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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 거부한 여자 빨치산, '봉선화' 노래 부르며 죽다

<조계산의 눈물> 김배선 작가와 함께 조계산 탐방 나선 중학생들

등록 2020.11.14 20:06수정 2020.11.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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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를 알기 위해 조계산 탐방에 나선 여도중학교 학생들 ⓒ 오문수

 
지난 8일 여도중학교 학생 10명과 인솔교사 2명이 조계산 탐방에 나섰다. 이들을 안내한 이는 <조계산의 눈물> 저자 김배선씨다.

'2020 청소년 미래도전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역사 탐방에 나선 학생들이 조계산 등산에 나선 것은 72년 전에 여수에서 일어났던 여순사건 현장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남도의 명산' 조계산, 여순사건 이후 이념 갈등의 현장으로 변하다
  
조계산은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걸쳐 정상을 나누고 있으며 주암, 외서, 낙안의 3개면이 줄기에 잇대어 있다. 주봉은 높이 884m의 장군봉으로 조계산 자락에는 송광사와 선암사가 서쪽과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골골마다 불탑과 암자 등 불교문화유산이 가득하다.

조계산은 한말 평민의병장 안규홍 부대가 향로암을 근거지로 삼아 항쟁하였으며,  6·25 전쟁 전후에는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가 되어 산 아래 사람들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산이다.

조계산은 정상 남쪽 바로 아래 전설을 안고 솟아있는 '배바위'를 제외하고는 바위다운 바위를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흙길만 쌓인 산이다. 조계산에는 선암사와 송광사의 천년 거찰이 자리하고 있다. 고승들은 양 사찰을 오가며 자연을 배우고 자연이 주는 지혜를 터득하며 도량을 베풀었다. 그러나 72년 전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평화롭던 조계산을 핏빛으로 물들게 했다.

여순사건 여파로 수많은 주검 품어야 했던 조계산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군 신월리에 주둔했던 14연대가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는 항명이었다. 발생 3일 만인 10월 22일 남원, 구례 방면으로 진격하려던 봉기군이 순천의 학구전투에서 진압군에 패배하자 봉기군은 지리산과 조계산 등으로 입산해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조계산은 빨치산 주요 활동지로 그 수가 많을 때는 수백 명에 달했다. 마을사람들은 "골짜기마다 반란군이 득실거린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조계산에서 투쟁활동을 한 입산자는 조계산 인근 마을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학생들에게 선암사 서부도전을 설명하는 김배선씨. 바위에는 '성무수좌사리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도의 주인공이 비구니여서 부도전 안에 모시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오문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나 서울로 나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상을 접한 지식인들이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 지식인의 사상에 심취한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휩쓸려 들어간 젊은이들이었다.


따라서 조계산에서는 토벌작전을 비롯하여 입산자 색출로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가족과 이웃을 잃은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사슬이 두려워 감히 사실을 알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뼈아픈 교훈 남기기 위해 책 썼다"
  

6·25 전쟁과 빨치산 토벌작전이 한창이던 1951년 조계산 서쪽 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난 김배선은 어린 시절에 어른들의 무용담을 수없이 들었다. 어른들은 조계산에서 벌어졌던 저항과 토벌의 현장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죽어간 사람들에 얽힌 추억도 하나둘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는 죽은 사람을 이야기할 때 하나 같이 "불쌍하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당시 그는 그 말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 단어에는 '억울함'의 의미가 깊게 깔려 있음을 알았다. 피비린내는 사건이 끝나고 50여 년이 흐른 뒤 취미 삼아 조계산의 역사를 뒤지던 그의 귀에 질책의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만든 조계산 지도 앞에선 김배선씨. 1951년 송광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나 어른들로부터 무용담을 무수하게 들었던 그는 '아픈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부채의식이 그의 뇌리를 짓눌렀다. 그는 조계산을 1000번 이상 등산하며 인근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조계산의 눈물>을 썼다.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도 그의 저서이다. ⓒ 오문수

 
"나는 억울했던 죽음과 비극적 사건들을 잊히기만 기다린 고의적 망각의 공범자가 아닌가?"

부채의식이 생긴 그는 묻혀있는 사건들을 수집하고 현장을 경험한 증인들을 찾아다녔다. 증언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였다. 어느 순간 어르신들은 그를 반기며 그동안 감추고 있던 사연들을 자진해서 들려주었다.

안타까운 건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어 대부분 타계하거나 증언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는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증언자들의 편견이나 과장을 피하고자 가능한 여러 사람의 증언을 듣고 비교했다. 그는 그동안 모은 증언 16편을 모아 <조계산의 눈물>을 펴냈다.
  
"역사적 사실을 알고 돌아보니 보람 있어"
  
8일 오전 9시 30분, 선암사 주차장에 내린 학생들은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들떠있었다. 학생들은 김배선씨의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대며 선암사로 올라가고 있었다. 10여 분쯤 올라가니 선암사 일주문이 보이고, 주변에는 노란 은행잎이 널려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 한 부부가 커다란 고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고목은 그야말로 멋진 사진 배경이었다. 그러나 김배선씨의 설명을 듣고 난 학생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선암사 정문 앞에서 여순사건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이야기하는 김배선씨. 빨치산 대장은 나무치기 온 두월마을 이장을 뒤에 보이는 고목나무에 묶도록 명령했고 빨치산 중 한 명이 낫으로 찍어 죽였다. ⓒ 오문수

 
"이곳은 선암사 인근 마을 노인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전해온 이야기인데 반란군들이 선암사 정문 앞에서 나무치기 온 이장을 낫으로 찍어 죽여서 나무에 매달아 놓은 곳입니다."

나무치기란 토벌대들의 안전을 위해 지서(파출소)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통행로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내는 부역을 말한다. 쌍암면 서쪽 끝 접치재 아래 두월마을 이장 강정문은 마을주민 32명과 함께 지서에서 할당한 구역의 나무치기를 마치고 선암사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뜻밖의 사람들이 절을 차지하고 있었다.

총을 든 산 사람들이었다. 고목나무 옆 공터에 마을주민들을 앉힌 반란군 대장은 "인민들을 해방시키려고 투쟁하는데 자신들을 잡는 일에 앞장서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책임자인 이장을 고목나무에 묶도록 했다. 그러자 빨치산 중 한 사람이 이장을 낫으로 찍어 죽였다. 총소리가 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작은 굴목재를 100여 미터 앞두고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세우고 김배선씨가 입을 열었다.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난지 3년 후 쓰러진 고목나무 아래 100여미터에서는 8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이곳은 '배바위 밑 아지트'라고 불리는 곳으로 치료받지 못한 빨치산 부상병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등산객이 올라가고 있는 길은 토벌대들의 전용통로였지만 발견되지 않았으니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때 적용되는 말이다. ⓒ 김배선

           
"이곳은 배바위 밑 아지트라고 불리는 곳 입구로  조계산 빨치산 토벌이 끝난 지 3년 뒤에 괴목마을에 살던 김영감과 최선용이 숯가마니를 만들 산죽을 찌러 왔다가 8구의 시체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 곳입니다. 토벌대가 다니는 길과 100여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부상당한 산 사람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입니다."

토벌대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를 숨죽이며 들었을 산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경사가 심한 산마루로 올라서니 굴목재가 나타났다.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힘들어요"를 외친다. 10여 년 전 조계산의 아픔을 모르고 등산했을 때는 굉장히 힘든 등산코스였는데, 당시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올라가니 힘든 줄도 모르고 굴목재 정상에 섰다.

여기서부터 송광사까지는 내려가는 길이지만 수많은 돌계단이 무릎에 충격을 준다. 조심스럽게 돌계단을 내려가는 데 김배선씨가 피아골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계산에는 숯을 구웠던 숯가마가 곳곳에 널려있다. ⓒ 오문수

 
"여러분 지리산에 있는 유명한 골짜기로 피아골이 있죠? 지금 우리가 내려가는 골짜기도 피아골이에요. 피아골은 아군과 적군사이에 피비낸내 나는 전투가 일어나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옛날부터 큰 난리가 나면 고관대작들은 액막이를 위해 식솔들을 데리고 숨는 골짜기가 있어요. 원래는 피액골이었는 데 음운변화를 거치면서 피아골이 됐어요."

일행이 토다리를 건너 송광사 옆 공마당 구에 도달했을 때 김배선씨가 여자 빨치산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1952년 당시 스무 살이던 최상도씨가 전한 목격담이다. 최상도는 당시 절에서 일꾼으로 살았고 여자 빨치산 처형 현장을 숨어서 보았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여자 빨치산이 마지막으로 '울밑에선 봉선화'를 부르다가 처형된 자리로 토벌대들은 나무들이 쌓인 뒤쪽 숯가마속으로 시체를 던져 버렸다. ⓒ 오문수

  
"아마도 6·25전쟁이 난 다음 해 가을이었을 것이여. 토벌대들이 봉대미골에서 여자 공비 하나를 잡아가지고 끌고 내려왔어. 공마당(현재 농막)에서 취조를 한다고 그래서 절 사람들 몇이 가봤더니 신발 밖으로 발이 다 나오고, 옷은 말도 못 하게 험해도 생긴 것은 참말로 예쁘게 생긴 처녀였는디 노래를 그렇게 잘하더라니까.

토벌대들이 공마당에 모여서 대장이 앞에 앉아 어디 사냐? 아부지가 누구냐? 물어봐도 입을 딱 다물고 절대 말을 안 해. 그러믄 느그덜 잘하는 노래나 한자리해보라고 시키니까 그때까지 딸싹도 안 하던 것이 '울 밑에선 봉선화'를 부른디 그렇게 잘 부르더라고. 노래를 부르고 나믄 박수를 치고, 제창을 하믄 또 부르고 하는데 참말로 눈물이 날 것 같드그마.

그렇게 토벌대들이 노래를 시킴서 이쁘고 노래도 잘한께 나하고 살자고 놀리고, 대장이 못하게 하고 자수하면 살려줄 꺼니 마음 고쳐 묵으라고 아무리 달개고 죽인다고 협박을 해도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는지 절대 굽히지를 않는 것이여."
   
아무리 달래도 안되니까 대장은 "까부러라(죽여라)"라고 명령해 총살한 여자를 숯가마 속에다 집어넣고 지붕을 내려앉혀 버렸다. 목적지인 송광사 주차장에서 여수행 버스에 올라탄 일행이 15분여를 달리자 넓은 들판이 나오고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행정저수지가 나왔다.

주암면 동쪽 끝자락인 접치고개에 있는 행정저수지는 1943년 9월 1일 주암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수리조합에서 착공한 공사판이었다. 일제가 시작해 잠시 중단했던 공사판에는 인근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 외지에서도 기술자와 인부 60여 명이 함바에서 숙식하며 공사를 했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49년 늦은 봄날이었다. 매일 밤 출몰하는 빨치산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광천지서장 황영환은 공사장 인부 중 내통자가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 인부들을 함바로 집합시킨 후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주암면 동쪽 끝자락 접치고개에 있는 행정저수지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49년 늦은 봄 어느날 빨치산 출몰에 골머리를 앓던 광천지서장은 저수지 공사장 인부들 중에 내통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 외지인부들로 분류된 사람들을 접치고개로 싣고가 총살했다. ⓒ 김배선

 
 
'지방인부는 우측, 한산(외지)인부는 좌측으로 줄을 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부들은 후다닥 정렬했다. 나눠놓고 보니 지방인부와 외지인부의 수는 반반이었다. 그는 지방인부 줄에 선 사람들은 신원확인해 돌려보내고 외지인부 줄에 선 사람들을 차에 태워 접치재에서 총살해버렸다.

총살된 사람 중에는 광수형제도 있었다. 원래 주암면 풍교리에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가 문길마을로 이사와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문길마을로 이사온 지 오래됐으니 지방인부 쪽으로 줄을 섰으면 살았을걸 외지인부 쪽으로 줄을 서 총살됐다.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광수 어머니는 실성해 돌아다니다 객사했다.

여수로 돌아오는 길에 학생들 소감을 들었다. 대부분 "힘들었지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보람도 있었다"고 말하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 비록 나이가 어려서 공감이 덜 가겠지만, 몇 년 후면 우리 선조들의 아픈 현장을 되새겨 볼 것으로 믿는다.

조계산의 가을은 아름답고 공기는 맑았지만 70여 년 전 역사 속 현장을 돌아본 마음은 우울했다. 조계산 계곡에 흐르는 물속에 수많은 낙엽이 떨어져 맑은 물을 덮고 있었다. 물 위에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70여 년 전 저 낙엽처럼 조계산에 떨어진 사람들은 얼마일까? 다시는 이 땅에 이념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송광사에 가을이 무르익었다. 70여년전 낮이면 토벌대가, 밤에는 산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했을 송광사의 가을도 이랬을까? 물위로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죽어갔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 오문수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조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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