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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팬들이 만들어낸 한글날 최신 전통, 알고 있었나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글 가르치며 알게 되는 우리 언어의 매력

등록 2020.11.08 11:16수정 2020.11.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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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스위스 제네바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방탄소년단 팬들인 아미들과 만났다. 만나자마자 새 앨범 이야기, 방탄소년단 멤버들 관련한 사소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비행기를 따라 타는 무례한 사생팬들을 욕하고 나니 여기에서도 우리는 다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십대 팬들도 멤버들의 개인 사생활은 철저히 존중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들이 연애를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아마 그들 중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있겠죠. 하지만 그걸 팬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알게 된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스위스 아기 돌잔치상에 올라간 오스카(?) 트로피

얼마 후 방탄소년단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네바에서도 개봉되었다. 제네바의 아미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자막으로 표현되지 않는 세세한 부분에서 웃을 때마다 주변 외랑둥이(방탄소년단 해외팬을 지칭하는 말)들이 부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이웃집 아기의 돌잔치에 가져간 돌잡이 상 이웃집 아기의 돌잔치에 가려고 준비하던 중, 봉준호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휩쓸었다는 뉴스를 보고, 아이 태권도 참가상 트로피로 오스카 트로피를 급조해봤다. 재미있는 전통이라고 다들 즐거워했다. ⓒ 김나희

 
이런 상상을 해본다. 방탄소년단 팬들인 아미 사이에서는 한국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것이 가능할까? 서브컬처에서 영어 아닌 어떤 언어가 공용어가 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전세계의 오타쿠(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팬들) 세계에서는 일본어가 사실상 공용어이다.

모든 오타쿠들이 일어를 최소한 약간은 구사하기 때문에 그들끼리 대화할 때는 일어를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깊은 수준의 팬일수록 일본어는 배우지 않으려야 배우지 않을 수 없다. 번역본의 양과 질은 한계가 있고, 나오자마자 빨리 보고 싶은 팬심 때문에 절로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전문 성우가 정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전달하고 익히기 쉬운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는 (언어 교재로서의) 장점이 있다(반면, 가사는 압축적이거나 시적이고, 드라마 배우들의 발성은 종종 한국인조차 알아듣기 힘들어서 언어 교재로 쓰기 어렵다).

전 세계의 케이팝, 케이팝드라마 팬의 공용어가 한국어가 되는 일이 가능할까? 아직은 가능성이 낮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 문화의 힘과 비례해 경제력도 커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 수요가 늘고 있기도 하다.


올해 인도에서는 제2외국어에서 중국어를 삭제하고 한국어를 추가했다. 인도 인구가 14억인데 제2외국어에 한국어가 들어가면, 추가로 배우는 학생이 몇백만은 될 것이고, 그럼 한국어 교사 수요가 최소한 몇천 명은 늘지 않을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다 

제네바에는 평생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제네바시민대학(UPGCE)라는 곳도 그중 하나인데, 저렴한 가격으로 언어나 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이곳에서 한국어 강의가 인기라서 학생들이 계속 늘어나는데 가르칠 교사를 추가로 구하지 못해,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네! 나 역시 제네바시민대학의 프랑스어 수업을 신청해서 학생 겸 교사가 되었다. 나는 초급 프랑스어를 배우고, 학생들은 초급 한국어를 배운다. 내 프랑스어 실력과 내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비슷한 속도로 향상될까?

수강 인원 스무 명이 꽉 찼다. 듣던 대로 한국어 학생들은 열의가 넘치는 현지인들이었다. 아미들도 많았다. 기차로 거의 두 시간 걸리는 뇌샤텔 지역에서 배우러 오는 학생도 있었고, 프랑스에서 국경을 넘어 배우러 오는 학생도 있었다. 한 시간 반 수업을 들으러 왕복 네 시간을 쓰는 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시간 최선을 다해 가르쳐야겠구나.

한국어를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놀라운 일이다. 진학, 취업이나 승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 단지 본인이 원해서 배우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대학의 프랑스어 강의, 영어 강의, 한국어 강의의 학생들 특성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난다. 영어 강의는 직업 선택의 기회를 넓히기 위한 제네바 현지인들이 많이 듣는다.

프랑스어 강의는 제3세계에서 온 이민자들, 난민들 출신이 많이 듣는다. 유색인종이 대부분이고 사회경제적 수준이 낮으며 제네바 정착을 위해 절박하게 프랑스어를 익혀야 하는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문맹인 경우도 있어 프랑스어를 알파벳부터 배우기도 한다(시민대학의 교사 연수에서 '학생이 자신의 모어를 포함해서 모든 언어에서 문맹일 가능성도 고려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한국어 강의의 학생들은 어떤 실질적인 목적이나 압박감 없이 단지 자기가 좋아서 들으러 오는 현지인들뿐이다. 진학, 취직, 승진 등과 무관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오는 편이다.

'국뽕'을 경계하고 싶었지만 하필(?) 첫 수업날이 한글날이었다. 자랑스러운 한글 창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한 학생이 질문한다. '한글날에 특별한 전통이 있나요?' 음.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데. 

한글 반포는 음력 9월로만 알려져 있어서, 정확한 반포 날짜는 알 수 없다. 음력 9월 상순의 어느 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 현재의 한글날이다. 또한 20세기에 생겨난 기념일이므로 딱히 민간 전승의 전통이랄 만한 것이 없다.

"한글날은 한글 창제의 날짜와 무관해서 딱히 오래된 전통이 없네요. 노동시간이 긴 한국에서 사람들은 한글날이 노는 날이라 좋아하죠. 하루의 휴일도 소중하거든요."

머리를 쥐어짜 몇 가지 전통이랄 만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한글날이 되면 잘못된 맞춤법, 잘못된 압존법, 외래어 남용 등을 지적하는 글이 쏟아지고, 그에 맞서 말글을 다르게 쓸 권리를 옹호하는 글도 쏟아집니다. 올바른 언어에 대한 혈투가 한글날의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 할 수 있고 앞으로도 쭉 갈 것 같네요. 그리고 매년 한글날에 각 기관에서 한글 무료 폰트를 배포하기도 하죠. 또한 몇 년 전부터 전세계 케이팝 팬들이 한글로 정성들여 적은 가사를 찍은 인증사진을 올립니다. 최신의 전통이라 할 수 있겠는데, 지속되면 전통으로 자리잡겠죠?"

이렇게 나도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 익숙하지만 사실은 몰랐던 것, 내가 몰랐다는 것조차 모르던 것에 대해 낯선 질문을 받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더 많이 배운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한국어를 바라보기

한국어 학생들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점에서 한국어의 재미를 찾아내어 즐거워한다. 예를 들면 '눈물'이란 단어를 보면 배꼽이 빠지게 웃는다. 'eye'+'water'라니, 이 단어 너무 웃긴단다. 그러고 보니 눈에서 수도꼭지가 열려 콸콸 쏟아지는 모습이 떠오르네. 다음 수업 때는 '롬곡'이란 말장난(거꾸로 보면 '눈물'과 모양이 같다)을 알려줘야지. 그야말로 '뒤집어지게' 웃겠지?
       

'눈물'의 뜻을 외국인이 들었을 때 이런 느낌일까 눈물이 '눈' '물'이 합쳐진 단어라고 하면 한국어 학생들은 깔깔 웃는다. 스폰지밥 눈에서 수도꼭지 튼 것처럼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 같다. ⓒ Nickelodeon

       
다른 외국어를 모르는 한국인에게 '한국어는 어떤 언어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모어가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한국어를 사랑하는 외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어는 좀 더 흥미롭다. 저 사람들이 왜 한국어를 사랑하는지 역시 알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상상도 못하던 지점들을 만나게 된다. 그 여정을 차차 풀어내보려 한다.
#제네바 #방탄소년단 #아미 #돌잡이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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