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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부터 성폭력 피해자다움 해체까지... 사진이 말하다

혜영 작가의 첫 개인전 '몸들의 말하기'를 관람하고

등록 2020.11.15 11:45수정 2020.11.1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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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유행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사람들 사이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거리 두기는 일상이 되었다. 늘 사무실로 출근하던 사람들이 꽤 긴 시간 재택근무를 하기도 했고 카페와 식당에는 칸막이가 생기거나 의도적으로 비워두는 자리가 늘었다.

변화는 문화·예술 분야도 피할 수 없었다. 관람 시간만 지키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전시장은 예약을 통해 시간별로 한정된 인원만 입장이 가능해졌다. 공연도 좌석 간 거리 두기를 하거나 아예 드라이브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생겼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거리두기의 제한이 아예 없는 공간에서 전시와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인터넷을 통해 문화를 즐기는 것은 이미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이 든 나의 아버지는 TV가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 야구 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새 앨범으로 복귀한 가수 카일리 미노그는 온라인을 통해 표를 팔고 사전녹화 된 공연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에도 꼭 오프라인에 모여야 할까. 하다못해 공연은 특유의 현장감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는? 만약 로드뷰 서비스처럼 전시장을 3D로 재현해 모니터를 통해서도 현장을 직접 걷듯 전시를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특히나 VR까지 상용화된 시대에 직접 전시장에 가는 것과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전시를 보는 것의 차이가 과연 있을까.

종이와 모니터로 이미 본 사진, 실제로 보면 무엇이 다를까?
 

'몸들의 말하기' 전시 포스터 ⓒ 은평문화재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이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금 알게 된 계기도 있었다.
  
얼마 전 사진작가 혜영의 첫 개인전 '몸들의 말하기'를 관람했다. '몸들의 말하기'는 문화 및 예술 운동 활동가이자 사진작가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작가 혜영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다. 한국여성민우회와 함께 진행했던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배틀그라운드269(Battleground269)', 성폭력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제동을 거는 프로젝트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 그리고 1인 가구 여성들의 삶을 다룬 '1들의 증명'이 그 작업물들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강제된 지역해체로 정체성을 상실한 공간으로서의 몸을 다룬 '은평NEW타운'과 장애와 아픔을 경험한 몸을 드러내는 '자화상 사진'도 함께 전시되었다.

사실 나에게 작가 혜영의 작품들은 친숙한 편이다. 특히나 한국여성민우회와 함께 진행했던 세 개의 프로젝트들(배틀그라운드269,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 1들의 증명)의 경우 나는 이미 그 작업물들을 인쇄물이나 인터넷 페이지를 통해 먼저 만나기도 했다.


특히 낙태죄 폐지 운동이 활발했던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다양한 집회와 시위 그리고 강연 현장에서 '배틀그라운드269' 프로젝트가 남긴 기록은 피켓이나 전시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전시장을 향하는 나의 머리에는 그런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과연 그곳에서 볼 혜영의 사진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종이와 휴대전화 액정 속에서 볼 때와 어떻게 다를까.

일방적인 관람 거부하는 '몸들의 말하기' 전시 사진들   

Battleground269 ⓒ 혜영


  
전시회장에서 만난 혜영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사진의 인화와 조명의 배치에도 많은 신경을 썼음을 이야기했다. 그러한 노고 덕분인지 전시 공간에서 만난 사진들은 온라인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가령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얼굴과 몸을 담은 '배틀그라운드269'의 경우 모델들이 가진 살이 튼 흔적과 피부의 결이 느껴질 정도로 사진이 아주 생생하게 인화되었다. 그러한 사진들을 스크롤을 내리면서 빠르게 보는 게 아니라, 차분히 걸음을 옮기며 따로따로 전시실의 조명 아래에서 마주할 때 나는 모델들과 독대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그들이 드러낸 몸과 렌즈를 넘어 전달되는 시선들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건 단순한 관람이 아니었다. 오직 나의 시선만이 사진에 가닿는 일방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사실 '배틀그라운드269'가 가진 이러한 개성은 프로젝트가 발을 디딘 낙태죄 폐지 운동의 목표의식과도 아주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 수단이자 대상으로 여겨왔고 그래서 달라지는 목적에 따라 임신중단을 오히려 장려하거나 혹은 처벌해 왔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주요한 의의 중 하나는 여성의 몸이 이렇게 대상화 혹은 수단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전시장에서 만난 '배틀그라운드269' 사진 속 모델들도 단순히 시선의 대상이나 객체가 되기를 거부한다. 강한 의지를 담고 있거나 혹은 이 정도의 억압에 굴하지 않겠다는 여유를 담은 모델들의 시선은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강한 에너지와 함께 도달한다. 한마디로 사진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누군가는 이 사진을 보며 움찔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용기를 얻을 것이다.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 ⓒ 혜영


  

1들의 증명 ⓒ 혜영



혜영 작가의 사진이 가진 이러한 힘은 전시된 다른 두 개의 프로젝트인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과 '1들의 증명'에서도 빛을 발한다.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이 다루는 '성폭력 피해자다움' 역시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정형화에 가두는 극도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며, '1들의 증명'이 다루는 1인 가구 여성의 공간도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는 독립적인 생활 공간이 아니라 성적 환상을 투영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의 사진에서 모델들이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듯 관객들을 응시하는 행위와 '1들의 증명' 속 공간들이 각양각색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자는 일방적인 시선을 되받아치는 방식으로 후자는 정형화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각각 억압과 차별의 근간이 되는 '대상화'와 '객체화'에 대항한다.

소외된 이야기가 더 밀려나지 않게, 닻이 되는 사진

마지막으로 '몸들의 말하기'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작업물은 바로 혜영 작가가 개인의 질병 경험을 담은 '자화상 사진'이었다. 이 작업의 구성은 특이한데 혜영 작가의 자화상과 투병 과정에서 작성했던 메모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혜영 작가의 메모에는 본인을 담당하는 교수, 그 사람이 내린 진단과 설명한 치료 과정, 보험 처리 방식 등 '의료 절차'에 관한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동시에 아무도 자신에게 채식 여부를 묻지 않아 눈을 질끈 감고 닭고기를 먹었던 경험, 아픔 속에서 그리고 회복하는 중에 가졌던 생각과 느낌도 함께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질병의 경험을 '의료적 조치'와 '회복'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누가 아프면 그 사람이 무슨 병에 걸렸고, 어떤 치료를 받았으며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이야기는 미디어에서 질병을 다룰 때도 반복된다. 하지만 질병과 장애를 통과하는 몸의 경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픈 사람 역시도 채식주의자지만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어야 할 때의 심란함을 느낄 수 있다. 몸은 단순히 아팠다가 회복되는 게 아니라 이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복잡한 감정과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혜영의 메모는 우리에게 단순화되지 않은 아픈 몸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은평NEW타운 ⓒ 혜영



그리고 혜영 작가가 메모를 통해 공유한 이야기는 자화상 사진과 함께 완성된다. 말은 쉽게 무시할 수 있을지라도 사람의 존재를 그렇게 하긴 어렵다. 마치 메모 속의 이야기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아픈 경험의 중요한 일부라는 듯 혜영 작가는 전신을 드러낸 자화상 사진 속에서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관객을 응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이야기를 실제로 경험한 몸을 마주할 때, 혜영이 쓴 메모 속 이야기는 정말 피와 살과 부대꼈던 생생한 일로 다가오게 된다. 이야기가 실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혜영 작가의 자화상은 소외된 경험이 더는 밀려나지 않게 내려진 닻과 같다. 메모가 이야기의 문을 연다면 사진은 강렬한 마침표를 찍는다.

글의 시작에서 나는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이 중계가 가능한 시대에 과연 전시장을 직접 찾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를 질문했다. '몸들의 말하기'가 전한 답은 사진을 직접 관람하는 일이 단순히 일방적인 응시가 아니며 결코 정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사람을 직접 만나듯이 실제의 공간에서 세심하게 배치된 실물의 사진을 만났을 때, 그때에만 벌어지고 그래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특히나 '사회가 보이지 않게 만든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전시의 목표만큼이나 강력히 관람자에게 말을 거는 '몸들의 말하기'의 사진들은 아주 훌륭하게 그 일을 해냈다.

'몸들의 말하기'는 오는 11월 21일까지 은평문화회관에서 열린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중한 전시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혜영 작가의 다음 개인전을 고대한다.
#혜영 #몸들의 말하기 #페미니즘 #사진 #은평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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