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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강남 가면 잘하겠다"... 라이더에게 일어난 불행

[나는 배달노동자 ③-1] 8년차 라이더 이성진

등록 2020.11.05 08:04수정 2020.12.1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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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유니온 인터뷰 기획 '나는 배달노동자'는 인권재단사람 정기공모사업 '2020 인권프로젝트-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구술작가 2명이 10대~50대 라이더 5명을 인터뷰해 정리한 글을 정기적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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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인근에서 이동하는 배달 오토바이 ⓒ 연합뉴스

 
강남은 '배달산업의 심장'으로 불린다. 회사들이 밀집해있고, 배달수요가 많으며, 새로운 트렌드를 시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배달의민족, 부릉 같은 주요 배달대행플랫폼 기업들도 강남에서 사업을 시작해 전국으로 뻗어 나갔다.

8년 차 라이더 이성진(가명)은 4년 전 강남으로 왔다. 그는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프랜차이즈 업체의 직원으로 배달 일을 시작했다. 3년쯤 지나 '바로고'를 통해 본격적인 배달 대행에 뛰어들었다. 배달은 대개 수행한 건당 돈을 받는다. 더 많이 배달해야 더 많이 번다. 빨리 배달하기 좋은 조건의 콜을 잡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 경쟁을 라이더들은 '전투'라고 불렀다. 이성진은 전투에서 승리를 쌓는 쪽이었다. 그를 눈여겨본 한 라이더가 "너 강남 가면 잘하겠다"는 말을 던졌다. 그 말이 주문처럼 이성진을 움직였다.

띵동, 당시 강남에서 가장 큰 배달 대행 플랫폼에 들어갔다. 첫날은 진땀의 연속이었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내비게이션이 저를 못 찾는 거예요.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한강에 어디 쪽으로 와주세요, 했는데 한강이 좀 큰가요? (웃음) 찾는 데 한 시간 걸리더라고요."

낯선 공간에서는 전투의 베테랑도 헤맸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하나하나 새로 익혀야 했다. 널찍한 도로와 반듯한 구획의 신도시에서 움직일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저녁의 러시아워가 시작되면 생각을 멈추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사방이 꽉 막힌 도로에서는 오토바이도 속수무책이었다. 조바심은 사고로 이어질 게 뻔했다. 피로감도 늘었다.

오전부터 새벽까지, 배달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보통은 밤 12시 지나면 수요가 많이 줄거든요. 강남하고 관악 쪽은 많아요. 관악은 1인 가구가 많고, 강남은 야간에 일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 거 같아요. 아침에는, 해장거리를 찾으시거나, 밤에 일하고 퇴근하시는 분 중에 그때부터 술 드시는 분도 계시고. 직장인들은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많이 시켜요. 아기 엄마들 모임도 오전에 많이 있고요."

하루 12시간 이상 다양한 배달수요에 대응하는 라이더에게는 자연스레 도시 안의 '삶'이 보였다. 띵동에서 일한 지 2년쯤 되었을 때인 2019년 5월, 쿠팡이츠가 생겼다. 배달의민족과 요기요가 양분한 주문앱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쿠팡이츠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음식을 주문하는 소비자에게는 최소주문금액과 배달료 없이 30분 이내 '로켓배달'을 강조했다. 라이더에게는 특정 시간대에 시간당 2만 원 가량의 고정급을 지급했다.

"앱만 켜놓고 있으면 몇 건을 하든지 돈이 들어오는 거예요. 열심히 일해서 건당 배달 금액이 시급보다 많아지면 그 금액이 지급됐어요. 그런데 유입되는 라이더가 많아지자, 시급이 점점 내려가더라고요. 1만 8천 원, 1만 5천 원, 지방 같은 경우는 1만 3천 원까지. 그러다 5개월 만에 쿠팡이 갑자기 시급 지급을 중단했어요."

필요한 만큼 인원이 확보되자 플랫폼은 손바닥 뒤집듯 노동조건을 바꿨다.

"그런데 콜이 너무 없는 거예요. 그때 쿠팡 점유율이 1%가 안됐어요. 콜이 있어야 제 수입이 생기는 건데. 그래서 그만뒀어요. 배달 대행들은 다 한 번씩 거쳐 간 상태잖아요. '부릉'이나 '생각대로'는 안 해봤지만 '바로고'랑 비슷하고. 그럴 때 누가 배민라이더스라는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는 방식이 띵동이랑 비슷해, 같이 해보자'는 주위의 권유로 들어갔어요."

회사가 원하는 대로만 달리세요

'배달의민족' 앱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자회사를 설립해 '배민라이더스'라는 이름으로 2015년 8월부터 배달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회색 거리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민트색 헬멧을 쓴 이들이다. 2019년 여름부터는 '배민커넥트'가 추가됐다. (배민커넥트로 일하는 사람을 배민커넥터라고 부른다) 이성진은 커넥터로 들어갔다.

"라이더스는 들어가려면 규정이 있어요. 배달통을 달아야 한다. 배달통을 달려면 짐대를 달아야 된다. 제가 그때 그게 없었거든요. 우선 일반인으로 들어가 보자 해서 커넥터로 들어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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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 배달통은 어떻게 생겼나 ⓒ 이성진 본인 제공

 
배민라이더가 오토바이로만 일하는 것과 달리 배민커넥터는 자전거와 킥보드 같은 운송수단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아무리 배달 수요가 많은 곳이라도 주문은 특정한 시간대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플랫폼 기업은 그 특정한 시간대에만 쓸 노동력이 필요했다. "내가 원할 때 달리고 싶은 만큼만"이라는 유혹적인 문구로 배민커넥터를 모집한 이유다. 그러나 커넥터에게 특별히 노동시간 제한은 없었다. 이성진은 커넥터로 전업라이더처럼 일했다.

그런데 올해 1월, 우아한청년들이 갑자기 노동시간에 제한을 걸었다. 배민커넥터는 주 20시간, 라이더스는 주 60시간까지만 일할 수 있다고 통보한 것이다. 이성진처럼 '전업'으로 일하던 상당수의 커넥터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갑자기 실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커넥터가 라이더스로 전환이 아예 불가능했던 건 아니다. 문제는 마감 시한을 3월 4일로 공지해놓고 2월 24일부터 라이더스 모집을 갑자기 막아버린 것이었다.

이성진은 2월 20일에 입직 신청을 하고 면접일까지 통보받았다. 그런데 24일 오전, 코로나19 확산으로 지원자의 안전을 위해 면접을 중지한다는 내용의 간략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게 전부였다. 언제 다시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여름이 되었다.

6월 3일부터 시간제한이 적용되자 이성진은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장의 생계를 어떻게 이을지도 깜깜했지만, 그를 쓰러트린 것은 갑질이 준 모욕감이었다. 회사에 목소리를 전할 통로는 굳게 닫힌 채였다. 탓할 곳이 없자 원망은 자책으로 변했다.

'모든 게 내 탓이다. 이 일을 택한 내 탓이다.'

커넥터를 모집하던 배민의 광고문구에는 '부업'도 '시간제한'이라는 표현도 없었다. 이성진의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했다.

'약속을 어긴 쪽이 잘못이다.'

안타깝게도, 약속을 어기는 쪽은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실수가 아니라 상대를 무시할 때 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배민은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의 줄기찬 문제 제기가 있은 끝에야, 7월 14일, 커넥터들도 배민라이더스로 입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한동안 타들어 간 이성진의 마음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했다.

(*이성진씨 이야기 2편으로 이어집니다) 
[다음 기사] "늘 버스에 치이는 꿈을 꿔요"
#배달 #라이더 #라이더유니온 #배민라이더스 #플랫폼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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