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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가들의 평가와 선생의 당부말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80회] 마무리글

등록 2020.11.18 17:55수정 2020.11.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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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감당하기 어려운 탐방길이었다.

다행히 선학들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둘래길)가 있음으로 하여 그나마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었다. 깊숙한 광맥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놓친 부분이 적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무변이라 계속하여 탐방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그냥 마무리하기가 서운하여 전문 연구가들의 촌평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면하고자 몇 편을 골랐다. 말이 '촌평'이지, 역시 '고수'들이라 천금의 무게를 지니는 논평이다. 마지막 부문 2편은 정약용 선생이 사대부(지식인)들과 자식(후생)들에게 당부한 말씀이다.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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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다산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흠흠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더불어 다산의 '일표이서' 중 하나이다. ⓒ 김병현

  정약용은 재주와 학문이 일반 사람에 비해 뛰어나 역사ㆍ백가ㆍ천문ㆍ지리ㆍ의약 등의 서적을 두루 통달했으며, 13경에 대해 밝혀놓은 자신의 학설이 있다. 그가 저술한 책이 집에 가득 차 있는데, 가령 『흠흠신서』 『목민심서』는 옥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맡은 사람들을 위해 유용한 글이다. 추사 김정희와 비교해도 재주가 높고 실학이 뛰어날뿐더러 우리나라 근세에 제1인자일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기효람, 원운대의 아래에 세우면 불만일 것이다. (홍한주, 『지수염필』)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보수적 도학의 전통의식과 부패한 세도정치의 그늘 속에서 만년에 이르도록까지 불우하였지만, 그의 사후 그의 사상은 더욱 밝게 빛나며 우리 시대가 부딪히고 있는 끝없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풍부한 지혜로 조명해 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사후 19세기 말 고종의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다시 세상에 빛을 내게 되었다. 20세기 초 박은식ㆍ장지연 등 계몽사상가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0주년이 되는 1936년 그를 재평가하면서 실학사상을 민족사상과 근대사상의 발단으로서 본격적으로 재발견하게 되었다. (금장태, 『다산 정약용』).
 

정약용 선생 상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에 있는 정약용 선생 상 ⓒ 위전환

 
그러면 다산이 이상한 새 나라는 그 내용이 어떠하였는가?

그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인민의 평등 권리에 기초한 민주제도며 경제적으로는 재산 균등과 노동 균등에 기초하여 착취와 피착취가 없는 행복한 인민 생활이었다. 이 점들에서 다산의 「원목(原牧)」,「탕론(湯論)」등 민권론은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서로 통하였으며 또 「전론(田論)」 7장에 표시한 만민개로(萬民皆勞)의 이념은 생시몽의 '제네바서한'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다산이 이상한 새 사회는 소박한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 공상적 공산사상을 포함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당시 반봉건적 사상계에서 실로 거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오호 다산! 그는 실로 무(武)의 이충무공과 겸칭할 문(文)의 제1인자이요. 그 일신의 조제(遭際)에서 조선민의 운명을 반영하였다고 하겠다. (안재홍, 「다산선생의 대경륜 - 조선건설의 총계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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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다산 정약용의 사상. 백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근세조선의 유일한 정법가(政法家)이다. 아니 상하 오백년에 다시 그 쌍(雙)이 적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 일인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사(朝鮮史)의 연구요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심혼(朝鮮心魂)의 명예(明翳) 내지 전(全) 조선성쇠존멸(朝鮮盛衰存滅)에 대한 연구이다. (정인보, 「유일한 정법사상가 정약용선생 서론」.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을 통해 잘 알려진 것처럼, 다산의 철학 체계에는 여러 갈래의 사상적 경향들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서학, 고대유학, 훈고학, 양명학, 고증학, 일본 고학(古學), 퇴계 혹은 성호학풍, 그리고 심지어는 다산 자신이 그토록 강하게 비판했던 주자학적 요소까지. 다산의 탁월한 안목은 이런 다양한 관점들을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체계 속에서 하나로 융합시킨 데서 빛을 발합니다.

나는 다산의 진정한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대의 주요한 사상적 경향들을 비판적으로 숙고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서양에서 칸트나 헤겔이 위대한 종합의 천재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사적 지위를 가진 것처럼 말입니다. 다산 당시의 중국과 일본, 어느 곳을 살펴보더라도 다산 정약용에 견줄 만한 수준 높은 학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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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어록비 ⓒ 이승철

 
다산은 한국 문화, 사상의 바다다. 스물 둘 약관의 나이로 출세, 옥당(玉堂)에 들어 정조 임금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도모하고 암행어사로 목민(牧民)의 현장을 두루 살폈던 다산은 마흔 살 때 땅끝 강진 앞바다에 유배돼 내던져졌다. 불혹의 나이에 쓸쓸한 바다에 갇힌 다산은 이후 죽을 때까지 35년간 동양고전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현실 개선책을 연구하고 시를 지었다. 이렇게 지은 한 수레의 책은 한국, 나아가 세계 사상, 문화 전반의 바다를 이뤘다. 그 바다는 언제나 새롭게 파도치며 오늘의 이 답답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확 터진 안목으로 조망하고 개혁할 수 있는 혜안을 던져 주고 있다. (고승제, 『다산을 찾아서』).

다산 없는 제자나 제자 없는 다산은 어느 경우든 상상하기 어렵다. 다산은 초당 정착 초기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자들에 대해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온 몸에 뒤집어 쓴 것은 온통 쇠잔한 기운뿐"이며,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아 "쪼아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낱알에 대주어서 주둥이와 낱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이라고까지 말했다. 도대체 다산은 그들을 어떻게 가르쳐서 조선 학술사에서 달리 유례가 없는 놀라운 학술집단으로 단기간에 변모시켰을까? (정민, 『다산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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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릴 날을 앞두고 강진생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 ‘정석(丁石)’. 다산초당 왼편에 있다. ⓒ 이돈삼

 
다산은 전 생애를 통해서 이 병들고 썩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강구하는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현실에 활용하면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혁안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게 바로 다산의 개혁사상이요 실학사상이다. 공렴한 공직자들이라면 바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통찰력이 예리한 목민관으로서 다산은 인권과 사회 보장의 선진적인 조치들을 강구했다. 그야말로 과거에 급제한 뒤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공직자로서의 '공렴(公廉)', 즉 공정ㆍ공평한 행정을 위해 청렴 정신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목민관이었다. 그의 지행일치는 평생을 관통하는 행동 철학이었다. "몸소 행하여 증명해야 드러나고 빛나게 된다오."(「자찬묘비명」) 실천에 옮기는 행동만이 학문의 근본 목적이라던 그의 철학은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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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 동상 다시 정약용 선생에게로... 만약 다산 선생이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크게 서릿발 같은 큰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 곽동운

 
사대부의 마음가짐이란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도록 털끝만큼도 가리운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이나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것을 흔연히 저지르지 않는다면 저절로 마음이 넓어지고 몸에 안정감이 나타나 호연지기가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정약용, 「삼관기(三官記)」).

내가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여 전원조차 너희들에게 물려 주지 못하니 다만 두 글자를 부적(神符)처럼 마음에 지니어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너희들에게 물려 준다.…… 한 글자는 근자(勤字)이고 또 한 글자는 검자(儉字)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동안 쓰고 써도 다 못 쓰는 것이니라. (정약용, 「삼관기」).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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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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