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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보성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 2회] 나철은 하수상한 시대에 박복한 운명을 타고 성장한다

등록 2020.11.20 17:01수정 2020.11.2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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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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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선생 홍암 나철 선생

 
모든 생명체에는 생로병사의 주기가 있듯이, 민족ㆍ국가도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는 계몽군주 정조가 1800년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면서부터 나라의 운세가 크게 기울어졌다.

순조가 33년, 뒤이은 헌종의 14년, 철종의 14년에 이르는 60여 년은 하나같이 군왕이 무능한데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로 나라의 중축이 흔들리고, 승계된 고종과 순종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무능한 군주(집권자)는 나라와 백성에게 범죄자에 다름 아니다. 

노론벽파가 왕비 세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전횡하면서 나라의 어느 한구석도 성한 데가 없었다. 이틈에 서양제국주의 물결이 한반도에 밀려오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1863년 12월 2일(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에서 한 아이가 출생하였다. 나용집(羅龍集)의 둘째 아들이다. 이름을 두영(斗永)이라 지었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무렵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가 체포되고, 한 해 전에는 임술민란이 일어나는 등 전국이 소연하였다. 정치사회적으로 혼란기에 태어난 것이다.

그가 출생하기 4년 전인 1859년 백암 박은식이 태어났다. 두 사람은 뒷날 대종교를 통해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861년 시작된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고, 그가 태어나던 해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나두영은 성장하면서 호는 경전(耕田), 자는 문경(文卿)이라 짓고, 뒷날 인영(寅永) 혹은 인영(仁永)으로도 불렸다.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다시 철(喆)로 개명하고 호를 홍암(弘巖)으로 지었다. 여기서는 편의상 나철(羅喆)로 호칭하기로 한다. 


나철의 가계를 살펴 보면 12대를 올라가서 호당(湖當) 나창(羅昶)이라는 큰 인물이 있다. 비록 12대나 거슬러 올라간 인물이라 하지만 본받을 선조가 있다는 것은 후손에게 매우 소중한 지침이 된다. 나철의 집은 가난했던 것으로 전한다. 지금 금곡 마을에 가보아도 옛날에 부촌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해도 본받을 선조가 있었다는 것은 어린 나철에게 큰 뜻을 갖게 했을 것이다. (주석 1)

1860년대 중반 전라도의 한미한 양반가의 아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 때문인지 뒷날 사회적으로 비중이 있는 인물들의 경우 전설처럼 구전되는 얘기들이 더러 있다. 나철에게도 아버지 나용집의 태몽의 일화가 전한다. 태몽은 대체로 어머니가 꾸기 마련인데 나철의 경우는 아버지의 꿈이다.

천지는 어두컴컴한데, 마을 앞의 제석산 위에서 나용집 선생의 집 지붕 위로 칠색의 영롱한 무지개가 다리를 놓았다. 얼마 뒤 하늘에서는 풍악소리가 울리더니 하늘이 쩍 갈라지고 그 속에서 눈부신 햇빛이 비쳤다. 

그 햇빛 가운데 거룩한 신모(神母)님이 금관에 옥대(玉帶)를 띤 천동(天童)을 안고 제석산으로 내려오셨다. 신모님은 수많은 선녀의 호위를 받으며 무지개를 나는 듯이 걸어서 선생의 집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나용집 선생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주석 2)


한 연구가는 나철이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다고 기술하였다.

"태몽을 증명이나 하듯 나인영은 신동으로 자랐다. 나인영의 돌날이었다.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늘천이라고 하니까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가리키고, 따지라고 하니까 머리를 아래로 숙여 땅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주석 3)

나철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1860~70년대 조선사회는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개혁정책이 시도되었다. 서원과 향현사 등에 토지와 재산을 보고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서원 철폐 정책이 시작되고(1864년 4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세도정치의 근거지였던 비변사를 폐지했다.(1865년 3월). 또 모화사상의 온상이 된 만동묘를 철폐(같은 달) 하였다. 

7월에 만동묘 철폐에 유생 833명이 반대 상소를 한데 이어 11월에는 1,468명의 유생이 같은 반대 상소를 하여 전국이 소연한 가운데 1866년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1871년에는 이필제가 이끄는 동학교도들의 경상도 영해부 습격사건과 신미양요가 잇따랐다. 

1973년 고종의 친정체제가 이루어지면서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이듬해 만동묘를 다시 세울 것을 허락하면서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1875년 운요호 사건,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의 침략 앞에 태풍 속의 촛불의 운명이 되고 있었다. 나철은 하수상한 시대에 한미한 집안에서 박복한 운명을 타고 성장한다. 


주석
1> 박성수, 『나철』, 30쪽, 북캠프, 2003.
2> 앞의 책, 22쪽.
3>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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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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