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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소식 전해듣고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 7회] 빈 손으로 귀국한 나철은 직접 행동을 서둘렀다

등록 2020.11.25 17:03수정 2020.11.2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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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을사늑약.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나철이 도쿄에서 민간외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대한제국의 '보호국화'의 용인을 받아낸 후 흉계를 계속하여 1905년 11월 17일 밤 '강도적 수법'으로 을사늑약을 맺었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국권박탈인 을사늑변은, 그동안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폈던 나철로 하여금 결사항쟁의 길로 나서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을사늑약의 부당성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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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체결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원래 덕수궁 안에 있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궁 밖으로 밀려났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 북서쪽에 있다.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첫째, 일제는 궁궐을 무장 병력으로 포위하고 무장한 일본 주차군사령관 등 무장 군인이 회의장 안에까지 나타나 공포분위기에서 대한제국 측 대표에게는 물론 광무황제에게도 협박이 가해졌다. 따라서 대한제국 측의 자유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였다. 을사늑약은 조약 체결 과정에서 가해진 상대국 대표에 대한 강제만으로도 법적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 외부대신의 관인을 훔쳐 강제로 찍은 것이다. 이토의 지시로 외부대신의 관인을 훔친 사람은 이토의 통역관으로 문서과장을 지낸 마에마 교우사쿠(前間恭作)라는 자이다. 마에마가 훔친 관인을 외부대신 박제순이 찍지 않고 하야시가 조약문에 직접 날인하였다. 훔쳐낸 관인을 마음대로 날인하였으므로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위조된 문서'일 뿐이다.

셋째, 위임 절차가 없었다. 한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는 중대한 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어서 광무황제는 외부대신을 조약 체결의 대표로 위임하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박제순은 황제를 대리하는 대표가 될 수 없었다. 하야시 역시 일왕의 위임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이토는 특명전권대사였을 뿐이다. 위임되지 않은 대리인의 권한 행사는 원인무효가 된다. 

넷째, 조약 내용의 변경절차상의 이상이다. 당초 일본 정부가 만들어서 가져온 초안(별지의 조약)을 두고 대한제국 정부 대신들과 논의 과정에서 추가된 것을 일본 정부나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사전에 전혀 보고받거나 이를 양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현장에서 내용이 바뀌었다. 이것은 조약의 체결에 관한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섯째, 조약에 명칭이 붙지 않았다. 모든 조약은 원칙적으로 조약 내용을 압축하는 명칭이 붙는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강제로 조인되는 과정에서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결국 '명칭 없는 조약'이 되고 말았다. 

여섯째, 최고통치권자가 비준을 하지 않았다. 광무황제는 수차례에 걸쳐 "나의 의지와는 달리 일본 정부에 강요당하였다"고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음을 천명하였다. 오히려 황제는 신뢰하던 미국인 황실 고문 헐버트(Hulbe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양국 사이에서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통보하기 바란다"고 비준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황제는 또 알렌(Allen, Horace Newton) 주한 미국 영사에게 밀지를 내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강요된 조약의 효력 발생을 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영국 『트리뷴』지 더글라스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를 통해 이 조약은 황제가 조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보도하여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하였다. (주석 5)

 

고종의 밀사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밀서외교는 강대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트리뷴,1906.2.8.) ⓒ 이병길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황성신문』이 장지연의「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고,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하는 등 여론이 비등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그러나 아직 을사오적에 대한 증오심을 나타내는 글은 있었지만 처단 등 실행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을 떠나 1906년 초 귀국한 나철은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오기호와 상의하자, 원칙적으로는 찬성이지만 준비가 없이 서두르는 것보다 한번 더 일본에 가서 저들의 반성을 촉구한 연후에 결행하자고 하였다. 동지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1906년 5월과 9월에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가서 일본 정부 요로와 교섭하였는데, 그 중에는 동양평화론자로 알려진 마츠모토(松本雄造)가 들어 있었다. 이어 그의 소개로 유명한 보수 정객 도야마 미쓰루(頭山満)과 오카모토 류노스께(岡本柳之助), 우치다 료오헤이(內田良平) 등을 차례로 만났다. 그러나 이들 일본 정객들은 모두 일제 침략을 찬성하거나 이에 적극 동조하던 인사들이어서 모두가 시기상조니 무어니 하는 애매한 대답만 늘어놓았다. (주석 6)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 그의 논설은 을사늑약 체결의 문제를 대신에게 돌리고 일본에게 펜 끝을 향하지 않았다.(대한매일신문, 1905.11.20) ⓒ 이병길

 
강도적 수법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가 무명의 조선 우국지사들의 호소를 귀담아 들을 리 없었다. 일본의 정객들 역시 같은 통속이었다. 빈 손으로 귀국한 나철은 직접 행동을 서둘렀다.       


주석
5> 김삼웅,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87~88쪽, 시대의 창, 2015.
6> 박성수, 앞의 책, 86~8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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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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