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면 새길수록 의미가 오묘한 선시 삼백 수

[서평] 석지현 스님의 '선시 삼백수'

등록 2020.11.23 13:52수정 2020.11.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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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한 됫박으로 튀밥을 튀기면 그 양이 한 말쯤으로 불어납니다. 하지만 같은 양의 옥수수로 조청을 고면 그 양이 몇 숟가락밖에 안 될 정도로 확 줄어듭니다. 양은 튀밥이 훨씬 많지만 달기는 조청이 훨씬 더 답니다.

튀밥은 옥수수 알갱이들이 한 톨 한 알 몸집을 부풀리며 튀겨지지만 조청은 이와 반대로 점점 졸아들고 농축돼 가며 단맛을 더해 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청이 갖는 단맛은 여느 단맛에 비해 진하고 깊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산문이 튀밥이라면 시는 조청 같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시구에 은유나 비유로 농축돼 있는 뜻과 의미는 점점 졸여지며 단맛을 더해가는 조청만큼이나 깊고 심오합니다.

시인 석지현 스님이 엮어 해설한 <선시 삼백수>
  

<선시 삼백수>(역주 해설 석지현 / 펴낸곳 민족사 / 2020년 11월 13일 / 값 29,500원) ⓒ 민족사

 
<선시 삼백수>(역주 해설 석지현, 펴낸곳 민족사)는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한 불교계 다작 작가, 석지현 스님이 중국의 선시 219편, 한국의 선시 81편 등 총 300편을 가려 뽑아 엮은 책입니다.

책은 23년 전인 1997년, 석지현 스님이 중국편 260편, 한국편 997편 일본편 174편 등 총 1431편으로 펴낸 <선시감상사전>에서 일본편은 모두 삭제하고 중국편과 한국편 중에서 고른 선시와 새로 찾은 선시로 엮은 내용입니다.

선시의 제목은 별도로 번역하지 않고 원제(原題)로 살렸고, 원제가 없는 것은 시 원문 가운데서 적합한 제목을 붙여 놨습니다. 책에서는 선시들의 출전을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책 뒤쪽에 작자들을 부록처럼 소개하고 있어 선시가 쓰인 시대적 배경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네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올해는 그 송곳조차 없어졌네 –187쪽-
 
1100여 년 전 사람, 향엄지한(?∼898)이 읊은 오도송입니다. 언뜻 점점 어려워져가는 형편(경제)을 신세타령하는 듯하지만 깨달음의 경지, '올해는 깨달았다는 그 희열감마저 사라져 버렸음'을 읊은 내용입니다.

깨달음의 정도를 송곳날만큼이나 뾰족한 시어로 한 점 군더더기 없이 사정없이 꿰뚫어 표현하고 있어 새기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마음 시리도록 사리게 합니다.


시어로 새기는 선시는 노릇노릇 구워진 가래떡만큼이나 풍부하고 의미로 새기는 선시는 두고두고 우러나는 조청의 단맛만큼이나 깊고 오묘합니다. 점점 쌀쌀해지며 밤 길어지는 요즘에 화롯불 뒤적이듯 한 수 한 수 읊어가며 새기다보면 마음은 어느새 따뜻해지며 밝아지고 책 읽는 맛은 시나브로 달콤해 지는 걸 느끼게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선시 삼백수>(역주 해설 석지현 / 펴낸곳 민족사 / 2020년 11월 13일 / 값 29,500원)

선시 삼백수

석지현 (옮긴이),
민족사, 2020


#선시 삼백수 #석지현 #민족사 #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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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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