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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이라는 걸 알았을 때 문득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울증이라고요?②] 과소비, 폭발하던 캘린더, 분노로 들끓는 나날이 지나고

등록 2020.11.22 11:42수정 2020.11.2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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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게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사는 날이 늘어갔다. ⓒ 픽사베이


[이전 기사] 신경정신과의 높은 문턱... 실제로 넘어보니 http://omn.kr/1pr2g

약을 먹은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우울감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우울감이 나를 점령할 땐 엎어져서 지냈다면, 슬슬 바깥 활동도 하면서 일상을 되찾아갔다. 일주일에 두 번 요가를 나가고 친구를 만나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저녁이면 가족들 옆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깔깔 웃는 날이 늘어갔다. 기운을 차리고 나니까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나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무슨 재밌는 일 없을까' 갑자기 나를 감싸는 기운이 활기 넘치는 에너지로 바뀌었고 나는 그것이 내가 다 나았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터질 것 같은 에너지, 조증을 의심하다

그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갔다.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운동하는 모임, 책 읽는 모임, 글 쓰는 모임, 함께 작업하는 모임을 한꺼번에 모집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하루에 두 번 나눠서 만났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져서 매일 온라인으로 그림 그리기, 매일 영어로 일기 쓰기 같은 수업을 신청했다. 스케줄이 터져나갈 것처럼 빼곡해졌다. 다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다. 하루가 모자랄 만큼 할 일이 넘쳤고 그것을 소화하느라 매일매일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자꾸 솟아나는지 그 모든 걸 다 해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벌써 새벽 2시냐며 화들짝 놀라는 나날이 이어졌다. 

소비에도 변화가 있었다. 나는 하루를 겨우겨우 살아가는 백수 신분이었는데, 돈을 갑자기 무분별하게 쓰기 시작했다. 사고 싶은 게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카드를 긁어댔다. 내 분수에 맞지 않은 비싼 가방을 할부로 긁고, 한 번에 20만 원어치 책을 사고, 다이어리와 스티커 같은 문구류를 몇십만 원어치씩 사고, 충동적으로 향수를 구매했다. 아무도 나를 말릴 수가 없었다.

외식하러 갔을 때도 가격 보지 않고 마음껏 아무렇게나 먹었다. 그런 나를 보고 친한 지인은 돈을 아껴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넌지시 물었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났다. 내가 알아서 해. 누가 나를 제지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돈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고, 막상 갖고 나면 급격하게 흥미가 떨어졌다. 그럼 어김없이 또 갖고 싶은 것이 생겼고 이 모든 것을 무한 반복했다. 

그때는 곧 터질 것 같은 에너지가 내 안에 잠재된 것만 같았다. 그 에너지는 바깥으로 분출이 안 되어서 나를 옥죄고 있었다. 빼곡한 스케줄을 끝마친 새벽이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샀고 서서히 환멸감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긴 했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도, 상담을 가서도 사실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이렇게 돈을 쓰고 다녔냐며 비난받을 것 같았다.

그것보다 이게 원래 내 성격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항상 이렇게 일 많이 벌리고, 감당 못 해서 널브러지는 성격. 갖고 싶은 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성미. 이번에도 그런 것뿐이라고 나를 위로하며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 잠재된 에너지는 독 같았다. 

책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한겨레출판)에서는 조증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조증기 환자는 충동적인 투자와 사업을 벌이거나 과도한 쇼핑, 어마어마한 술값 등으로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입기도 한다. (206쪽) 

이 책을 읽고 처음 조울증에 대해 알았다. 막연하게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을 조울증 환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과한 소비력과 강한 자신감, 엄청난 추진력과 에너지를 보이는 상태도 조증의 증상 중 하나였다. 그때 지난 몇 주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어쩐지 남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조울병의 증상
 

아빠랑 닮은 얼굴이 되자 아빠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 픽사베이

 
결국 병원에 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스케줄이 너무 많은데, 그게 저를 죽일 것만 같아요. 돈도 너무 많이 쓰고요. 누가 못쓰게 하면 화가 나요."

흥분해서 숨도 못쉬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님은 그건 조증이라고 설명했다. 맨 처음 병원을 찾아 갔을 때 내 상태는 극심한 우울기였고 지금은 조증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이었다.

"약을 조정해드릴게요. 두가지만 주의하세요. 돈을 쓰지 마시고, 말을 조심할 것."

막상 조울증이라는 것을 진단받고 나니 내가 조울증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병명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 안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조울증 환자라니. 우울증은 좀 더 익숙한 데 반해 조울증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병이라서 그랬을까.

치료도 쉽지 않을 것만 같고, 괜히 정신병력이 심각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누군가 나를 오락가락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사회에서 배제당하는 상상을 했다. 내가 진짜 그런가. 혼자 절망감에 빠져서 병명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것 또한 감정이 요동치고 있는 거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말을 조심하라고 한 이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쉽게 화가 났다. 그 화살은 가족에게 날아갔다. 방 청소하라는 사소한 말도 내게는 엄청난 자극제였다. 아무 이유 없이 쉽게 흥분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족들과 싸움이 잦았다. 나를 그냥 제발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먹으라는 잔소리, 좀 움직이라는 잔소리, 씻으라는 잔소리에 악을 질렀다.

엄마가 힘들다는 하소연도, 아빠가 아프다고 끙끙 앓는 소리에도 귀를 막고 내방에서만 틀어박혀 지냈다. 나는 지쳤다. 혼자 가는 병원, 혼자만 알아야 하는 병명, 몰래 삼키는 알약이 버거웠다. 내가 왜 이러는지 가족들한테 설명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외로웠다.

나의 이야기를 할 상대가 생겼다

불현듯 내 모습이 아빠랑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 화가 날 때면 눈알을 굴리는 모습, 자신의 분노에 자신이 타들어 갈 것 같이 위태로운 모습. 7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빠를 우리는 서서히 외면하기 시작했다.

죽는다고 협박하면 감흥 없이 인상을 찌푸리고, 맨날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다며 등을 돌렸다. 그럴수록 아빠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더 오래 방에 누워 있었다. 아빠는 그때 사실 외로웠던 걸까. 아빠랑 닮은 얼굴이 되자 아빠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나는 그 사실이 불편해 내 방에서 몸을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울증약은 감정 기복을 잦아들게 했다. 좋은 일도 뛸 듯이 기쁘지 않게 하고, 그만큼 절망도 깊지 않았다. 한동안은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져 나 자신을 잃은 것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쉽게 감응하고, 작은 일에도 과장하며 좋아하던 내가 사라진 것이다. 선생님은 원래 그 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며 익숙해질 거라고 했다.

충동적으로 소비하려는 습관과 화가 나는 것은 쉽게 잡히지 않아서 약이 한 알 더 추가됐다. 약이 작용하는 방식은 온몸으로 느껴졌다. 몸의 감각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어 할 때는 약이 내 몸을 억지로 끌어 올리는 것 같고, 몸이 고양된 상태로 가고 싶어 하면 약이 내 몸을 억지로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감각과 감정이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기 위해 삐걱거리며 조절되고 있었다.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데 약이라는 방패가 없었다면 내 몸은 맥없이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조울증 진단을 받은 H를 만났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요즘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약 부작용을 겪진 않았는지, 조증 때 무슨 증상을 겪었는지 끝없이 이야기했다. '나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구나' 서로 공감하며 위로했다. 그날 오랜만에 외롭지 않았다.

내가 '비정상'으로 보일까 봐, 이해받을 수 없을까 봐 항상 꼭꼭 숨기 바빴던 나의 이야기를 속 시원히 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데, 그동안 조울증에 너무 압도되어 살았던 건 아닐까. 정신질환은 숨기고 은밀한 영역으로 가둘수록 오히려 그 병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나도 내 병을 긍정할 때가 온 것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와 H 같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는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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