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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외교관의 1878년 부산 방문기 최초 공개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굳게 닫힌 조선의 빗장 너머 떨어진 편지 한 통

등록 2020.11.06 08:32수정 2020.11.0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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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조선의 정변을 꿈꿨으나 증발해버린 이동인 스님]


안녕하세요. 조지포크예요.

정체 불명의 승려 이동인이 왜, 어떻게 동경의 영국 외교관 사토우(Satow)를 찾아갔는가? 우리는 계속 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것은 이동인의 의문사와 함께 가장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헌데 이 문제는 전혀 탐구되지 않은 것같군요. 우리는 사토우의 일기(5월 15 일자)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1878년 조선에 가지고 갔던 서한의 사본을 그가 본 적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내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He had seen a copy of the letter of which I was bearer in 1878, and learnt my name from it. This was the reason he had come to seek me out."

이것이 아직까지 드러난 유일한 실마리입니다. 때문에 이것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풀리면, 이동인이 일본 밀항의 모험을 감행했을 때 그가 흉중에 무슨 뜻을 감추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새로운 시각으로 그의 정체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문제는 어쩌면 그의 의문사와도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퍼즐을 기어코 풀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제 같이 탐사 여행에 나서봅시다.

이번에는 1878년 사토우 방한 행적을 조사해 보도록 합니다. 다행히 그는 자세한 기록을 남겼으므로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같군요. 

사토우는 1878년 11월 18일 나가사키에서 '에게리아(Egeria) 호'에 올라 제주도를 향해 출항합니다. 함장은 더글라스(Archibald Douglas, 1842-1913) 해군 장교였고, 승선자는 사토우(주일 공사관 서기관) 외에 나가사키 영국 영사관 직원 폴(Paul), 중국인 류스안(劉世安) 그리고 한국어 통역관 다케다 및 몇 명의 하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중국인 류스안은 주일 영국 공사 'Parkes'의 참모로서 공식 직함은 서중막우(署中幕友)라는 어려운 명칭입니다.

한국어 통역으로 차출된 다케다는 나가사키 영국 영사관 소속인데 조선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조선 왕래를 자주한 그야말로 조선통입니다. 이번 사토우의 방한 목적은 영국 공사의 감사 편지를 제주도 지방 수령에게 전달하고 부산에 들러 동래 부사를 만나 그 취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헌데, 웬 감사 서한?


그 해 9월 그러니까 두 달 전에 영국 상선 바바라 테일러(Barbara Tylor) 호가 제주도 정의현 해역에서 난파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때 제주도 관민이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영국 측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사토우를 파견한 것이지요.

당시 조선은 서양국가들에 대해 문을 굳게 닫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토우의 미션은 쉬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인들의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을 때니까요. 사토우는 일종의 모험에 나선 것입니다.

단순히 감사 서한을 전달하는 것이 영국의 목적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걸 기회로 조선과 관계를 터보거나 최소한 그 가능성을 탐색해 보려는 숨은 동기가 작용했겠지요. 잘 풀리면 영국은 서양국가로서 최초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것이고 그만큼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을 겁니다. 

당시 우리 미국에서는 슈펠트 제독이 조선과 관계를 터보려고 암중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을 놓고 미국과 영국이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형국이었지요. 사토우로서는 그만큼 무거운 사명감을 느꼈겠지요. 

난파되었던 영국 상선에는 중국인들도 승선해 있었습니다. 중국 측에서도 그 일을 잘 알고 있었고 조선에 감사히 여겼기 때문에 주일 중국 공사도 사토우 편에 감사 서한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영국 측은 중국 공사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에 가면 일이 수월해질 거라고 예상했겠지요.

아울러 영국 측은 사토우의 방한을 위해 일본 외무성과도 긴밀히 협력하였습니다. 일본 당국도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렇듯 사토우의 모험 뒤에는 영국, 중국, 일본 등 삼국 공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감사 서한을 전달하라는 미션

사토우 일생은 11월 20일 아침 6시 반 장엄한 일출을 보면서 제주도에 접근하였습니다. 닻을 내리고 상륙한 그들은 조선인들과 접촉과 교섭을 시도하였습니다. 그 경위를 사토우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제주도 관민을 대상으로 5일 동안 온갖 노력과 수를 써 보았으나 사토우는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제주도 관리들이 서한 접수는 국법이 엄금하는 일이라며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설득, 회유, 압력, 간청 등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조선의 빗장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사토우의 유일한 소득이었지요. 
 

부산 오륙도. ⓒ Pixabay

 
11월 24일 오후 빈 손으로 제주도를 떠난 사토우 일행은 다음날 12시 반경 부산 앞바다에서 오륙도를 보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오륙도를 그들은 영어로 "Five or Six Islands"라 불렀군요. 사토우 일행을 태운 '에게리아호'는 오후 2시 반 경에 부산 앞바다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제 부산을 공략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기에서 동래부사를 만나, 제주에서 전달하지 못한 서한의 사본을 전달하면서 감사의 뜻을 전하게 된다면 대 성공을 거두는 것이지요. 그런 열망을 품은 채 사토우는 일행과 함께 뭍에 올랐습니다.

멀리서 신기한 서양인의 모습을 포착한 아이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곧 이어 어른들이 떼로 몰려와 둘러쌌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입니다. 나 조지 포크가 1882년 여름 처음 부산 땅을 밟았을 때 보았던 광경이지요. 뒤집어 보면 부산의 한국인들은 가장 먼저 외국인을 접했던 사람들이었지요.

맨 먼저 놀라움과 호기심의 눈으로 밀려오는 서양의 물결을 바라보았던 조선인들도 그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밝은 눈을 뜨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동인 스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오직 사토우의 행적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무슨 외계인가 하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 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에 사토우가 한참 몰입되어 있을 때에, 어라! 일본인 하나가 늙수구레한 조선인을 데리고 사토우 앞에 나타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일본인은 다케다의 지인이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남겨 놓고 곧 떠났습니다. 그 조선인은 일본어를 약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그가 사토우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는 사토우에게 '벤사쑤관Bensatsukuwañ'을 방문하는 게 좋겠다면서 '벤사쑤관'은 외국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관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기가 벤사쑤관 사무실로 안내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사토우는 해변에서 받은 응대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우호적이서 안내자를 따라 가기로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The reception on the beach was far more friendly than I had expected, and so I agreed to go).

해변을 반 마일쯤 걸어간 후 마을을 지나갔고 다시 들판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니 관공서 구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입에 커다란 2층 대문이 서 있었습니다. 사토우 일행은 대문 바깥의 대기실로 안내되었습니다. 인부 몇 명이 이 방 저 방에서 어수선하게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토우는 이건 아니다 싶어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5분 후쯤 경내로 안내되어 안 쪽의 출입문을 향해 이동하였습니다. 문에는 붉은 색과 검정색으로 칠한 남성과 여성상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門衙察辯" 이라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towards an inner gateway, marked with the masculine & feminine signs in red & black, & surmounted by a tablet 門衙察辯 Beñsatsugamoñ).

우리는 여기에서 잠깐 공부 좀 해 보아야겠습니다. 위에 표기된 "門衙察辯문아찰변"이라 함은 '辯察衙門변찰아문' 입니다. 틀리게 적은 게 아니고 당시엔 어순이 지금과 반대였습니다. 일본어로는 Beñsatsugamoñ벤사쑤가몬'이라 표기했군요.

'아문衙門'은 부서 혹은 관청의 뜻이니 '변찰아문'은 '변찰청'이라 하겠습니다. 변찰청의 장이 바로 변찰관입니다. 이를 일본어로 '벤사쑤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변찰관'으로 부르겠습니다. 당시 부산의 변찰관은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대외 업무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토우는 지금 제 경로에 들어선 것이지요.

사토우는 변찰관의 집무실이 있을 본관이 아니라 본관 옆의 응접실로 안내되었습니다. 실내로 들어가 보니 벽이며 문이며 천정이며 마루며 온통 종이로 발라져 있었습니다. 붉은 담요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네 명의 조선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맞은 편의 조악한 서양제 깔개 위에 앉았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이름이 김신장金愼章, 직명은 '두모관변정감관毛頭關邊情監官'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두모포 변경 일대의 정세를 감독하는 관리'가 되겠습니다. 다른 한 명은 이름이 서준일徐俊一로 좌병장左兵房이라는 직명을 가진 무관이었습니다. 

한영 양측은 서로 성명을 교환하였습니다. 긴 인사 의례가 끝나자 조선인들은 변찰관이 직접 올 수 없어서 대신 자기들을 보냈다면서 당신들의 용무가 뭐냐고 묻는 거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토우는 지난 9월 20일 영국 배가 제주도에서 조난당했던 일이며 그 때 현지 주민들이 승무원과 화물을 어떻게 구조해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난파선 선장이 배를 가지러 나가사키로 떠나고 없는 기간중에 제주 사람들이 승무원을 먹이고 재웠던 일, 선장이 제주도로  돌아와 선원들을 데려갈 때에도 조선인들이 나서서 짐을 배 위에 실어 주었는데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던 일을 자상하게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주일 영국 공사가 섬 사람들의 인정어린 행동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자기를 특별히 파견하여 제주 관민에게 감사를 전하라고 했으며 더 나아가 그 뜻을 동래 부사를 만나 설명하라고 지시하였다고 전했습니다. 

감사 서한을 두고 긴 실랑이.... 그 결과

사토우의 설명을 듣고 난 조선인들은 변찰관에게 보고하겠다면서 떠났습니다. 그 때 그들은 사토우 일행이 건내준 명함 카드를 가지고 갔습니다. 좋은 소식을 초조히 기다리는 사토우에게 그들이 돌아와 물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편지를 접수하던가요?"라고. 사토우는 편지를 부산 사람들에게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이야기는 다케다가 말했을 겁니다, 암튼 사토우와 조선인들 사이에 긴 대화가 이어집니다. 직접 육성을 들어보겠습니다.

사토우 : "아니요."
조선인 : "제주 사람들이 접수할 수 없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토우 : "그러나 제주는 벽지입니다. 그곳 관리들은 재량으로 행동할 수도 없습니  다. 그러나 부산은 중앙정부와 쉽게 소통할 수 있을 겁니다. 의향만 있다면 편지를 접수할 수 있지 않겠어요?" 
조선인 : "멀리서 이렇게 오신 데 대하여는 무척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산이나 제주나 국법은 똑같습니다.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감히 조정에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사토우 : "제주 사람들이 받지 않은 편지를 귀하에게 제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디 동래 부사에게 우리의 방문 취지를 전할 수 있도록 면담을 주선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인 : "제주의 수령이 귀하의 면담을 수락할 수 없다면 동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토우 : "제주는 서울에서 몹시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사람들이 뭘 잘 모릅니다. 이방인을 보고 놀라고 접촉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부산 사람들은 외국인에 익숙하여 두려워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의 메시지를 접수할 식견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조선인 : "우리가 외국인의 얼굴을 무서워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우리 나라의 국법에 따라 귀하와 공식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거지요."
사토우 : "멀리서 메시지를 가지고 온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일반적인 예양이 아닙니다. 당신들도 국법을 일반적인 예양의 위에 놓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조선인 : "우리들이 예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국법이기 때문입니다."
사토우 : "정, 동래부사가 안 된다면 변찰관을 만나 방문 목적을 설명할 수 없을까요?"
조선인 : "변찰관도 귀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조약을 맺은 국가에서 온 편지와 관리 외에는 만날 수 없습니다." 
사토우 : "중국 공사가 보낸 편지는 받을 수 있겠지요?"
조선인 : "중국 편지는 조선에 오는 중국 사절이 가져온 것만 접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번 조난당한 조선인이 영국인에게 구조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일본 외교부를 통해 조선에 인도되었습니다. 지금의 이 경우, 올바른 경로는 영국 공사의 감사를 일본 외교부를 통해 조선에 전달하는 것이겠습니다. 귀하가 노고와 피로를 무릎쓰고 먼 길을 오신 데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동래 부사나 변찰관이 귀하를 만나고 싶어도 국법이 허용하질 않습니다.(하략)"


사토우의 설득이 먹히지 않자 이제 중국인 류스안이 나서서 공방을 주고 받습니다. 류는 얼르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지만 조선인들은 요지부동이었고 논리가 정연하여 틈이 없었습니다. 

사토우는 마침내 포기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배로 돌아가 하룻밤을 보낸 뒤인 11월 26일 아침 9시에 더글라스 함장과 함께 상륙했습니다. 일본인 ''관리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관리관은 외무성에서 파견한 외교관으로 오늘날의 영사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관리관'은 나중에 영사로 개칭됩니다.

다케다의 안내로 관리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의 저택은 산성에 있었습니다. 멋진 항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마을이 작게 보였습니다. 관리관은 일본식의 큰 방에서 사토우 일행 맞았습니다. 사토우가 방문 목적을 설명하려 하자 관리관이 중단시키면서 그 이야기는 이미 다케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조선의 변찰관이 병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변찰관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면서 그는 전령을 변찰관에게 보내 작업을 해 보겠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외국인이 이렇게 멀리에서 왔으니 만나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변찰관에게 압력을 넣어보겠다는 겁니다. 

전령이 떠나자 사토우는 마을로 나가 조선인 학교를 둘러보고 돌아 왔습니다.  좀 있으니 전령이 돌아왔는데, 변찰관이 사토우를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한다는 거였습니다. 단지 변찰관은 사토우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방문해준 데 대해 감사하다는 뜻을 일본 관리관을 만나 전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이에  사토우는 편지 사본을 관리관에게 건네주면서 그걸 간직하고 있다가 변찰관에게 보여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전령이 말하길, 변찰관은 틀림없이 내일 관리관을 방문할 터인데 그때 그 장소에 사토우가 불현듯 나타나면 좋은 계책이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그 계략에 대하여, 관리관, 더글러스 함장 그리고 사토우가 모두 반대합니다. 그런 건 조선인들에 대한 품위없는 술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관리관은 대안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즉, 사토우의 조선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변찰관이 '에게리아호'를 방문하도록 주선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만나면 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설득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사토우 일행은 관리관의 지극한 성의에 감사를 표한 뒤 배로 돌아 왔습니다. 과연 변찰관이 배를 방문할까? 일말의 기대 속에서 새 날을 맞았습니다. 11. 27일 오후 1시경에 관리관이 배로 올라왔습니다. 아까전에 변찰관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같이 배를 방문하자고 애써 설득하면서, 그냥 사적으로라도 좋으니 가보자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변찰관은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더라는 겁니다. 그러자 관리관은 사토우가 가져온 편지 사본을 용케 건네 주었으며 이에 변찰관은 이 모든 사항을 조정에 보고하겠노라고 했다 합니다. 

변찰관은 국법때문에 사토우를 보지 못하여 유감이라고 깊이 한탄하면서 그 뜻을 전해달라고 하였고, 영국인에게 마음의 빚을 졌노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날 해가 떨어질 때쯤 사토우 일행은 부산항을 벗어나 귀로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사토우의 조선 탐험 여행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로부터 1년 반 후 사토우는 동경에서 신기한 일을 겪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전달하고자 했던 그 편지를 보았던 한 조선인이 동경으로 자신을 찾아 온 것입니다. 앞서 사토우의 일기에서 보았던 대로 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동인 스님은 사토우의 편지를 어떻게, 왜 입수했던 것일까요?

다음 편에서는 이동인의 행적을 조사하여 퍼즐을 맞춰볼까 합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 #이동인 #사토우 #부산 #변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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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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