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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위협하며 끌고 가는 남자,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교제살인' 관련 기사를 읽고 떠올린 그날의 기억

등록 2020.11.14 19:34수정 2020.11.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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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천호동에서 술 마시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가 여자를 강제로 끌고 가던 남자 신고한 적 있잖아. 기억나?"


단체 카카오톡방에서 친구는 불현듯 10년도 더 지난 천호동에서의 기억을 소환했다. '교제살인'에 대한 이수정 교수와의 문답을 담은 기사를 내가 채팅창에 막 공유한 뒤였다.(이수정 "여자들은 '정의가 없다'고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http://omn.kr/1ovgb)

기사는, 우리가 흔히 '데이트폭력'이라고 칭해오던, 서로 사귀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 그 중에서도 특히 살인에서 데이트라는 서정적인 단어를 지우고 '교제살인'으로 부르겠다는 선언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수정 교수는 성격상 '예고된 살인'으로 볼 수밖에 없는 범주의 교제살인 피고인들에 대해 수사 단계부터 판결에 이르기까지 우리 법체계가 얼마나 관대한지, 피해자의 그간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는 또 얼마나 힘든지를 꼬집고, 그러는 동안 법원의 판결에는 "피해자의 고통은 없어지고 가해자의 반성만" 남고 있다고 성토했다.

1999년 처음 발의되었던 스토킹 처벌법이, 21년간 발의만 됐지 단 한 건도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기사 내용은 실로 한숨만 나오게 했다.

소환된 10여 년 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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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과 술집 등이 밀집한 골목 ⓒ 연합뉴스

 
그리고, 나와 친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10여 년 전 천호동 밤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어울려 지내던 우리는 대학에 간 이후에도 종종 모여 카페에 가고 술자리를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우리가 곧잘 가던 천호동에 모여 술 한 잔씩 하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가, 느지막한 시간 버스를 타러 백화점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때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연인쯤으로 보이는 남녀가 서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꽃이었는지 케이크였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선물쯤으로 보이는 것이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고, 여자는 주눅 든 듯 고개를 숙이고 별 말 없이 서있었다.

그 곁에 선 남자는 씩씩거리며 부러진 우산대를 흔들어 가면서 여자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말소리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맘대로 되지 않아 분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처럼 보였다.

또 기억나는 건,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남자의 행동이 분명히 눈에 도드라지는 상황이었는데도,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거나 함께 쳐다보거나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껴져서 집에 갈 생각도 잊고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그 둘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남자는 거칠게 여자를 잡아채고는 걷기 시작했다. 끌려가듯 걷고 있는 여자는 소리를 지르거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우리들 외에는 그 두 사람에게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도 없어 보였다. 만약 있었다면, 그들도 곁눈질을 하고 있었을까.

남자가 여자를 끌고 향한 곳은 먼 데 있지 않았다. 여자를 닦아 세우고 있던 자리에서 불과 십여 미터나 떨어졌을까 싶은 거리에 있던 여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막아 볼 생각도 못하고 황망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던 우리들은 상의 끝에, 인근 지구대에 가서 우리가 본 것과 여자가 끌려들어간 여관의 이름을 말했다.

경찰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피해자가 직접 신고한 것도 아니고, 또 결국은 자기 두 발로 걸어간 일에 대한 것인 만큼, 뭘 어쩌라는 건가 하는 반응이었다. 연인끼리 그런 경우는 어차피 가봐야 별일 아니라는 말만 듣고 돌아선다는 말도 했다. '그래도 한번 가서 봐 달라'는 우리의 부탁에 결국 경찰은 가보겠다고 했고, 경찰이 여관으로 가는 걸 본 것까지가 내게 남은 기억이다.

더 정확히는, 그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까만 창밖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던 질문들까지가 내게 남은 그날의 기억이다.

'경찰이 정말 갔을까. 가서 이름도 모르는 그 두 사람을 정말 찾아냈을까. 정말 그랬다면, 여자는 경찰에게 뭐라고 했으려나. 도와달라고 말을 했을까...'

그리고, 오늘의 나는 이런 질문들을 되뇌고 있다. 

'그날 여자는 왜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혹시, 어차피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소리 지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데이트폭력 #교제폭력 #이수정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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