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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놀이, 문학기행, 역사 공부... 한 번에 할 수 있습니다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과 신숭겸 장군 목무덤 있는 곡성 태안사

등록 2020.11.01 11:16수정 2020.11.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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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삼층석탑. 절집 앞 연못의 한가운데에 석탑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단풍으로 유명한 산에는 행락객들로 북적인다. 가을여행도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아직 코로나19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단풍의 유혹을 견뎌낼 재간도 없다. 단풍이 아름다우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비교적 한적한 곳을 그려본다.

단풍 든 숲길에서 가을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문학기행까지 겸할 수 있는 태안사가 떠오른다. 태안사는 봉황이 먹는 오동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는 동리산(桐裏山) 자락에 있는 절집이다. 고려 초까지는 송광사와 선암사, 화엄사, 쌍계사를 거느릴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 지금은 화엄사 말사로 있다. 보성강변에서 가까운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자리하고 있다.


태안사는 절집으로 가는 숲길이 아름답다. 도로변에서 절집까지 계곡과 숲길이 나란히 이어진다. 길이가 2㎞ 남짓 된다. 길도 비교적 평탄하다. 흙과 자갈이 적당히 섞인 오솔길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네댓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폭도 넓다. 소나무와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떡갈나무 어우러진 숲길이 멋스럽다. 가을비라도 내리면 운치가 배가 된다.
  

태안사로 가는 숲길. 남녘에도 단풍이 들면서 숲길이 형형색색으로 물들고 있다. ⓒ 이돈삼

태안사로 가는 숲길에서 만나는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가을의 서정을 더욱 짙게 해준다. ⓒ 이돈삼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저항시인

절집으로 가는 숲길에서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을 만나는 것도 이맘때 태안사 여행의 매력이다. 조태일은 <국토서시>로 널리 알려진 민족시인이다. 사상과 자유의 암흑기에 저항시인으로 살았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조태일은 서슬이 퍼렇던 70년대에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던 문인들의 모임인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을 이끌었다. 80년대엔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상임이사를 지냈다.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 발간에 연루돼 고은 시인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펴낸 시집마다 판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조태일 시인의 '국토서시' 육필 원고.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에서 만난다. ⓒ 이돈삼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내부 풍경. 생전 조태일 교수의 집무실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 이돈삼


조태일은 1965년 첫 번째 시집 <아침선박>을 내면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70∼8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70년에 두 번째 시집 <식칼론>을 내고, 74년에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에 앞장섰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며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조태일은 75년에 세 번째 시집 <국토>를 냈다. 하지만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올가미에 씌워져 판매금지를 당했다. 연이어 '겨울공화국' 사건으로 투옥됐다. 평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도 판매 금지됐다. 83년에 펴낸 네 번째 시집 <가거도>도 판매금지를 당했다.

조태일 시인의 문학관이 태안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조태일은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태안사에서 보내고,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슬 퍼런 언어로 당시 반역의 정치와 사회현실에 온몸으로 맞선 저항시인으로 살았다. 1999년, 50대 후반에 세상을 등졌다.

조태일은 생전에 발행한 <시인>지를 통해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시인을 발굴하기도 했다. 89년부터선 광주대학교에서 후학도 양성했다.


태안사 숲길에서 만나는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에서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을 만난다. 그의 문학세계도 엿볼 수 있다. 단풍과 문학이 버무려져 가을의 서정을 더욱 짙게 해주는 곳이다.
  

곡성 태안사로 가는 숲길 풍경. 태안사로 가는 숲길에 가을이 내려앉고 있다. ⓒ 이돈삼

태안사 능파각 전경. 능파각은 태안사로 건너가는 누각 모양의 다리다. ⓒ 이돈삼


숲길을 지나서 만나는 태안사도 유서 깊은 절집이다. 태안사는 신라 말 중국유학파 스님이 전파한 선종 중심의 수행도량이다. 전국 9개 선방사찰 가운데 하나인 '구산선문'으로 불리며 1200년 동안 선방 수좌의 수행 터가 됐다.

하지만 태안사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부침을 겪었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엔 격전지가 되면서 전각이 불에 탔다. 나중에 또다시 지으면서 절집 특유의 고풍스러운 멋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귀한 문화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태안사를 대표하는 풍경이 능파각이다. 절집 입구 계곡에서 만나는 누각이다. 절집으로 가는 다리다. 신라 문성왕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도 살아남은 목조건축물이다. 모양이 아름답고, 계곡과 주변 숲과도 잘 어우러진다.
  

태안사 대웅전 풍경. 비교적 한적한 태안사는 코로나19를 피해 가을여행을 즐길 수 있는 절집이다. ⓒ 이돈삼

광자대사 탑과 탑비. 광자대사는 고려 때 당우를 지어 태안사를 큰 절로 만든 스님이다. ⓒ 이돈삼

 
태조 왕건을 도왔던 신숭겸과 태안사의 인연 

태안사 삼층석탑도 명물이다. 절집 마당에 있는 연못 가운데에 있다.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과 돌다리, 연못 그리고 절집이 한데 어우러져 멋스럽다.

광자대사의 숨결이 깃든 광자대사 탑과 부도비도 보물(제274, 275호)이다. 광자대사는 고려태조 때 당우를 지어 태안사를 큰 절로 만든 스님이다. 광자대사의 스승 혜철스님의 부도도 보물(제273호)로 지정돼 있다. 태안사의 바라(제956호)와 동종(제1349호)도 보물이다.

태안사는 고려의 충신 신숭겸 장군과도 엮인다. 신숭겸은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신이다. 태안사 뒤에 신숭겸의 목 무덤이 있다. 신숭겸이 타던 말이 물고 온 그의 머리를 태안사 승려들이 묻어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태안사에서 가까운 목사동면이 신숭겸의 태 자리다. 신숭겸의 생가와 사당 용산재가 지척에 있다. 신숭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산재 뒷산은 신숭겸이 무예 연습을 했다는 곳이다. 화장산에는 신숭겸이 갑옷을 숨겨뒀다는 철갑바위가 있다. 말을 매어놓았다는 계마석과 어린 신숭겸이 목욕하며 놀았다는 용소도 있다.
  

신숭겸 장군 동상. 태안사에서 가까운 용산재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태안사 #조태일 #신숭겸 #곡성태안사 #곡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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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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