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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캐지 못한 광맥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79회] 아쉬움을 덜고자 광맥에서 주운 몇 대목을 소개한다

등록 2020.11.17 18:29수정 2020.11.1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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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그의 책 어느 쪽을 펼쳐도 금빛이 나고 생동감이 넘치는 경세의 문장이다.

500여 개에 이르는 책의 이정표를 찾아다녀도 범인의 생로는 모자란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광맥을 그냥 차밭(茶山)으로만 알고 스쳐지난 것 같다. 아쉬움을 덜고자 광맥에서 주운 몇 대목을 소개한다.

유배지에서 아들 학연에게 준 「두 개의 저울」이다. 짧은 글에서 이보다 더 '사회정의론'을 논술한 논설이 어디 있을까 싶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시비(是非)의 저울이고, 하나는 이해(利害)의 저울이다. 이 두 가지 큰 저울에서 네 가지 큰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로움을 얻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로움을 입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릇됨을 따라가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려다 해로움을 입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릇됨을 따라가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다. 가장 낮은 것은 그릇됨을 따르다가 해로움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주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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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저작물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 곽동운

 
그가 500권의 책을 쓰면서 한글로는 시 한 편도 쓰지 않았다고 앞에서 '타박'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말의 가치를 살리고자 무척 애썼다. 

다산은 우리 속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이담속찬(耳談續纂)』을 편찬할 만큼 백성의 언어와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시에는 우리말을 사용한 것이 여럿 있다.

「탐진어가(眈津漁歌)」에서 '높새바람'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높다'와 '새', '바람'을 합쳐 '고조풍(高鳥風)'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흰 파도'를 '까치파도(작루鵲漊'로, '보릿고개'를 '맥령(麥嶺)'으로, '새색시'를 '아가(兒歌)'로, '마파람'을 '마아풍(馬兒風)'으로 쓰는 등 비록 한자지만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애썼다. (주석 12)


정약용은 어떤 형의 얼굴에 몸집은 어떠했을까, 월전 장우성이 그린 표준 영정 등 근엄하게 생긴 초상화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초상화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약용 본격 연구의 첫 테이프를 자른 최익한의 스케치다. 


신빙할 만한 전언에 의하면 선생은 체구가 중인(中人) 이상으로 장대하였다고 한다. 「자찬묘지명」에는 "어려서 매우 영리하여 자못 문자를 알았다."라 하였을 뿐이고 강진 유배 중에 지은 「칠회(七懷)」시 중 「조카를 생각하며」에 "체구는 나를 닮아 건쟁하려무나"라 하였으나, 이것을 보면 선생의 장대(長大)는 전언(前言)과 상합한 것이다.

선생이 지은 「선중씨先仲氏(若銓)묘지명」중에 정조가 일찍이 약전을 보고 형의 준위(俊偉)가 동생의 무미(娬媚) 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선생은 구간(軀幹)이 석대(碩大)한데다가 자태가 거칠지 않고 아름다웠던 것을 족히 알 수 있다. (주석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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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이상명

 
또 다른 연구가의 스케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몸집과 풍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몇몇 자료로 어림짐작해 본다면, 그는 몸집이 큼직한 데다가 자태가 거칠지 않고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 마마를 앓기는 했으나 곱게 지나가 얼굴에 한 점 흔적이 없고 다만 눈썹부위에 손티로 인하여 눈썹이 조금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눈썹 세 개 달린 사람, 곧 삼미자(三眉子)라 일컬었다. (주석 14)

자기를 알아주던 채제공과 정조 그리고 이벽과 둘째형 정약전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백 세 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고자" 사암(俟庵)이라 아호를 짓고 글쓰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지기(知己)들은 모두 가고 그나마 책이라도 전할 사람은 두 아들 뿐이었다. 

나는 천지 사이에 외로이 서 있다. 여기에서 의지하고 생명으로 삼고 있는 것은 오직 문필이다. 너희들이 만약 글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의 저서는 쓸 데 없을 것이고 나의 저서가 쓸데없으면 나는 이것을 애써 지을 필요가 없으며 앞으로는 사색을 멈추고 멍청이처럼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단 열흘을 못가서 병이 날것이며 병이 나면 그것을 고칠 약은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글을 읽고 따라서 나의 저서를 읽어준다는 것은 곧 나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냐? 너희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라. (주석 15)

              정다산의 절규

 삼경 지나 담 머리에 달은 지는데
 어두운 죽란 뜰에 풀벌레도 울며 샌다(「죽란시사」7월 8일)

 산하는 옹색하여 3천리도 못되건만
 당파싸움 풍우 속에 2백 년을 넘기누나「유흥(遺興)」.

 백년 두고 조야 정객 정론이 없고
 천리강산 백성들은 슬픈 노래 뿐「증오우국진(贈吳友國鎭)」

 수영 앞 아전놈은 두둑히 뇌물먹고
 대낮에 연못가에 취해서 누워지네.「고시(古詩)」

 들에는 푸른 풀포기도 하나 없는 적지(赤地) 천리인데
 유랑민은 길바닥에 가득 메워서 가엷어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지만 나라정치 이를 봐도 대책이 없구나 「전간기사서(田間紀事序)」 (주석 16)
  

주석
11> 정민, 『다산의 재발견』, 458쪽, 휴머니스트, 2011.
12> 최성수 외, 「실학사상의 지평을 넓히다 - 정약용」, 『우리역사의 주체적 인물』, 19쪽, 북피아, 2007.
13> 최익한, 앞의 책, 95~96쪽.
14> 신동원, 앞의 책, 101~102쪽. 
15> 북한 과학원 철학연구소가 탄생 200주년 기념논문집으로 펴낸 『다산 정약용』의 표지에 실린 글.
16> 김지용, 앞의 책, 뒷 표지.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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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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