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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남편 때문에 뒷목 잡다 본 반가운 책

[리뷰] 이혜선 지음 '엄마에겐 오프 스위치가 필요해'

등록 2020.11.15 20:03수정 2020.11.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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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착한 사람이다.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면 자신이 되는 게 가장 속 편한 사람, 내 남편이 그 선량한 시민이다. 자랑이냐고? 그럴 리가. 덕분에 난 뒷목을 숱하게 잡았다. 

식당 음식에서 나온 머리카락에 대해 사장님께 고했다가는 바로 부부싸움 당첨이다. 조용히 빼면 된다는 게 그의 지론. 큰 맘 먹고 갔던 비싼 레스토랑에서는 내가 음식이 조금 짜다는 말을 담당 서버에게 했다가 며칠을 싸웠다. 클레임을 건 것도 아니고 묻기에 답한 것뿐인데 말이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담하지만 예쁜 독채 펜션을 선불로 완납한 뒤 기대에 부풀어 달려가 보니 뜬금 없이 예약이 취소되어 있었다. 예약자의 이름이 헷갈린 사장님의 실수였다. 동명이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남은 객실은 하나도 없는 상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실을 책임져 달라고 해야 할지 얼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숙박비를 돌려 받는다 해도 어디로 가야 하나. 기름값은 그렇다 쳐도, 이미 어두워진 금요일 밤에 어디를 헤매야 한단 말인가. 

사장님은 실수를 인정했지만 명확한 사과를 하지도, 적당한 보상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계속해 예약자의 이름이 비슷했고 남은 방이 없다는 중언부언만을 반복해 내 분노가 올라갈 때쯤 남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러실 수도 있죠." 

사장님은 결국 우리에게 방 하나를 내주었는데, 내가 예약했던 로맨틱한 숙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실내 운동장이었다고 하면 맞을까. 30명은 수용할 수 있을 듯한 넓은 방에 침대도, 가구도 없이, 싱크대만 덜렁 있었다. 커플이 밤새 축구를 할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웬 말인가.

나는 이 상황이 답답해 혈압이 오를 지경인데 사장님이 한 술 더 떴다. 특별히 숯불을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환불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보상이나 사과는커녕 겨우 공짜 숯불이라니. 내가 따지려는 순간, 한 발 빠른 남편이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방도 좋네요. 참 넓고요."

이 남자와 살며 이런 일을 숱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이야기. 즉, 남편은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한다. 그리하여 세상 풍파를 막아주긴 개뿔, 그 옆의 나도 함께 참아야 한다고 해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는 것. 세상 제일 착한 남자를 만났다며 좋아했다가 이렇게 뒷통수를 맞았다.

그와 함께한 지 십 년 차. 나도 이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간다. 종종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누군가는 문제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부부간의 화합과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애써 털어 넘긴다. 

이런 그와 며칠 전 극장에 갔다. 한참 영화를 관람하던 중 오른쪽 벽에 꽤 크고 환한 불빛이 비췄다. 그런 일은 수십 차례 반복 되었고 나는 좀처럼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처음엔 다른 관객의 스마트폰 불빛인 줄 알고 주인공을 찾아 정중히 자제를 부탁드리려고 했다. 남편이야 또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겠지만 이 정도야 서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하지만 반복되는 불빛을 눈으로 좇으니 뒤쪽 영사실이 범인이었다. 관람 도중 어찌할 수가 없어 나는 그저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별로 마음에 드는 작품도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영화가 싱겁게 끝난 뒤, 나는 별 생각 없이 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은 방향을 틀어 티켓 부스로 향했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나를 옆에 두고 직원에게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니 절차를 알려달라는 요지였다. 이 사뭇 자연스러운 광경을 보며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보상이나 해결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이제서 나만 그에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역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정당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판단했고 이 변화가 나는, 너무도 반갑다. 

워킹맘도 아닌 내가 무릎을 치며 읽은 책
 

<엄마에겐 오프 스위치가 필요해> 책표지 ⓒ 호우

 
이 모든 경험은 나의 것이지만 이 책이 아니었다면 글로 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책은 이혜선 작가의 <엄마에겐 오프 스위치가 필요해>. 부제는 '퇴근 없는 워킹맘의 일상 공감 에세이'다. 워킹맘은커녕 엄마도 아닌 내가 이렇게 무릎을 치며 보게 될 줄이야.
 
내 삶은 어느 날은 더없이 완벽했고, 어느 날은 더없이 불완전했다. 행복과 불행의 반복이었던 출근길,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부부 사이, 때때로 사막 같았던 내 마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누구보다 아름답게 성장한 아이들. 이 책은 이런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p. 6. 시작하며)

일을 해도, 하지 않아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기혼 여성의 삶, 워킹맘이 되기 위해 또 다른 여성의 노동력을 빌리게 되는 현실 등 그녀는 자신의 삶에 밀착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내 자신과 내가 속한 사회를 계속 의식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수시로 떠올리며. 

늘 "괜찮다" 말해주는 고마운 남편이 어려운 살림 앞에서도 "괜찮다"고 해 화를 돋웠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터뜨렸고, 아이는 물론 엄마와 아빠 역시 함께 성장한다는 그녀의 혜안 덕분에 나와 남편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상기했다. 

출산이나 결혼 유무와 상관 없이, 우리는 필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 어차피 엮여 영향을 주고 받을 것이라면 나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더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다고.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일 테다. 나로 온전히 설 수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직장인으로, 아내로, 엄마로 열심히 살던 나는 이제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온전한 나로 남는 연습을 시작한다. 한때 삶의 전부였던 존재들과 언젠가 완전히 분리됐을 때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만나지 않길, 그때에도 내 인생이라는 작품에서 여전히 주인공인 나를 만나길 간절히 소망하면서. 내 인생의 또 다른 해피엔딩을 위해 오늘도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간다. (p. 144)

한 가지 흥미로운 포인트. 직장 생활 19년에 엄마 경력도 11년인데 여전히 '미숙하고 허접하다' 말하는 저자는 한 번도 자신의 삶을 미화하거나 정답이라고 주장한 바가 없다. 뭐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엄마에게 오히려 "괜찮다"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나오는 대목은, 비출산을 결심한 내가 지금껏 들어온 그 어떤 강요보다 효과적인 출산 장려로 다가왔으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문득 사람을 감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열 마디 말보다 내 삶을 가만히 보여주는 것, 그보다 더 훌륭한 조언은 없으리라. 영감과 웃음을 한 번에 안겨주는 생활 밀착형 여성 에세이라니,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엄마에겐 오프 스위치가 필요해 - 퇴근 없는 워킹맘의 일상 공감 에세이

이혜선 (지은이),
호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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