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모른다고 해외여행 안 나가나? 청각장애인도 마찬가지"

25개 자치구에 '농어인 쉼터' 만드는 서울시, "코로나19라고 집에만 있으면 무료"

등록 2020.11.19 13:01수정 2020.11.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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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송파구수어통역센터 및 농아인쉼터에서 석승모 센터장(오른쪽)이 남진우 수어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손병관


"수화통역사의 도움 없이 직접 대화를 해보시겠습니까?"

17일 오전 인터뷰 도중 남진우 수어통역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기자가 순간 움찔했다.

인터뷰 상대는 송파구수화통역센터의 석승모 센터장. 올해 나이 63세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청각을 잃은 사람이다. 서울시는 25개 자치구마다 수화통역센터를 두고 있는데, 송파구의 경우 2000명 안팎의 청각장애인들이 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다.

석 센터장이 태어난 1950년대까지만해도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이 높지 않아서 영유아들이 선천성 장애를 앓아도 마땅한 치유 방법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선천성 장애인과 사고 등으로 청력을 잃은 후천성 장애인의 비율은 6 대 4 정도라고 한다. 석 센터장이 태어날 무렵의 격차는 9 대 1까지 벌어졌지만, 의술의 발달로 수술을 거쳐 언어를 습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 역시 2008년 송파구 농아인협회 지회장을 맡기 전까지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 비슷한 처지의 청각장애인들을 모아 막노동을 하거나 보청기 관련 사업 등을 하며 생계를 영위했다.

그런 그에게 수화통역센터가 생기기 전에는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냐고 물어보려니 머릿속이 막막했다.

기자가 필담을 하려고 '센터장'이라는 단어를 종이에 무심코 쓰는 순간 남진우 통역사가 주의를 줬다.


"단어만 적으시면 안 됩니다. (청각장애인에게) 하려고 하는 말을 일일이 다 쓰고, 존댓말도 다 써야 오해가 안 생깁니다."

기자가 "수화통역센터가 생기기 전에는 센터장님은 어느 곳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었나요?"라고 또박또박 쓴 글을 보고서야 석 센터장은 현란한 손짓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가족들은 내 상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가족들도 수어를 안 쓰고, 구어 또는 필담을 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왜 태어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불만을 가지지마라. 누구나 태어난 이유가 다 있는 법'이라고 말해줬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꿔서 나 같은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고, 나중에는 가족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통역사의 매끄러운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말은 기자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석 센터장은 "내가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지만, 외국어를 잘 못 한다. 하지만 외국어가 안 된다고 해서 해외여행을 포기하겠는가?"라며 "외국어 못하는 관광객이 해외에 나가더라도 생활에 불편함 없도록 가이드를 받아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우리나라에서 석 센터장과 같은 청각장애인의 수는 약 39만 명. 5200만 인구 중에서 1%가 채 안 되는 비율이지만, 당사자들이 느끼는 고통과 불편은 형용할 수가 없다. 청각장애인들 중에는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 귀가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란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는 사례들이 많지만, 부모형제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면 가족의 도움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청각장애인들도 집에 혼자 있거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등 실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은행이나 병원, 관공서에 갈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청각장애인들이 이런 곳에 일이 있어서 찾아가면 마치 외국어 못하는 사람이 낯선 나라에 던져진 것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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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송파구수어통역센터 및 농아인쉼터에서 석승모 센터장(왼쪽)이 남진우 수어통역사와 영상 통화를 하고 있다. ⓒ 손병관


송파구수화통역센터의 직원은 총 10명. 청각장애인들이 영상전화를 걸면 통역사들이 단말기로 통화자의 수화 내용을 보고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평일(월~금)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센터로 연락하면 '야간긴급통역서비스'도 제공한다고 한다. 송파구통역센터의 일일 이용객 수는 30~50명 정도 됐는데,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10명 대로 떨어진 상태다.

석 센터장은 "집 전화로는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센터에 직접 찾아와서 용건을 얘기하면 전화를 대신 해준다. 전날 예약을 하면 병원이나 은행 등의 출장 서비스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40대 선천성 청각장애인 이아무개씨는 이 출장 서비스를 종종 이용한다. 역시 통역사를 통해서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한번은 나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병원에 갔는데 간호사와 필담을 하게 됐다. 그러나 문장이 조금 길어지니까 내가 못 알아듣겠더라. 반대로, 간호사는 내가 짧게 답하는 것을 못 알아듣더라. 어찌어찌 진료를 마쳤는데 간호사가 '다음에는 통역사 데려오지 않으면 진료가 힘들다'고 하더라. 

병원 가는 길에 통역사가 동행하니까 할 말을 다 할 수 있게 됐다. 병원에서는 영어 기반의 단어들이 많이 쓰기 때문에 수화통역에도 그만큼의 전문성이 필요더라. 내가 만약 교통사고를 당해서 경찰서를 가야하는데 경찰관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이럴 때도 수화통역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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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수화통역센터가?18일 오후 같은 공간에 농아인쉼터를 개소했다.?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15번째다. ⓒ 서울시 제공


송파구수화통역센터는 18일 오후 같은 공간에 농아인쉼터를 개소했다. 서울시에서는 15번째로서 청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전자식 한궁 게임기와 수어영상도서 등이 구비되어 있다. 간단한 공예품을 만드는 교양강좌와 일반인 대상의 수화교실도 개설되어 있다. 서울시는 2022년까지 25개 전 자치구에 이러한 농아인쉼터를 확대·개소할 방침이다.

청각장애인 이모씨는 "집에만 있으면 무료하다. 생활체육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 프로그램들을 직접 체험해보려고 왔다"며 "빨리 코로나19가 진정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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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문정동 송파구수어통역센터에서 회원들 상대로 ‘천연화장품 만들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 송파구수어통역센터 제공

#송파구수어통역센터 #농아인쉼터 #석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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