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씨 말랐다"던, 위령탑 앞에 서자 함성이 들렸다

윤석산 교수와 함께한 동학기행- 해월 최시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등록 2020.11.04 10:53수정 2020.11.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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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기행에 함께 한 사람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 이명옥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주관,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윤석산 교수와 함께 하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가 열렸다. 10월 31~11월 1일 이틀에 걸쳐 윤 교수와 홍천, 인제 고창의 동학유적지를 돌아보는 동학기행을 다녀왔다.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과 '동학역사문화선양회' , '서울동학 –최보따리인문포럼'은 '동학 사상'과 '동학혁명정신'을 계승 실천하기 위해 '동학유적지 3차에 걸친 동학역사기행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1차 기행은 지난 7월 강원 영월, 정선, 단양 일대, 2차는 10월의 마지막날과 11월 첫날 강원 고성, 홍천, 인제 일대를 돌아봤으며 11월 14일 3차로 포항, 검곡, 경주 해월 최시형 선생 탄생지, 예천 영해의 해월의 자취를 따라갈 예정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일제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강원도 일대인 홍천, 인제, 고성 등지에 머무는 동안 <동경대전>을 간행해 동학 사상의 주춧돌을 놓았다.

총괄단장 윤 교수의 생생한 현장 강의와 함께 한 동학유적지 몇 곳의 감동을 전한다.

최초 목판본 <동경대전> 간행터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산142- 1번지는 최초의 목판본 <동경대전> 간행터로 2016년 문화유적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1880년 5월 9일 해월 최시형은 강시원, 전시황 등과 강원도 인제군 갑둔리의 교도 김현수의 집에 간행소를 설치하고 경전 제작을 시작한다. 


경비는 정선, 인제, 청송 교도들이 조달해 동경대전 100여 권을 제작했으며 각처로 분포되었는데 동학 최고의 전문가 윤석산 교수가 경진본으로 추정되는 자료를 발견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을 뿐 공식적으로는 현재 발견된 것은 없다.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동경대전>은 1883년 충청도 목천 구내리 김은경의 집에서 발견된 계미본(癸未本)이다.
 

동경대전 간행터에 남은 고목 윤석산 교수가 고목 앞에 서 있다. ⓒ 이명옥

   
동경대전 간행터에는 문화유적 보존터임을 알리는 알림판과 고목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들도 한울님을 모신 그곳, 갑둔리 비밀의 정원

동경대전 간행터인 김현수의 집터는 현재 군부대 사격장에 편입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성황거리는 해월이 '저 새소리도 시천주 소리'라는 유명한 법설을 한 곳이라고 한다.
  

갑둔리 비밀의 정원 성황삼거리와 이명수의 집터 자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 이명옥

 
해월은 피신 중에서 강원도 여러 곳을 다니며 교세를 확장하고 설법을 했다고 전한다. 해월이 박해를 피해 강원도 인제군 갑둔리 김연호의 집에 머물다 이명수의 집으로 옮겨 지낼 때 "새소리도 한울님 소리"라는 유명한 설법이 탄생한다.
 
하루는 해월이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장한주와 김연국에게 이렇게 물었다.

"저 새들의 울음은 무슨 소리인가?"
두 사람은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해월은
"시천주(侍天主)의 소리이니라. 모든 사람과 생물이 숨을 쉬는 것도 모두 천지 우주의 기운에 근원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 <해월선생문집>
 
갑둔리 비밀의 정원에서 사람만이 아니라 천지만물 모든 생명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임을 밝힌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다'는 동학의 생명사상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피로 물든 홍천 풍암리 자작고개 동학혁명군위령탑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1번지에 1977년 지역주민들이 뜻을 모아 자작고개 일대를 정비하고 '동학혁명군위령탑'을 건립했다. 자작고개 일대는 서석면 일대는 '사람 씨가 말랐다'고 말할 정도로 치열한 저항과 진압이 벌어진 곳으로 1984년 11월 12일 하루에 800여 명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같은 날 제사를 모시는 집이 수십 가구에 이르렀다. 

전 투중 죽임을 당한 농민군의 피가 질펀해 그 곳을 걸어가면 핏물로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하여 자작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죽은 농민군 유해는 대부분 자작고개 일대에 집단 매장되었다는데, 아직 유해의 정확한 위치마저 파악이 이뤄지지 않은 실정이라고 한다.
 

자작고개 벽화 치열한 그날의 항전을 재현한 벽화 ⓒ 이명옥

 
현장을 재현한 벽화 앞에 서니 치열한 그날, 저항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역사는 왜 기록하고 기억되어야 하는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 역사의 연장선에서 현재의 역사를 삶 전체로 기록하여 미래의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은 결코 박제된 과거의 산물이거나 실패한 혁명이 아니다. 기득권의 편에서 서술되고 전달된 민중의 역사는 왜곡·폄훼,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른 시각으로 정명되지 못했다. 갑오동학농민혁명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 동학농민혁명군을 이끈 해월 최시형과 전봉준 장군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박용규 박사는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유생과 군인들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됐음에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 독립전쟁을 이끈 제 2차동학농민혁명 희생자들을 여기서 배제시킨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이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모든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있다는 동학의 생명사상을 가슴에 새기고 한울님을 모신 민중들은 불의한 일에 가장 먼저 일어서고 결코 불의에 무릎 꿇거나 꺾이는 법이 없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다 25년 후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했고 4.19외 광주민주화운동, 2017년 광화문 촛불까지 맥을 이어가며 민중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나 희망은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동학유적지를 돌아보고 시대를 반추하는 일은 현재의 역사를 바로 살아내기 위한 발걸음이다.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넘겨주고 싶은 이들은 과거 역사의 현장에 서보길 바란다.
 

자작고개 주차장 붉게 물든 단풍이 마치 희생당한 농민군의 핏빛을 연상시키는 듯 했다 ⓒ 이명옥

 
민중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고 싶거든, 홍천군 동창 마을 물걸리 기미만세운동 기념비 앞에 서볼 것을 권한다.
"민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싶거든
홍천군 물걸리에 와서 보아라
삼일운동때 민중이 어떤일을 알고 싶거든
홍천군의 동창마을 물걸리에 와서 물어보아라
물걸리는 내륙지방과 동해안의 물화를 교역하는
상인과 나그네가 묵어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그것은 물걸리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망해가던 모습이었다
번성하던 물걸리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하니...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노리는 바였다
1919년 4월 3일물걸리에서 울려퍼진 만세소리는
민족 청사에서 영원히 메아리 칠것이오,
열사들의 죽음은 날이 갈수록 형형하게 빛날것이다
그 함성이 그 죽음의 힘으로 이나라가 광복했기 때문이다"

-물걸리 기미만세운동 기념비 글 중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해월 최시형 선생 #동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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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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