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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도 자주 목욕했다는 '치유의 물'이 있는 곳

[터키에 가다10] 신보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

등록 2020.11.14 18:08수정 2020.11.1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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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의 성 파묵칼레
 

파묵칼레에서의 일몰. ⓒ 차노휘

      
에게해 연안에 있는 데니즐리(Denizli)는 터키 남서부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크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20㎞쯤 떨어진 멘데레스 계곡에 석회 성분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칼레(Pamukkale)가 있다. 터키어로 파묵(pamuk)은 '목화(木花)', 칼레(kale)는 '성(城)'을 뜻한다. 파묵 칼레는 '목화의 성'이다.

빙하 같기도, 야간에 개장한 스키장 같기도 하지만 봄가을에는 온도가 30℃, 여름에는 40℃, 겨울에는 15℃도 정도 되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좀처럼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닿기 위해서는 멘데레스 평야에 끝없이 펼쳐지는 목화밭을 지나야만 했다. 때문에 목화의 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눈처럼 하얀 석회봉. ⓒ 차노휘

 
목화처럼 하얀 석회봉(Travertine)은 멘데레스 단층이 함몰되면서 분출된 석회 성분 온천수가 1만 4천년 동안 매년 1mm씩 쌓여서 거대한 하얀 산을 만들었다. 석회봉 뒤로는 신성한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히에라 폴리스(Hiera Polis)가 자리하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10~12시간 걸리는 이곳을 나는 안식년을 영국에서 보내고 그리스와 터키를 거쳐 귀국한다는 K교수 부부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히에라 폴리스
 

석양에 물든 히에라 폴리스의 도미티니아누스 문.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81~96)는 악명 높은 폭군으로서 ‘제2의 네로’라고도 한다. ⓒ 차노휘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후 우리는 잡초가 나 있는 좁은 언덕길로 들어섰다. 약간 센티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늘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언덕에서 기원전 2세기경에 번성했던 페르가몬 왕국을 떠올리기에는 내 상상력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처음으로 고대 왕국을 건설한 페르가몬(Pergamon)은 로마가 부흥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 왕국이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비견될 만한 도서관이 있었고 이집트 파피루스 수입이 중단되자 최초로 양피지(기원전 190년)까지 개발했다. 책에 쪽수를 매긴 것도 이 왕국이 처음이다.

세계 7대 교회가 있는 등 부유했지만 기행(奇行)을 이어가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Attalos III Philometor Euergetes)가 왕실 직할지와 재산을 로마 국민에게 증여한다는 유언(遺贈)에 따라 그가 죽은 뒤 페르가몬 왕국은 사라졌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왕위 계승 1순위라는 이유였다.

아탈로스 3세의 기행에 대해 웃고 떠들던 우리는 원형 극장에 도착했다. 손에 땀이 많아서 얇은 면장갑을 끼고 있는 K부인과 비교적 복원이 잘 된 원형 극장에 앉아있을 때 경기장 한 쪽에 세워진 게시판 안내문을 한참 들여다보던 K교수가 우리에게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이런 형태로 복원하기까지 31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1957년부터 이탈리아 고고학자 파올로 베르조네가 복원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 열정이 믿어지나요?"
 

히에라 폴리스 원형극장.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설했다. 관객석은 언덕을 이용했다. 배수로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실내 극장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 차노휘

 
원형 극장은 최대 1만 5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극장 좌석 수는 인구 20%를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원형 극장에는 대리석 기둥으로 파사드를 만든 귀빈석이 있고 각 기둥에는 조각상들이 있다(조각상은 현재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K교수의 설명을 다 들은 우리는 스피커 역할을 하는 원형 공간을 이용하여 상승 기류를 탄 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듯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1,200기의 무덤이 있는 네크로 폴리스(Necropolis; 공동묘지)로 향할 때는 저절로 엄숙해졌다. K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솜털처럼 가벼웠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던 페르가몬 왕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 삶의 뒤안길로 사라진 한 사람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혀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네크로 폴리스. ⓒ 차노휘

 
다시 센티해진 나는 페르가몬 왕국부터 오스만 제국까지 사용했던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죽은 자들의 도시를 둘러봤다. 무덤 옆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살고자 하는 에너지가 흘렀는데 이곳 또한 그랬다. 공동묘지 너머 온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치유의 물

공동묘지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주 찾아와서 목욕했다는 고대 수영장인 '테르메 온천욕장'이 있다. 섭씨 35도인 미네랄 온천수가 치유 효과가 있다는 소문에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중병에 걸린 환자들까지 있었다.

치유의 물로 효과가 좋은 이곳을 로마인들은 신성한 도시(히에라 폴리스, 그리스어 '히에로스(Hieros)'는 '신성함'을 뜻한다)라고 불렸으며 이 도시가 명성을 더할수록 생을 마감하는 외부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을 온천 바깥, 1km 떨어진 공동묘지에 묻었다.

무덤 형태는 시대에 따라 아치, 2층 건물, 원형 분묘 등으로 다양하나 지금은 보존력이 좋은 돌무덤만 남아 있다.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죽은 자가 생전에 아끼던 물건까지 같이 묻어주는 관습 때문에 도굴이 잦았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 도굴꾼을 신고하면 천문학적인 포상금을 주는 신고 제도를 마련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석관에 장식하거나 저주의 글들을 새겨 넣기도 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 듯했다.
 

열기구가 떠 있는 파묵칼레. ⓒ 차노휘

 
해가 점점 기울어 가려고 하자 삶의 생기를 채우고 싶은 우리는 테르메 온천욕장으로 향했다. 미네랄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미용과 치료 효과뿐만 아니라 마법 같은 경험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못생긴 여자도 미녀가 될 수 있고 과거의 죄도 정화된단다. 아마도 혼전 순결을 중시했던 옛날부터 처녀 총각들이 자주 찾았다고 하니 이 온천수는 관용과 묵계의 상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이참에 클레오파트라처럼 영민한 미녀가 되고 싶었다. 입장료 50리라에 로커 보증금으로 10리라를 기꺼이 내고 입수했다.

신성한 도시는 이 마법 같은 효과 때문인지 로마에 이어 비잔틴 제국도 사랑했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투르크족의 룸 셀주크 왕조(al-Rum Seljuk)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묵칼레'라는 이름으로 바뀌긴 했지만 지배 세력의 변천 속에서도 지속적인 부를 일구었다. 이 도시가 폐허가 된 것은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 때문이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600년 전 신전 기둥 위로 흐르는 온천수에 몸을 띄운 나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손길 같은 미네랄워터는 흡사 내가 클레오파트라가 아닌 비너스가 된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순간,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눈을 떴다.

대지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곳을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했다. 그 이후로 발굴 및 복원작업을 진행해서 마침내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엄청난 힘을 남용하는 신(자연)보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거친 삶을 복원하는 인간. 나는 그런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온천수에 몸을 맡겼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파묵칼레 #페르가몬 #양피지 #터키 #히에라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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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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