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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까지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려"

[위장취업 1세대 윤조덕의 증언 ④] 노동자 안전과 보건의 개척자

등록 2020.11.23 09:12수정 2020.11.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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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 유진산 대표위원 명의로 격려사와 함께 투표소 참관인 유의사항을 안내하고 있다(1971년 4월 26일). 하단에 '표를 지키자'라는 문구와 오른쪽 상단에 '대외비'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 최육상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명의 선거무효선언(1971년 5월 1일) "4.27선거는 전면적 부정선거이며 그 결과는 무효이다. 우리는 국민의 이름으로 오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하는 박정희씨의 제7대 대통령 당선 공고를 인정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조직적이고, 극히 지능적인 그러나 노골적이고 초대규모적인 부정 선거였으며, 요컨대 전 국민을 강박, 매수, 기만함으로써 주권을 찬탈한 일대 정치 '쇼'였다. 이 세기적인 정치 '쇼'에는 파렴치하게도 언론기관이 공범자로서 가담하였다." ⓒ 윤조덕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명의 선거무효선언(1971년 5월 1일) “4.27선거는 전면적 부정선거이며, 그 결과는 무효이다. 우리는 국민의 이름으로 오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하는 박정희씨의 제7대 대통령 당선 공고를 인정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조직적이고, 극히 지능적인 그러나 노골적이고 초대규모적인 부정 선거였으며, 요컨대 전 국민을 강박, 매수, 기만함으로써 주권을 찬탈한 일대 정치 ‘쇼’였다. 이 세기적인 정치 ‘쇼’에는 파렴치하게도 언론기관이 공범자로서 가담하였다.” ⓒ 윤조덕

 
3편 "태극기부대 핵심 서경석, 당시엔 학생운동 개척자였지"(http://omn.kr/1qcqo)에서 이어집니다.

1969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던 윤조덕 원장(70)의 20대 삶은 박정희의 유신 시기와 묘하게 엇갈리듯 이어졌다. 

윤 원장은 대학 입학 후 바로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했고, 유신 시작 직후 군대를 갔고, 유신의 한복판에서 위장 취업을 했다. 위장 취업을 그만두자 곧바로 1979년 10.26이 터졌다. 유신 때 감옥을 가거나 10.26 이후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뻔했던 상황을 모두 비켜간 셈이다. 그는 이에 대해 '불행'이라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불행이지. 그 시대에 감옥을 갔어야 했는데. 그게 후회가 돼.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그런 트라우마라고 할까. 정말 심했어. 잠을 자면 늘 쫓기는 꿈을 꿨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또 그렇고. 50대까지는 계속 그랬지. 차라리 그 때 감옥을 갔으면 편했을 텐데. 대개 감옥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그랬지.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에 주변 대부분은 감옥을 갔으니까.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어."

위장 취업 들통 후에도 일하며 대학원 공부 병행

윤 원장은 위장 취업 기간 대학원에 진학해 인간공학을 전공하며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산업재해 등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공부했다. 그는 "현장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대학원 3학기를 공부했다"며 노동과 공부를 병행했던 사연을 풀어냈다.
    

제41주년 학생의 날 기념문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회 1970년 11월 3일 발행 ⓒ 윤조덕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회가 1970년 11월 3일 발행한 제41주년 학생의 날 기념문 "학생운동에는 훈장도 없다. 오직 자기 희생만이 있을 뿐이다. 학생운동에는 권력도 없다. 오직 바쳐도 바쳐도 다할 수 없는 민족애 나아가서는 인류애의 이념이 있을 뿐이다." 서울대학교는 1975년 서울 관악캠퍼스에 자리 잡기 이전까지 단과대학별로 흩어져 있었다. 문리대와 법대는 서울 동숭동, 상대는 종암동, 공대는 공릉동, 농대는 수원시 등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윤조덕 원장은 "서울대 공대가 자리한 공릉동에서 1학년 학생들의 교양수업이 통합 운영되고 있었다"라며 "그래서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학생회'는 공대에서 이뤄졌다"라고 기억했다. ⓒ 윤조덕

    
"위장 취업이 들통 나서 대학원 시험 준비를 위해 한 달 휴직했다가 현장복귀를 했는데 그 당시는 12시간씩 1주일 주·야 맞교대 근무였어. 야간 근무 때는 오전에 퇴근 후 강의를 듣고, 주간 근무 때는 조퇴를 인정해 줘서 강의를 들었지. 쉽지 않았지만, 양쪽 모두에 몰두했지."

윤 원장의 서울대 대학원 석사 논문은 '프레스 안전사고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다. 프레스 기계 사고 90여 건을 컴퓨터로 분석한, 한국에서는 최초의 안전공학 관련 논문이었다. 서울대 박사과정도 인간공학을 택했다.


윤 원장은 독일로 유학을 갔을 때를 떠올리며 "현장에서 도망 나왔다는 죄의식이 가장 먼저 밀려왔다"고 무거운 표정이 됐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노동자 안전보건에 몰입하며 간접위안을 찾았다"고 고백한다.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독일 유학을 갔지. 독일교회재단에서 제3세계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장학생 제도가 있었어. 70~80년대 50명 정도가 제3세계 지원 프로그램으로 유학을 했지. 크리스찬아카데미라고 강원룡 목사님이 책임자이셨는데 고 조승혁 목사님과 현 대한적십자사 총재인 박경서 박사님이 나를 추천해 주셨어."

다행히 그도 추천을 받을 수 있었고, 독일 부퍼탈대학교에서 산업안전, 안전공학 박사학위(1993년)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그때만 해도 전 유럽을 통틀어 안전공학은 독일이 유일했다고 한다. 물론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06년 독일 교수 자격(Habilitation)까지 따냈다.

"서울대 석·박사 과정이 60학점이었어. 독일 가서 처음 3년간 90학점 강의를 들었어. 서울대에서 박사과정 논문만 남겨 놓은 상태였으니까 금방 하려니 했는데, 막상 부닥쳐보니 기존에 들었던 과목 중 겹치는 게 두 과목밖에 없었어. 1주일에 40시간씩 강의를 듣기도 했지."
 

서울대 법대에서 펴낸 ‘자유의 종 제9호’(1971년 3월 17일) ‘언론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당시 대학생들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알기로는 언론계에 투신하는 선배들이 대체로 입사 당시에는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능하고 기개 있는 젊은이들이었던 것 같다. 이 귀중한 인적 자원이 지금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 비열한 언론장사치-언론경영자의 철저한 통제, 감시 아래 객관적으로는 결국 오로지 그 장사치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 최육상

   
노동자 안전보건 초기 개척자 역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 원장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과 산업복지연구센터 소장, 국무총리 안전관리 자문위원회 위원, 국무총리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유족 및 관련자 분과위원회' 위원, 노사정위원회 산재보험제도 발전위원회 및 산업안전보건제도 발전위원회 공익위원 간사, 고용노동부 진폐제도개선협의회 위원장 등을 맡아 노동문제 해결에 몰입해 왔다.

특히 산업안전보건법, 산재보험법 등 노동자 중심의 각종 정책을 한국노동연구원의 동료들과 함께 개발·제안해 노동자 안전과 보건 분야, 재해노동자 보상, 재활 분야 정책개발의 산파역을 담당했다. 현재 (사)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과 한국사회정책학회 명예회장, (사)경기시민사회포럼 상임대표, (전)파주시민회 공동대표 등을 맡아 왕성한 사회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왜 서울공대 00과를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는가(1971년 10월 11일) 윤조덕 원장이 창립 멤버로 참여했던 ‘서울 공대 산업사회연구회’가 주관한 세미나 안내문 ⓒ 최육상

 
 

왜 서울공대 00과를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는가(1971년 10월 11일) 무사안일에 빠진 대학의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현실과 유리된 커리큘럼, 에로문화, 벙어리 언론, 불신풍조, 배금 및 입신출세주의 등 복합성적 토양에서 자라난 안일주의는 공대를 대표함을 특질로 하는 카드(Card), 기타(Guitar), 당구 3대 명물을 만들어 냈고 그 생산량은 굉장하다." ⓒ 최육상

 
윤 원장은 "학문은 노동운동의 연장"이라며 "위장 취업했을 때나 대학원에서 공부했을 때나 항상 그 시점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노동자 안전보건, 산재 노동자 보상 및 재활 분야의 개척자 역할을 한국노동연구원의 동료들과 함께 했다는 자긍심은 있어. 나도 위장 취업했을 때 현장에서 부상을 당해봤지. 노동 현장을 아니까, 현장에 뿌리를 두고 학문을 할 수 있었지. 이 분야 노동현장 문제에 대해 해법을 제안한 거지."

그는 '재활은 부활이다'고 단언한다. 다치고 나면 원직, 즉 원래 직장에 복직하는 경우가 40% 정도다. 타직으로 가는 경우가 20% 정도인데 그것도 임금이 30% 정도 삭감되고, 장애를 이유로 복귀를 못 하는 경우가 30% 이상이라고 한다. 그런 통계는 요즘에는 다 나와 있지만 당시 산업재해 노동자 재활을 집중 연구했던 건 윤 원장이 선구자 격이었다.

"인간공학은 독일에서 먼저 등장해서 정책 개발이 많이 됐을 때고 우리나라는 아직 시작도 안 했을 때 법에 반영을 한 거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1999년 12월에 개정이 되는데 그 때 '산재 노동자의 재활과 사회 복지'라는 문구가 제1조 목적에 추가 됐어. 그리고 2007년 재개정할 때에는 '산재노동자 직업재활급여'를 내가 강하게 주장해서 결국 법에 반영했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분야에 대해 기여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감사하지."

"다시 태어나도 노동운동의 길을 갈 것"

윤 원장은 다만 돈이 안 되는 학문이다 보니 산업안전정책과 안전공학, 인간공학 관련 연구를 하는 후학이 많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다시 태어나도 노동운동의 길을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간공학은 현장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한 거야. 1973년에 ILO(국제노동기구)에서 노동의 인간화를 선언했어. 독일에서는 이미 그 때 노동의 인간화를 위해서 대대적으로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정책을 개발하기 시작했지. 노동자들의 자유가 가장 큰 목표인 거지. 그 의미는 모든 사람을 자유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 인간의 자유,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어."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이른바 장기 위장 취업한 1세대인 윤조덕(70) 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 ⓒ 최육상

 
노동은 인간의 힘과 노력, 그리고 '인격'이 결부된 생산 요소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인간다워지기 위해 만인을 대상으로 투쟁해왔다. 윤 원장이 강조한 것처럼 노동의 인간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화를 꿈꾼다. 과거보다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현실 곳곳은 비루하고 부조리하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그의 죽음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했다.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 대한민국 노동역사를 재조명하고 전태일 열사가 남긴 유훈을 곱씹어보는 일이 필요한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자료 제공 : 윤조덕 원장의 대학 동기 노태천씨

참고자료
<청계, 내 청춘>(청계피복노조의 빛나는 기억)(청계피복노조사 편찬위원회 기획, 안재성 씀, 돌베개, 2007)
<시대의 횃불>(새문안 대학생회 민주화운동사)(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역사편찬위원회 엮음, 지식공작소, 2017)
<김진수>(시대의 횃불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2)
<산재보험50년사>(고용노동부, 2014)
<산재보험의 진화와 미래(상권)>(김상호 외, 21세기북스, 2014)
<윤후덕의 따뜻한 동행>(윤후덕, 동녘, 2011)
#윤조덕 #전태일 #김진수 #인간공학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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