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5 20:23최종 업데이트 20.11.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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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2건의 '성공한 쿠데타'에서 주인공의 승리를 돋보이게 해준 공통적인 조연이 있었다. 바로 육군참모총장 자리다. 1961년 5·16 쿠데타가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됨으로써, 또 1979년 12·12 쿠데타 당일에 정승화 참모총장이 체포됨으로써 쿠데타 주인공의 군부 1인자 지위가 명료해졌다.

장도영과 정승화 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는 유사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전혀 달랐다. 주인공에게 큰소리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에서 두 사람은 상반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승화는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며 호통 칠 수 있었지만, 장도영은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 ⓒ 육사

 
쿠데타의 조연

역모 제안을 받은 사람은 반란군에 합류하든가 아니면 임금님 앞에 엎드려 고변을 하든가 해야 한다. 그런데 장도영은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로부터 거사 제의를 받은 뒤에 박정희의 손을 덥석 잡지도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 앞으로 달려가 부복하지도 않았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의 <실록 군인 박정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도영은 2군사령관 시절 이미 박정희 일행의 거사 계획을 알고 있었다. 5·16 직전 박정희는 참모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장도영을 찾아가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장도영은 '때가 아니다. 두고 보자'며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박정희는 장도영과 친한 김재춘 6관구사령부 참모장을 보내 '정점으로 모시겠다'는 요지와 함께 가담해줄 것을 다시 요청했지만, 딱 부러지는 답을 듣지 못했다.

왕조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장도영의 행위는 처벌받고도 남을 만하다. 그는 5·16 일주일 전에는 장면 총리로부터 박정희 쿠데타 음모에 관한 질문을 받고도 '설마 그러겠습니까?' 하며 얼버무렸다. 장면 정권이 쿠데타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는데도 장도영의 모호한 태도가 그것을 가로막은 셈이다.

1960년 5월 15일 밤 10시경, 장도영은 '쿠데타 장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고 출동한 이광선 헌병차감과 헌병대는 16일 새벽 0시 30분경 박정희와 조우했다. 이때 박정희를 체포했다면, 한국 현대사는 당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광선은 면전에 있는 박정희를 체포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정희한테서 '혁명'의 당위성에 관한 일장연설을 듣기만 했을 뿐이다.


미국이 박정희와 사전 모의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적어도 박정희의 동향을 사전에 파악한 것은 사실이다. CIA 한국지부는 4월 말쯤에 쿠데타 음모를 인지했다. 이것이 이광선의 이상한 행동을 푸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이광선의 행동이 미국과 무관하다면, 장도영한테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광선에게 공식적인 체포 명령 외에 별도의 밀명을 내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장도영은 정승화와 달리 큰소리칠 수 없게 됐다. 어찌 보면 박정희의 공범인 장도영은 쿠데타 뒤에 자신을 몰아낸 박정희를 상대로 '왜 나를 몰아내느냐?'고 고함칠 수는 있어도 '왜 쿠데타를 일으켰느냐?'고 호통 칠 수는 없었다.
 

'5.16 수뇌부' 장도영과 박정희 5.16 쿠데타 며칠 뒤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한 자리에 선 모습 ⓒ 정부기록사진집

 
토사구팽

1923년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난 장도영은 신의주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거쳐 1944년에 일본 도요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소위가 됐다. 얼마 안 있어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친미군인 양성소인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그 뒤 한국군 장교로 변신했다.

제5·제9 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친 그는 한국전쟁 때 제6사단장으로 활약했다. 1951년 4월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대패한 그는 다음 달 벌어진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 달의 패배를 만회했다.

휴전 뒤 군단장과 육본 참모부장 및 육군참모차장을 거친 그는 1960년 4·19 혁명 뒤의 장면 내각 하에서 39세 나이로 참모총장이 됐다. 하지만 자신을 총장으로 만들어준 민주당 정권에 충성하지 않았다. 부하들의 쿠데타를 사실상 방조함으로써 정권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말았다.

설령 박정희 쿠데타를 방조하지 않았다 해도 쿠데타 이후의 행적만으로도 그는 정권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는 박정희가 조직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자리에 앉고 군사혁명위원회를 뒤이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리에도 앉았다. 계엄사령관과 내각수반 자리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1961년에 그의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정점'에 툭 올려진 그는 두 달도 안 돼 바닥으로 끌어내려졌다. 7월 2일 내려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체포 명령에 따라 반혁명죄 피고인으로 전락했다. 갑자기 죄인 신분이 된 그는 1963년에 형집행면제를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그는 박정희에게 이용당하다가 토사구팽당한 비운의 장군으로 비치게 됐다.

그 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배신당한 이유를 스스로 해명했다. 박정희의 권력욕을 막고자 민정이양을 주장했다가 그렇게 됐노라고 해명한 것이다. 1982년 2월 23일자 <중앙일보> 기사 '국가재건최고회의6'은 "장도영씨는 최근 '군정 기간을 6개월로 잡으려 했다'고 회고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회고를 전했다.
 
나는 우리 군대가 잘 훈련돼 있어 6개월이면 질서회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봤어요. '6개월 후에 선거를 치르고 새 민간 정부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켜 보자. 여러 말 말고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라'고 최고위원들에게 주장했지만 주체들은 그게 아니었어요.

장도영이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했다는 점은 여러 증언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그의 실각을 초래한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1961년 5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 외무 김홍일,내무 한신, 재무 백선진 등을 임명하는 등 혁명내각을 구성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권력욕의 끝

그는 쿠데타 직후부터 '얼굴 마담'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최고회의 의장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려 했다. 쿠데타 주역들의 시선은 이로 인해 싸늘해지게 됐다. 5·16 쿠데타 설계자의 회고록인 <김종필 증언록> 제1권은 이렇게 말한다.
 
1961년 5월 24일 장도영은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전날인 23일엔 박정희 부의장이 매그루더 사령관과 회동하는 등 미군이 혁명정부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시기였다.

장 의장의 발표는 우리와 사전에 상의 없이 이뤄져 '도대체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게 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서 무슨 언질을 받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겼다. 그는 또 사흘 뒤엔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꿨다. 이 역시 우리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

증언록에서 김종필은 장도영이 자기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고 말한다. 또 의장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가 나오자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 셈인가"라며 "박 장군과 나를 놓고 신임투표를 해볼까"라며 분노했다고도 한다.

의장 권한의 제한은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을 겸임할 수 없다"는 조항의 의결로 나타났다. 이 의결은 6월 3일에 이뤄졌다. 쿠데타로부터 불과 18일 뒤에 의장 권한을 제한하는 입법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은 그 기간 동안 쿠데타 주역들의 눈에 장도영이 어떻게 비쳤는지를 짐작케 한다.

쿠데타 세력의 추대로 '정점'에 오른 '허수아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쿠데타 주역들과의 갈등을 스스로 기피한다. 이들은 쿠데타 주역들의 기세등등한 분위기에 눌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도영은 그러지 않았기에 쿠데타 주역들이 입법조치까지 취해가며 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박정희를 대한 태도를 짐작케 할 뿐 아니라 그가 쫓겨난 진짜 이유까지도 추론케 할 만하다.

박정희는 1917년생이고, 장도영은 1923년생이다. 나이로만 보면 장도영이 아랫사람이지만, 해방 뒤 장도영은 항상 박정희의 윗사람이었다.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먼저 한국군에 들어갔다. 또 박정희에게 은혜도 베풀었다. 여순사건으로 공산주의 경력이 드러나 군복을 벗고 문관 생활을 하던 박정희를 도와 군복을 다시 입을 수 있도록 해줬다. 또 박정희를 자기 부관 자리로 끌어준 적도 있다.

이런 이력이 박정희에 대한 장도영의 경계심을 허물어트렸을 수도 있다. 박정희는 나한테 은혜를 입었을 뿐 아니라 내 앞에서 항상 고개를 숙여왔다는 생각이 박정희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키웠을 수도 있다.

박정희 쿠데타를 방지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 별다른 거리낌 없이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정점'직을 수락하고 박정희를 도운 것, 권력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쿠데타 이후의 박정희 앞에서 자기 권력욕을 함부로 드러낸 것 등은 장도영의 막연한 신뢰감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막연한 느낌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의도치 않게 박정희와의 라이벌 대결로 몰리게 됐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자기 운명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박정희에게 이용당하고 쫓겨났다기보다는 박정희를 쉽게 보고 행동을 함께했다가 화를 당한 군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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