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환자들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된 '종편'

[병원 일기] 입원 환자들의 일상 엿보기

등록 2020.11.04 09:16수정 2020.11.0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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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큰 병원인데도 1~2인실 외에는 병실이 만실이다. 의사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방을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입구에 걸린 표식을 통해 환자의 성별과 나이 정도는 알 수 있다. 병기된 병과와 담당 의사의 이름을 보면,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는지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환자 중 내가 막내뻘이다. 한방 병원의 특성인지 몰라도, 오십견이나 요통 등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휠체어나 보행기 등에 의존해야만 방을 나올 수 있는 분들도 적지 않아, 언뜻 요양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분들도 있다. 다리에 깁스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허리나 목에 보호대를 찼다면 십중팔구 교통사고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경우다. 개중에는 꾀병 같아 보이는 분들도 있지만, 혼자 식사하는 것조차 힘들어할 만큼 심각한 경우도 여럿이다.

코로나로 면회가 일절 금지된 상황이라 돌볼 가족의 출입도 마땅찮다. 그러잖아도 바쁜 간호사의 하루가 코로나로 더욱 바빠진 셈이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치료를 받을 때를 제외하곤 종일 병실에 머무른다. 병실은 만실이지만, 복도는 늘 한산한 이유다.
 

어차피 집에서도 TV를 보지 않는 난 병실보다 휴게실이나 복도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다. ⓒ Pixabay

 
그분들의 일상을 슬쩍 엿보았다. 불쑥 병실에 들어갈 순 없어도, 취침 시간을 빼고는 늘 문이 열려있어 뭘 하며 소일하고 계신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낮에 졸음을 쫓기 위해 복도를 병실 삼다 보니 몇몇 분들과 안면을 트게 됐고, 이런저런 속사정을 털어놓으시곤 한다.

병원에서 어르신들의 하루는 단순하다 못해 획일적이다. TV를 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TV를 끄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부러 이유를 여쭤보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TV를 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단 한 분의 예외도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좋아하는 유튜브를 찾아본다는 분도 더러 계셨지만, 귀에 이어폰 꽂기가 귀찮아 그냥 TV를 본다고 하셨다. 다인실의 경우, 종일 TV가 켜져 있다고 보면 된다. 대개 병실 내에서 아침에 처음 리모컨을 들었거나, 연장자, 장기 입원자 등이 '채널 결정권'을 갖는다.

만약 채널을 돌리고자 한다면, 최대한 예의를 갖춰 모든 분들의 사전 양해를 구해야 한다. 대부분은 기꺼이 리모컨을 건네지만, 채널에 대한 집착이 유별난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어림없다. 듣자니까, 얼마 전 이런 문제로 갈등을 빚어 병실을 옮기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병실에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네 사람 중 TV를 즐겨보는 분은 둘뿐이고, 그나마 연배도 비슷한 데다 죽이 맞아 친구처럼 지내신다. 한 분은 꿋꿋한 스마트폰 애용자이시다. 어차피 집에서도 TV를 보지 않는 난 병실보다 휴게실이나 복도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다.

당황스러운 건, 대부분의 병실 TV가 종일 비슷한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100개가 넘는 채널 중 YTN 등 뉴스 전문 방송 한둘을 제외하곤 모두 종편이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대화가 오가는 시사 토크쇼 아니면, 트로트 위주의 예능 프로그램이 전부였다.

주제도, 내용도 비슷한데, 채널을 돌려가면서 반복 시청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채널의 번호 순서대로, 채널A에서 MBN으로, 다시 TV조선으로 웹서핑하듯 채널을 돌렸다. 옆 방의 한 어르신은 JTBC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라 안 보게 된다고 귀띔했다.

입원 환자의 대부분이 노년층인 병원은 종편의 말 그대로 독무대였다. 낮은 물론이고, 프라임 타임인 저녁 8~9시에도 뉴스를 보기 위해 굳이 지상파 방송으로 채널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 종편이 익숙해졌고, 그대로 채널은 고정됐다.

리모컨의 번호를 굳이 찾아 누를 필요도 없다. 종편의 채널 번호가 나란해 선택 버튼만 올렸다 내렸다 하면 된다. 참고로 이 지역은, 16번부터 19번까지가 종편이다. 지상파는 10번 주변이고, 뉴스 전문 방송은 23~24번이라, 일일이 찾아보기 번거로운 면이 있다.

한 어르신은 같은 내용이라도 지상파 방송의 뉴스는 밋밋하고, 종편 뉴스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뉴스가 일일 연속극만큼이나 재미있다는 것이다. 종편은 적어도 어르신들에게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제공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듯하다.

휴게실 TV도 종편에 채널이 고정되어 있다. 몇몇 분들이 굳이 휴게실에서 TV를 보는 이유는 병실 내 '채널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섣불리 채널을 돌릴 수가 없어서 '무주공산' 휴게실로 밀려난 셈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병원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병실과 휴게실 내에서는 물론, 복도를 오갈 때에도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늘 마스크 차림이어선지 환자들 사이에 대화가 거의 없다. 회진 때 담당 의사와 이야기 나누는 게 하루 대화의 전부일 때도 있다.

쥐 죽은 듯한 적막강산에 사람 목소리라곤 엘리베이터 층수와 여닫이를 일러주는 기계음을 제외하면 TV에서 나오는 목소리뿐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환자들은 종편을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한다. 하물며 스마트폰 사용이 서툰 어르신들에게 종편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다.

병원에서 병실마다 벽에 TV를 걸어둔 건 환자들의 복지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낸다는 건 차라리 고문일 테다. 다만, 병원이 환자들의 복지를 고작 종편 하나로 퉁치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무조건 종편에 책임을 물을 순 없다. 그렇다고 애꿎은 병실 내 TV를 탓할 수도 없다. 누가 TV를 켜서 종편을 보라고 강요했을 리 없다. 환자들이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으니 TV를 켠 것이고, 채널을 돌리다 재미있으니 종편에서 멈춘 것이다.

내가 입원을 결정한 건, 제공되는 환자식과 병실에 머무는 시간조차 치료 과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환자 유의 사항에 맨 앞에 적시된 게 외부 음식의 반입을 삼가고, 담당 의사의 허가 없이 외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입원 환자에겐 24시간이 치료 과정이라는 뜻이다.

병원이 진정 환자들의 이른 쾌유를 바라고 복지를 배려한다면, 층마다 운동실을 갖추고 실외 정원을 꾸미듯 병실 내 TV도 치료를 위해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종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종편을 보며 '킬링 타임(Killing Time)'하는 게 치료에 무슨 도움이 될까.

병원이 의지만 있다면, 환자들을 위한 유용한 영상 콘텐츠를 얼마든지 제작해 상영할 수 있으리라 본다. 치료법과 예방법 같은 건강 상식도 좋고, 하다못해 병원에 소속된 의사와 간호사의 면면을 소개해주는 꼭지도 좋다. 환자와의 관계 형성에 나름 도움이 될 것이다.

종편은 늘 뒤끝이 좋지 않다. 시사 토크쇼든 뉴스든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어르신들은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씩 하신다. 가만히 들어보면, 대개 진행자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내용이다. 그런 날 선 반응이 그러잖아도 몸이 편찮은 어르신들에게 좋을 리 없다.

TV 리모컨을 끄는 순간 병실의 불도 꺼진다. 종편과 함께 하루가 저물었다. 내일 아침, 여느 때처럼 TV가 켜지고 종편과 함께 하루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종편 #병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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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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