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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자수 후 1년만에 자살... 만석지기 집안의 파멸

'해남의 모스크바'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마을 김상훈 집안의 비극

등록 2020.11.21 20:18수정 2020.11.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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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가족사진 김상훈 가족사진. 앞줄 좌측부터 김상훈의 작은언니, 할머니, 작은오빠, 할아버지. 뒷줄 좌측부터 김상훈의 어머니, 큰언니, 큰오빠, 아버지(김창수). 촬영시기: 1940년대 초반. 장소: 해남군 계곡면 방축리 ⓒ 박만순



"상훈아."
"누구세요?"
"오빠다."
"우리 오빠는 다 죽었어요."

낯선 남자가 대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자, 새댁 김상훈은 무서워 부리나케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부엌에 들어가 나무 빗장을 건 그녀는 문에 뚫린 옹이로 밖을 내다봤다.

아무리 봐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빠라니?' 큰오빠는 6.25 때 학살됐고, 작은오빠는 12년 전에 죽지 않았는가. 그러니 오빠라는 저 사람이 이상하면서도 무서웠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김상훈의 무릎을 주저앉혔다.

"상훈아! 상윤이 오빠야. 오빠 목소리도 잊었니?"
"흑..."

12년 전 병으로 죽었다던 작은오빠 목소리가 맞았다. 상훈은 빗장을 풀고 "오빠~"하며 상윤이의 품에 안겼다. 1968년 김상훈이 살았던 전남 광산군 하남면 고롯마을(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에서의 일이다.

눈물의 재회를 한 이들은 그간 사연을 나누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근데 오빠, 죽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김상윤의 설명은 이랬다. 마지막 형집행정지로 나왔을 때, '다시 형무소 가면 이제는 살아서 못 나오겠다'라는 생각에 가족회의를 통해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폐렴이 악화돼 일시적으로 형집행이 정지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사망으로 위장하기 위해 거짓으로 장례를 치른 후 대전으로 이사해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김상윤은 집안 사람 중에 6.25 때 행방불명된 사람으로 이름을 썼다.

자수한 지 1년 만에 자살

이름을 바꾼 후 대전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지만 김상윤은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1962년 5월 10일 제정된 주민등록법에 따르면 1968년부터 만 17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은 의무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야 했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통장을 만들 수 없었고, 여관에서 잘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거디가 김상윤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크는데 무한정 주민등록증 없이 살 순 없었다. 

김상윤은 경찰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숱하게 꾸었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김상윤은 1969년 대전중구경찰서에서 자수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형집행정지 중에 탈출해 형무소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처벌받지 않았다. 1968년 주민등록증 제도가 실시되자 정부는 범법자들에게 기간을 정해 자수를 받았고 그 경우 과거의 죄를 묻지 않았다. 김상윤도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남의 이름을 도용한 죄로 구류 7일의 처분을 받았다.

자수하면 자유로운 삶을 살리라 기대했던 김상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시로 대전중구경찰서 보안과가 그의 집을 들락거리며 감시와 신원조회를 했다. '괜히 자수했다'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1970년 김상윤은 아내와 여동생에게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여보 미안해."
"상훈아. 이 세상에서 더이상 살고 싶지 않구나. 하늘나라에 가서 너를 도와줄게."

당시 김상윤의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가족 죽은 지 보름 만에 화병으로 죽은 할머니

"할머니, 마실 가요."

손녀 김상훈(당시 5세)이 조르자 할머니 이법곡은 "그래. 아가" 하며 손녀의 손을 이끌었다. 이웃집에 마실을 갔다가 냇가를 건너 당산나무를 지나쳐 집 가까이 왔을 때였다. 순경 여러 명이 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경찰들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전남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의 가구 100호가 타는 데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1950년 11월 9일의 일이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경찰들은 어린 김상훈의 가족을 굴비 엮듯이 묶어 신작로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 김상훈의 아버지 김창수, 어머니 김병순, 큰오빠 김상화, 큰언니 김상님, 작은언니 김상욱이었다. 공포에 질린 김상훈이 "엄마"라고 불렀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줄줄이 묶인 김상훈의 가족이 냇가를 건너는데 지휘자인 듯한 경찰이 총 개머리판으로 아버지 김창수의 어깨를 내리쳤다. "어이쿠" 하며 김창수가 주저앉자 다른 가족들도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경찰들이 몰려들어 발로 차고 밟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비명과 절규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뭇매를 맞은 가족들은 잠시 후 GMC 트럭에 실렸다. 순천김씨 집성촌이었던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에서는 이날 김창수 집안 5명을 포함해 20여 명이 계곡지서로 연행됐다. 얼마 후 이들은 무이리 골짜기에서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도 상반기 조사보고서』)

아들과 며느리, 손주 등 5명이 끌려가 죽자 김상훈의 할머니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손뼉을 치고 중얼거리며 마을을 쏘다녔고, 땅바닥과 마루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가족들이 끌려간 지 보름 만에 화병으로 사망했다.

'해남의 모스크바' 방춘리
 

김상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 박만순

 
김창수 가족을 포함한 방축리 주민 20여 명은 왜 학살 당했을까? 한국전쟁 이전 해남군 계곡면 방축리는 '해남의 모스크바'로 불리웠다. 그 이유는 김창수와 김정수의 활동과 영향력 때문이었다.

김상훈의 아버지 김창수와 김정수는 사촌지간으로 둘 다 해남군 계곡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를 나왔다. 이들은 해방 직후 해남인민위원회 수립을 주도해 해남군에서 촉망받는 지도자로 여겨졌다. 소위 '해남군의 3대 천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김창수·김정수와 함께 민영남이었다. 해남군 마산면 출신의 민영남은 일본 경도제대(교토제국대학)를 나와 귀국 후 마산면장을 지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마산면장을 하면서도 면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 1954년에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해남에서 당선되었다. 1960년 4.19 직후에는 민주당 소속 전남도지사(1960.12.31.~1961.5.23.)에 당선되었다.

또 김정수는 해방 직후 해남군 인민위원장과 초대군수를 역임하고 월북 후 초대 평양시장을 지냈다. 하지만 김창수는 1950년 부역혐의로 학살되었다. 그는 북한군이 점령한 '인공(인민공화국)' 시절에 감투를 쓰지 않았다. 다만 해방 후와 한국전쟁기에 김정수와 좌익세력들에게 경제적 후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해남의 모스크바'로 불린 계곡면 방춘리에서 인공 때 부역 활동을 한 이들 중 일부가 입산하면서 1950년 11월 8일 우익인사 집 3채에 불을 질렀다. 다음날 경찰은 보복 차원에서 마을의 전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 20여 명을 연행해 학살했다. 부역혐의자들이 실정법을 위반했다면 재판을 통해 처벌하면 될 것을 불법적으로 죽인 것이다. 김창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딸 둘은 당시 이화고보와 이화여중에 재학 중이었다. 과연 10대 소녀들이 죽을 만큼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을까?

김천소년형무소에서 폐결핵을 얻은 소년

부모와 형, 누나, 여동생이 계곡지서에 끌려가던 날, 아들 김상윤은 목포의 외가집에 있었다. 당시 배제중학교 학생으로 당시 17세(1934년생)였던 상윤은 학살은 면했지만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경찰들이 계곡면을 수복한 후 몇 차례에 걸쳐 부역혐의자들을 싹쓸이하는 과정에서 중학생 김상윤은 부역 혐의로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김상윤은 감옥에서 폐결핵을 얻었다. 병 때문에 형집행정지를 받은 상윤이 잠시 계곡면 왔지만 가족이라고는 12살 어린 여동생 김상훈이 전부였다. 고모와 이모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 상훈은 오랜만에 만난 오빠가 너무 반가워 상윤을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동생에게 결핵을 옮길까 두려웠던 상윤은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김상윤은 기침을 하면 금세라도 죽을 듯 괴로워하며 수십 분 동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는 목에서 피가 나왔다. 집에서 몸조리를 하며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김상윤은 재수감되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감옥에서 성인이 된 김상윤은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세 번째 형집행정지를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잠시 나왔을 때 김상윤은 말 그대로 뼈만 남은 해골이었다.

그런 상윤을 보고 집안 어른들은 "이러다가 집안 대(代)가 끊기겄어. 상윤이를 결혼시키자"라고 의견을 모았다. 김상윤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결혼이에요!"라고 반발했지만 어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을 한 김상윤은 다시 재수감되었고 훗날 상윤의 딸이 태어났다. 네 번째 형집행정지로 상윤이 집에 왔을 때였다. "다시 감옥에 들어갈 수는 없재"라고 의견을 모은 집안 어른들은 그가 죽은 걸로 위장했다. 이 일은 상윤의 여동생 상훈도 몰랐다. 그러니 상훈은 작은오빠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고, 1968년 김상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기절초풍한 것이다.

만석지기의 손녀가 겪은 현대사
 

증언자 김상훈 ⓒ 박만순

 
김상훈은 6.25가 나기 전까지 손에서 떡과 육포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만석지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하고 해방 후에도 인민위원회 등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 재산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라는 말처럼, 김상훈은 서울 내수동에 살 때 덕수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녔다. 매일 등하교 시에는 집 일을 봐주던 언니가 동행했다. 그렇게 곱게 자란 소녀 김상훈은 6.25를 맞아 집안 식구 6명을 잃었고 1970년에는 작은오빠도 떠나보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2000년도에 시동생에게 땅 153평을 샀다.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오빠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뼈도 못 찾은 아버지를 포함한 5명의 가묘(假墓)도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었다. 국가는 김상훈이 만든 가묘에 6.25 때 죽은 가족 5명의 유해를 찾아서 안장시켜 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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