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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 번째 꿈… 마침내 시민기자가 되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67] 제4부 작가 및 시민 기자생활 (6)

등록 2020.12.02 10:13수정 2020.12.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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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공항(2005. 7.) ⓒ 박도


허형식 장군 후손을 만나고자 평양에 가다  

2005년 평양 남북작가대회 때 참석하여 안내인에게 6·25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건넨 뒤 허형식 장군 따님과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다음 날 그의 답변이었다.

"이보라요, 박 선생!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첫술에 배부르랴.'"
"알갓습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금세 알아차린 뒤 북에서 배운 말투로 대답했다. 후일 중국의 한 보따리 무역상이 보낸 메일로 평양에 사는 허형식 장군 자제들이 당신 어머니 사진이 보고 싶다고 나에게 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허 장군 친지들에게 수소문했으나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는 전언이었다. 총살당한 사회주의자 부인의 사진이 어찌 남았겠는가.

나는 제1차 중국대륙 항일유적지답사기에 제2차 답사기를 일부 보완한 뒤 우리문학사로 원고를 넘겼다. 출판사에서 저명한 교수의 추천사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여 마침 대학 시절 강의를 들은 바 있는 강만길 명예교수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구미 출신으로 왕산 허위 선생의 항일운동과 허형식 장군의 함자조차 몰랐다는 부끄러움을 말하자 강 교수는 그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에둘러 말하면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었다.

"학생들에게 '민족해방운동사'를 따로 편성해서 가르치지 않은 우리정부와 역사학자 탓이네."

그해 9월 25일 나의 항일유적지답사기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우리문학사에서 출간됐다. 이영기 변호사가 300권, 이항증 선생이 200권 구매해주었고, 친지들이 일부 구매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문학사 측에 따르면 시장 반응은 싸늘하며, 독립운동단체나 후손들이 도서 기증을 요구하여 아주 난처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얼마 뒤 한 독자가 학교로 찾아와서 책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나는 기분 좋게 사인을 해준 뒤 어떻게 책을 구입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기사를 보고 그날로 교보에서 산 뒤 밤새워 읽은 다음 학교로 찾아왔다고 했다. 저자로서는 가장 고마운 독자였다. 출판사로 문의하자 신간 발간 뒤 여러 신문사로 홍보용 도서를 보냈는데 오직 대한매일신문만이 기사로 다뤄줬단다. 그것도 고맙게 박스 기사라고 말했다.

그날 퇴근길에 이대 도서관에서 해당 기사를 찾아보니까 기사 맨 뒤에 '정운현 기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나는 어렵게 전화 연결을 한 뒤 정 기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 짧고도 까칠한 답변이 돌아왔다.

"책이 좋아서 기사로 나갔습니다."

<일본기행>
 

<일본 기행> ⓒ 새로운사람들

 

그 무렵 일본관광진흥회에 근무하던 이대부고 제자인 김자경 계장이 일본 기타도호쿠(북동북) 국제관광 테마지구 한국 매스컴 취재단에 합류하기를 제의했다. 귀국 뒤 책을 내는 조건이었다. 나는 그 직전 고교시절 윤기호 친구의 주선으로 한국방송대학 일본학과 학생들과 '일본문화 역사탐방'에 참석한 바 있기에 일본을 더 알 수 있는 기회로 여겨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하여 2003년 2월 6일부터 2월 12일까지 6박 7일 동안, 한국방송공사를 비롯한 국내 방송 취재팀과 함께 이들 지역을 눈길 따라 둘러보고 왔다. 그곳 기타도호쿠 지방인 아키타(秋田), 이와테(岩手), 아오모리(靑森) 세 개 현은 혼슈(本州)의 가장 북쪽 지방으로 비교적 여행객들의 발길이 드문 지역이라 일본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고, 온통 눈으로 덮인 설국의 정취를 볼 수 있었다.

일본을 둘러보는 기간 내내 두 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바로 보려고 애썼다. 그때 나의 기행 결론은 현재는 분명 일본이 앞섰지만, 머잖아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들보다 더 잘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게 역사의 순리일 것이다. 귀국 후 2004년 3월 <일본기행>이라는 책을 펴내 그의 제의에 보답했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하다
  

오마이뉴스 취재수첩과 기자의 손 ⓒ 오마이뉴스 심은식 시민기자

 
2000년 9월 25일에 펴낸 나의 항일유적답사기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그해 연말까지 초판 1,000 부도 나가지 않았다. 저자로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런 자탄과 함께 독립운동사와 독립지사들을 몰라주는 세태에 대한 반감과 오기가 솟아났다.

마침 이대 도서관에서 독립기념관 발간, 월간 <독립기념관>지를 보았다. 나는 허형식 장군을 찾아간 제2차 항일유적답사기 원고 30여 매를 그 기념관지에 기고했다. 그러자 2002년 7월호에 월간 <독립기념관>지에 '영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그 답사기가 실렸다.

마침 그즈음 장세윤 박사를 통해 <대한매일신문> 정운현 차장이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옮겨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독립기념관>지에 보낸 3부 중 한 부를 정 편집국장에게 보냈다. 그 며칠 뒤인 2002년 7월 8일, 3층의 한 젊은 후배 교사가 1층 내 자리로 왔다.

그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메인 톱에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 생가는 헐려"(2002. 7. 8)라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내가 쓴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인터넷이란 걸 잘 몰랐다. 그 당시 교사들 책상에는 학교에서 설치해준 컴퓨터가 한 대씩 놓여 있었지만 거의 사용치 않았다. 그는 내 컴퓨터를 켜더니 그 기사를 띄웠다. 기사 내용을 보니 분명 내가 쓴 글로 '박도 기자'라고 표기돼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쓴 글이라고 답했다.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로 미 문서기록관리청 서고를 둘러보다(2004. 2. 왼쪽 권중희 선생). ⓒ 박도

     
아버지도 드디어!

그러자 그 후배는 인터넷 기사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기사 아래에는 그때까지 10여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는데, 그 기사를 보는 순간에도 한두 개씩 늘어났다. 이튿날 아침까지 이런저런 댓글이 50여 개나 달리고, 기사 조회 수가 1만 회를 넘었다. 그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는 게 재미도 있었고, 새로운 언론문화도 무척 경이로웠다.

후배 교사 말에 따르면, 그 댓글에 내가 답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인터넷신문에서는 기자와 독자가 실시간에 서로 의사 교환을 할 수도 있다고 하여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침 후배 교사와 기사를 보는 순간에도 한 익명의 독자가 "허 장군님 생가 주소 좀…" 하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후배 교사에게 댓글 다는 법을 배운 뒤 독수리 타법으로 즉석에서 답했다. 그러자 또 다른 독자가 댓글을 달았다.

후배 교사는 댓글을 참고는 하되, 거기에 너무 얽매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또 다른 익명의 독자 댓글을 보면서 이게 무슨 어린 시절 만화로 보았던 공상의 세계 '열려라 참깨'와 같은 요술 상자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퇴근 후 아들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자 그도 놀랐다.

"아버지도 드디어!"

그 무렵 나는 아들에게 컴퓨터에만 빠져 있다고, 사람은 기계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고 꽤 잔소리를 하던 때였다. 아들은 아버지 기사에 놀라워하면서 컴퓨터의 순기능을 하나하나 가르쳐줬다.

나는 그 시절, 내 글만은 어떤 경우라도 육필로 써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던 때였다. 필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그런 글을 쓴다고 행여 잡지사나 언론기관에서 청탁이 와도 200자 원고지에 또박또박 정성껏 써서 보냈다.
  

오마이뉴스 기자로 현장 취재하다 ⓒ 박철 시민기자

 
"정식으로 기자 등록을 하시지요"

내 기사는 이튿날도 오마이뉴스 하단에 걸려 있었고, 그날 오후까지 댓글은 60여 개를 넘고 있었다. 이튿날 퇴근길에 광화문 내수동에 있는 <오마이뉴스> 본사에 들렀다. 정운현 편집국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좋은 기사를 보내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근데 그 기능이 놀랍습니다."
​​​​"그럼요, 실시간에 전국은 물론 전 세계로 나갑니다. 앞으로는 인터넷 신문이 좌우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네에?!"

"선생님, 앞으로도 기사를 보내주십시오. 사진도 보내주시면 함께 실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컴맹입니다."
"괜찮습니다. 원고지에 쓰신 그대로 보내주시면 저희 편집부에서 워드 작업을 하여 싣겠습니다. 원고 보낼 때 사진도 동봉해주시면 스캔해서 쓴 뒤 곧 반송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며칠 후 경북 안동의 이육사 생가와 중국 연변의 용정 명동촌 윤동주 생가를 답사 비교한 기사와 사진을 보냈다. 그러자 며칠 후 "'항일'은 같은데 '생가보존'은 딴판"(2002. 7. 30)이라는 기사를 역시 톱기사로 실어주었다.

그 며칠 후 정 편집국장한테 전화가 왔다.
 
"박 선생님, 이참에 저희 신문에 정식으로 기자 등록을 하시지요. 그래야 원고료도 지불할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기자입니까?"

"저희 신문은 연령에 상관치 않고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에?"
"화면 상단 오른편에 보시면 '기자 등록' 난이 있습니다. 거기 인적사항을 입력만 하시면 됩니다."

나는 그날도 후배 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뜨덤뜨덤 기자 등록을 했다. 그렇게 하여 나의 세 번째 꿈인 기자가 되었다. 신문배달원으로 개에게 바짓가랑이를 물리던 소년의 꿈이 40년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로부터 2013 문학 분야 특별상을 받다. ⓒ 오마이뉴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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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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