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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역, 다른 선택... 중국 항일유적 답사서 느낀 점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4부 작가 및 시민 기자생활 (4)

등록 2020.11.27 11:40수정 2020.11.2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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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전적지인 지린성 부흥향 청산리 백운평 계곡 ⓒ 박도

  
나의 첫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는 재판까지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만 절판이 됐다. 그 무렵 나는 독자에게 사랑받고 기왕이면 잘 팔리는 책을 쓰고자 서점을 드나들며 베스트셀러를 살펴보았다.

그 시절, 가장 잘나가는 책은 을유문화사의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는 책이었다. 그 당시 30만 부가 나갔다 하여 그 책을 사서 꼼꼼히 읽었다.

그 책 저자는 영국인 필립 체스터필드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His Son)>를 번역한 책이었다. 그런데 읽어보니까 당시 한국 실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 며칠 뒤 교보문고 매장에서 한 출판인(노영근 씨)을 만났다. 그가 먼저 나에게 인사했다. 그는 그 몇 해 전 원고 보따리를 들고 찾아갔던 한 출판사의 사원이었다. 그새 그는 우리문학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운영하고 있었다.

"선생님, 바쁘지 않으시면 차 한잔하실까요?"
"그럽시다."

         

<아버지는 너희들 편이다> 표지 ⓒ 우리문학사



원고도 없이 출판계약을 하다

우리는 교보문고 내 찻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차담으로 한국 실정에 맞는 자녀교육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그 자리에서 대뜸 자기가 그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음 날 퇴근길에 응암동 그의 출판사에서 원고도 없이 출판 계약을 체결했다.

그날 밤부터 원고 집필에 들어가 석 달 만에 800여 매의 원고를 탈고한 뒤 출판사로 넘겼다. 출판사에서 본문 뒤에 발문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하기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인사를 나눈 바 있는 이오덕 선생님에게 부탁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거절치 않을 뿐 아니라 내 원고를 아주 꼼꼼히 읽고, 여러 부분을 쉬운 우리말로 일일이 퇴고해 주시면서 따로 쓴 발문도 건넸다. 주요 고친 낱말이다.

식탁→ 밥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이따금씩→ 이따금, 교육이란 미명으로→ 교육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입장→처지, 주방→부엌, 야채→채소. 남새, 획일적→ 판에 박은 듯이, 국민․민초→ 백성, 먹거리→ 먹을거리.…

선생이 일러주신 대로 원고를 고쳐 놓고 보니 글이 훨씬 깨끔해졌다. 나는 해방 후 세대로 우리말과 글을 50여 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서 별 다른 생각 없이 한자말이나 외래어, 일본말투, 서양 말법을 예사로 써 왔다. 특히 '그녀'에 대한 선생의 보탬 말씀을 듣고는 남녀 평등에 대한 높은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여자를 가리킬 때만 '그녀'라고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남자를 가리킬 때면 '그남'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남녀 없이 '그'로 쓰면 됩니다."

마무리 교정지를 출판사에 넘긴 며칠 뒤 우리문학사 편집장(편집인 권향미 씨)이 학교로 전화를 했다. 책 표지에 내 사진을 크게 넣고 싶으니 게재 허락과 사진을 보내달라는 청이었다. 나는 거듭 사양했으나 그는 그래야 책 판매와 홍보에 좋겠다고 거듭 간청했다.

며칠 고민한 뒤 그 청을 허락하고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기뻐할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분 다 내 곁을 떠나셨다.

1997년 9월 25일에 발간한 <아버지는 너희들 편이다>란 그 책은 손아귀에 들어가는 아주 아담하고 자그마한, 깜찍하게 만든 예쁜 책이었다. 우리문학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으로 주요 일간지에도 책 광고를 했다.

그런 탓인지 여러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많았다. 그때마다 각 방송국에 출연하여 책 홍보에 힘을 보탰다. 아무튼 책이 꽤 많이 팔렸다. 출판사에서 매쇄마다 저자에게 주는 증정본은 지난날 신세를 끼친 분에게 사례로 우송했다.

그러자 10여 전 학부모였던 이영기 변호사는 당신 모교 학생들에게 보낸다면서 한꺼번에 책을 300부나 사줬다. 그해 여름방학을 앞두고 그분은 학교로 전화를 했다. 전 서울 영등포지청장(현, 서울 남부지검장)으로 1979년 유신 말기 고종아우가 유신철폐 시국사범으로 영등포경찰서에 유치됐을 때 고맙게도 면회를 주선해 주셨던 분이다.

그날 전화 용건은 주말에 당신 서초동 사무실에 들러 달라고 한 것이었다. 약속한 날 사무실에 들르자 낯선 두 분을 소개했다. 한 분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 이항증 씨라고 한 바, 고성 이씨 족친(집안)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얼마 전에 중국에서 영구 귀국한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손자 김중생 씨라고 했다.

두 분은 모두 경북 안동 출신이었다. 이 변호사는 당신이 일체 비용을 후원할 테니 나에게 두 분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대륙 항일유적지를 둘러보라고 했다. 그런 뒤 젊은 세대들이 읽을 수 있는 쉽게 쓴 <항일유적답사기> 집필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모름지기 견문이 많아야 하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민족애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내가 그 뜻을 고맙게 받아들이자 그 자리에서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단이 꾸려졌다. 그날 처음 만난 김중생 선생은 1933년에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한때 조선의용군으로 6.25전쟁에 참전(인민군)했고, 동북 헤이룽장 성 자무쓰(佳木斯)사범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여 아성현중학교 역사교사로 살아온 항일운동에 해박한 분이었다.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에 앞서 동작동 국립묘지 임정 석주 이상룡 국무령 묘역에서 고유제를 지낸 뒤 기념 촬영 (왼쪽부터 김중생, 이항증 선생, 그리고 필자) ⓒ 박도

 
중국대륙 항일유적 답사 길에 오르다

그해 여름방학 중국 출발에 앞서 나는 안동 임청각을 둘러본 뒤 동작동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가서 선열에게 출국 고유 인사를 드렸다. 1999년 8월 1일 우리 항일유적답사단은 항공편으로 서울을 떠나 베이징으로 갔다. 거기서 원로 독립운동가로 이명준(당시 93세) 선생을 만나 젊은 날의 독립운동 얘기를 자세하고도 생생히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다시 항공편으로 상하이로 갔다. 그날 오전 상하이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 의사 유적지인 뤼순공원 일대를 둘러본 뒤 그날 오후에 중국 동북지방 지린성 창춘으로 날아갔다.

창춘 도착 이튿날인 1999년 8월 4일 이른 새벽,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하얼빈에서 동포 조선민족사업회 서명훈 회장의 안내를 받았다. 그분 안내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의거지 하얼빈 역 플랫폼을 답사했다. 그런 다음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에게 악명 높았던 옛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갔다.

지난날 독립군을 고문했던 당시 일본총영사관 지하실은 그새 화원여인숙으로 변모해 있었다(현재는 화원소학교). 그곳에 이어 서 회장은 거기서 가까운 옛 하얼빈 경찰서인 동북열사기념관으로 안내했다. 현재 기념관에는 열사 100여 분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서 회장은 거기에 모셔진 열사 가운데 허형식·양림·리추악·리홍광·박진우·차순덕 … 등 32분은 조선족 열사라고 말씀했다.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 박도

   
허형식(許亨植) 장군을 만나다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박 선생 고향 금오산 출신입니다"

동행한 이항증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허 열사는 구미 임은동 태생으로 바로 상모동 앞 동네이지요."
"네에?!"
 
나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임은동과 상모동은 같은 금오산 자락에 위치해, 한쪽에서 부르면 말을 듣고 대답할 만한 거리다. 사실 나는 충절의 고장이란 내 고향 '경북 구미'가 그즈음 친일고장으로 잘못 비친 데 대해 매우 가슴 아팠다. 

아무튼 1910년대 전후 일제강점기에 하구미 상모동, 임은동 이웃 마을에서 태어난 허형식, 박정희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이 아주 다름을 일깨워주는 말씀이었다. 구미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난 두 청년은 만주 땅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을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허형식 장군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으로 중국 현지 사학자는 동북 제일의 빨치산인 항일명장으로 손꼽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남의 나라에서조차 열사기념관에 모시는, 거기다 고향 어른이라는데, 그때까지 '허형식'이란 열사의 이름조차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반가웠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말씀한 금오산 정기를 타고난 '백마 타고 온 초인'의 인물을 먼 이역 땅에서 만나다니.

그날 밤 열차를 타고 창춘에서 옌지(연길)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만난 연변대 박창욱 교수 추천으로 연길서점에서 중국 조선민족 발자취 총서4 <결전>을 샀다. 그 책 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처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 늠름하고 잘난 인물에 그만 흠뻑 매료됐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 박도

 
답사단은 중국대륙 항일유적지를 12일간 누비고 돌아왔다. 그때 우리는 가는 곳마다 고국에서 준비해간 소주로 술을 올린 뒤 큰절을 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사진을 원 없이 찍었고, 지난 역사를 증언해주는 관계자들의 증언을 죄다 녹음해 왔다.

하지만 귀국 뒤 사진을 뽑은 다음, 현장을 되새면서 녹음테이프를 여러 번 들어도 독립운동사 전반에 대한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작가는 '아는 만큼 쓴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학창 시절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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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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