 들렸어요. 파란늑대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나갔는데 주황늑대가 없었어요. 파란늑대는 주황늑대에게 가보기로 하고 우산을 챙겨 길을 나섰어요.

"나 여기 있잖아. 그리고 우산은 왜 쓰는 거야?"

주황늑대가 말했지만 파란늑대는 그 목소리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빗줄기는 보이는데 빗소리도 없고 바닥은 온통 흙탕물인 길을 걸어서 주황늑대 집에 도착했어요. 주황늑대는 파란늑대가 장난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란 걸 알고 파란늑대를 안아주었어요. 파란늑대는 주황늑대가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응, 나야, 네가 나를 보지 못해도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림책 <빨간 안경>은 책 앞에 들어 있는 빨간 안경을 쓰고 책을 읽은 다음 안경을 벗고 다시 읽어야 한다. 빨간 안경을 쓰고 읽으면 파란늑대의 시선이고, 안경을 벗으면 주황늑대의 시선이다. 파란 늑대 꿈에서 복면을 쓴 늑대가 강제로 빨간 안경을 씌운다.

파란늑대는 현실에서 안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빨간 안경을 쓴 채로 세상을 본다. 주황 물고기 사라지고, 빗물 없이 비가 내리고, 우산에 구멍이 나며 주황늑대 목소리만 들리는 세상은 빨간 안경을 통해 본 파란늑대의 세상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자라 온 환경과 자신의 기질에  따라 같은 상황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어떤 이는 '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반 밖에 없네'라고 한다잖은가.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의 흔한 예로 쓰이는 이 얘기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 가치를 말하기보다 사람마다 다른 안경을 쓰고 있어서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본다는 게 중요하다.
  
결혼은 파란안경을 쓴 사람과 빨간안경을 쓴 사람의 만남이다. 세상을 온통 파랗게 보던 나는 파란색이 맞다고 우기고, 빨간안경을 쓴 상대방은 빨간 게 맞다고 우기는 게 결혼이다. 서로 다른 게 핵심인데 그걸 모르고 니가 맞네 내가 맞네 싸우기 바쁘다.

남편이 쓰고 있는 '빵은 냉동보관하면 안 된다'는 안경을 확 분질러 버리고 싶었는데, 아이랑 책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나 나나 자기만의 안경을 쓰고 있는 건데, 그냥 다른 건데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빵은 좀 아까웠지만). 

책 마지막에서 파란늑대가 잠자리에 들 때 빨간 안경이 옆에 놓여 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자각하지 못했던 빨간 안경을 벗어 놓은 것이다. 파란늑대가 안경을 벗을 수 있었던 것은 주황늑대의 포옹때문이라 생각한다.

30년 넘게 각자의 생활과 가치관으로 살아온 개인이 만나 가족을 이뤄 공동생활을 하는 부부는 서로의 안경을 벗겨내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옛 이야기에서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못 벗겼듯이 싸움은 안경을 벗길 수 없다. 

다음 날 남편 퇴근 전에 게임 캐릭터들을 현관문 앞에 정렬했다(이럴 줄 알고 새 쓰레기 봉투에 담았나보다. 실은 나도 버리긴 아까웠던 듯). 내 딴에 내민 화해의 손길인데 남편이 보지도 않고 지나친다. '쳇,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다시 한 번 삐쳤다.

다음 날 문자가 왔다. 

'OO택배입니다. 주문하신 택배가 오늘 2시~5시 사이 도착합니다.'

최근 주문한 게 없는 데 뭔가 싶으면서도 내가 뭘 또 주문했나 보다 하고 넘겼다. 외출 후 들어올 때 보니 문 앞에 아이스박스가 있다. 창원에 계신 어머님도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반찬이나 채소를 보내셨나 하고 가지고 들어와 열었더니... 밤식빵이다. 

서로 달라서 앞으로도 종종 다투겠지만, 주황늑대가 파란늑대를 안아주며 걱정말라고 난 늘 니 곁에 있다고 한 것처럼 파란늑대가 주황늑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내가 쓴 안경도 언젠가 벗을 수 있을 날이 오리라 희망한다.

빨간 안경

오소리 (지은이),
길벗어린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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