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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빛나면 씨앗은 싹트는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 1회] 내가 홍암 나철 선생 평전을 쓰는 이유

등록 2020.11.19 09:21수정 2020.11.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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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홍암 나철은 한국병탄이 눈 앞에 다가온 1909년 8월 5일 단군교를 대종교로 중광하고 항일전선에 나섰습니다. 오늘부터 '김삼웅의 인물열전'은 잊혀진 종교, 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암 나철 평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기사는 그 첫회입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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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 wiki commons

 
(1) "태양이 빛나면 씨앗은 싹트지 않을 수 없다." (에이브러험 링컨) - 우리나라를 비추는 태양이 덜 빛나서일까. 튼실한 씨앗이 뿌려지고 그 어둠 속에서도 나름 빛이 났는데, 정작 빛이 들어오고(광복) 난 뒤에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지체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씨앗'도 '텃밭'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2) '씨앗의 텃밭'에 들어왔던 분들을 톺아본다. 김교헌ㆍ서일ㆍ윤세복ㆍ백순ㆍ이상설ㆍ이동녕ㆍ신규식ㆍ조완구ㆍ이시영ㆍ조성환ㆍ박은식ㆍ황학수ㆍ김승학ㆍ홍범도ㆍ신채호ㆍ김좌진ㆍ이범윤ㆍ김동삼ㆍ이범석ㆍ안희재ㆍ여준ㆍ박찬익ㆍ유근ㆍ정인보ㆍ명제세ㆍ김규식ㆍ이상룡ㆍ조소앙. (입교 순)

(3) 씨앗의 주인공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 농성하면서, 조선침략의 원흉들에게 흉계를 중단할 것을 엄중하게 힐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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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으로 살았던 나인영(좌)과 종교인으로 살았던 나철(우)은 두 인생을 살았던 동일인이다 ⓒ 서정일

 
(4)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후 다시 도일,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조선침략을 규탄하고, 숙소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서 단군교를 대종교(大倧敎)로 중광(重光)하였다. 단군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단군교를 단순히 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면서 역사적ㆍ사상적인 이론으로 새롭게 정립(중광)하였다.

(5) 1910년 국치 직전 만주에 대종교 포교활동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국치 후에는 망명하여 백두산 기슭 청파호 인근에 교당을 설치, 본격적인 포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종교 활동을 독립운동과 연계하였다. 

(6) 『신리대전』, 『삼일신고』 등 대종교의 경전을 저술하거나 간행하고, 국학의 뿌리인 한글의 중요성을 고취하며 교도와 교민들에게 한글 사용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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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선생 예언시 ⓒ 이승철

 
(7) 54세 되는 해(1916년) 음력 8월 15일 단군교의 성지 구월산 삼성사에서 대종교의 제천 의식인 선의식을 올리고 유서를 남긴 채 순명한다. (유서 내용 한글 풀이)

     을유년(1945)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ㆍ자유의 극한 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니
     마침내 백두산의 밝달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
     공산ㆍ자유의 대립파멸을 막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리라.


(8) 이상룡ㆍ박은식ㆍ김교헌ㆍ신채호ㆍ정인보ㆍ문일평ㆍ안재홍 등 민족사학의 뿌리는 대종교의 '텃밭'에서 기원하며 (2)에서 열거한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입교한 분들이었다. 따라서 대종교는 우리 민족사학과 독립운동의 텃밭이었다. 


(9) 그의 사후이지만, 1918년 11월 만주 길림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는 망명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되었다. 대종교의 중광단 인사들이 중심이었고 대종교 신봉자 조소앙이 집필하였다. 한일합방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정의의 칼로 나라를 훔친 적을 도결(屠決)하여 운명을 개척하자"고 '육탄혈전'을 선언했다. 중광단의 맥을 계승한 북로군정서는 육탄혈전의 정신으로 청산리대첩을 이루었다. 

(10) 일제는 대한제국 병탄 후 유독 동학과 대종교를 불법화하면서 대종교를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일본에 반발하여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일본에 적개심을 일으키는 종교요,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여 국권회복의 선봉기수가 될 위험이 있는 단체"로 몰아 국내 포교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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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11)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하이에 수립할 때 주역인 의정원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들이었으며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규정한 19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의 주역들 역시 대종교인들이었다. 

(12) 을사늑약 직후 동학 3대교주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의 선두에 나서고, 홍암 나철이 한국병탄이 눈 앞에 다가온 1909년 8월 5일 단군교를 대종교로 중광하고 항일전선에 나선 것은, 국난기에 대처하는 우리 민족종교의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이 부분에 이르면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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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동상' 평화공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동상' ⓒ 장래혁

 
당사자들이야 평가받고 대접받고자 나선 일이 아니고, 그것이 식자의 도리이고 정도이고 시대적 소명이기에 행한 것이지만, 역사가 그러해서는 안 된다. 일제강점기 어림 30만 명에 이르던 대종교 교도가 중광의 주역을 포함 10만여 명이 순교당하고, 현재는 4천여 명의 초라한 모습을 유지한다. 

우리는 해마다 10월 3일을 4대 국경일의 하나인 개천절로 기념한다. 이날의 기원은 나철 선생이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그해 10월 3일(음력)부터 해마다 개천절 행사를 거행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이어받았다.

이날은 서기전 2333년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이다. 해방 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어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한다. "태양이 빛나면 씨앗은 싹트는가"를 거듭 묻게 된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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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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