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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의 YS, 설득의 DJ...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정상호 교수의 시대 세대 공감] 정치의 예술은 '입법'... 민주당의 개혁법안 전략은 무엇인가

등록 2020.11.24 19:21수정 2020.11.2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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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모습. ⓒ 연합뉴스


누군가 필자에게 한국의 정당정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장면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3당 합당(1990.1)을 꼽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호남은 하루아침에 고립됐다. 또한 '민주자유당'이라는, 개헌 저지선을 훌쩍 뛰어넘는 괴물 야당이 탄생했다. 대권욕에 눈먼 김영삼(YS)의 군부 세력(노태우와 JP)으로의 투항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민주당에서 신민당으로 이어진 전국적 선명 야당의 기치와 의미를 붕괴시켰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지긋지긋한 지역주의와 불신의 정당정치가 정치 갈등의 맨 앞에 서게 됐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의 거목인 양김(兩金:김영삼·김대중)은 한편 적지 않은 공통점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자칭 확고한 '의회민주주의자'였다. 물론 당시의 의회민주주의라는 푯말은 군사정권이 국시(國是)로 내걸었던 반공주의와 명확한 차이를 드러내 주는 동시에, 당시 여망이었던 자유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들은 실제로도 엄격한 의회주의자들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그들이 대통령이 된 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일이 자신들의 국정 목표 또는 대통령의 의제(presidential agenda)를 관철하기 위한 '입법'에 있었다는 데 있다.

YS와 DJ의 경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YS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던 뚝심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6개월 만에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시행(1993.8.12)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의회를 우회한 대통령의 긴급재정명령권 발동이 왜 의회민주주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까닭은 국회의 재무위원회(8.18)와 본회의(8.19)에서 대통령이 승인을 요청한 관련 명령안을, 자유토론 끝에 여야 합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서생(書生)의 문제의식, 상인의 현실감각'을 강조한 DJ는 개혁적 실용주의의 표본이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이후 통과시킬 법률 15가지를 메모해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가지고 다녔는데, 그 중 첫 번째가 국가인권위원회 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인권위법의 통과는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장애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관료적 저항에 있었다. 대통령 서슬이 시퍼런 임기 초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법무부는 인권위를 특수법인의 민간기구로 설립하고 법무부 산하로 두는 법안을 밀어붙였다. 줄다리기 끝에 시민단체 및 야당과의 협력을 주문했던 대통령의 설득으로 법무부 안은 폐지됐고 '합의제 독립기구'를 규정한 관련 법의 통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 출범 3년 만에 설립(2001.3)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제출과 폐기 반복하는 개혁법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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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 한정애 정책위의장이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동남권 관문공항 추진을 위한 긴급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국회의 의사 처리나 입법 과정을 잘 모를 수 있는 일반 국민들도, 자신들이 바라거나 또는 현안과 맞물린 어떤 법안이 국회의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익과 계층이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통과된 법률안보다 폐기되거나 부결된 법률안이 많은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10년 동안 제출과 자동 폐기를 거듭해온 소위 개혁진영의 단골 법안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주시민교육지원법안(가칭)이다. 주요 정치·사회적 이슈에 관한 학교에서의 토론 및 비판 교육을 규정하는 이 법안은, 15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거의 25년 동안 개혁진영(민주당+정의당+시민단체)이 매번 제출했지만 모두 임기만료 폐기됐다. 21대 국회에도 2개의 관련 법안이 제출된 상태다. 법안이 무산된 주요 이유는 대부분 야당과 보수적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대였다. 법안 의도를 '(법안 통과시 이는) 좌파 이념의 확산과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선전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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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대부터 지금까지 자동 폐기와 제출을 거듭해 온 소위 개혁진영의 단골 법안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주시민교육지원법안(가칭)이다.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또 다른 법안은 포괄적 차별금지법(가칭)이다. 이 법안의 취지는 "차별의 개념, 금지되는 차별행위의 유형, 차별의 판단기준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괴롭힘과 혐오 표현"에 대한 규제를 명문화하는 일반법, 실체법으로서 제정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던 이 법안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 입법(2007년)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7건의 법안이 제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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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달리 제출과 폐기가 거듭돼온 법안이 (포괄적) 차별금지법(가칭)이다.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최근에는 정의당(장혜영 의원 대표 발의)이 핵심 정책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동성애 합법화 법안'이라고 비난해온 기독교계의 극렬한 반대와 기성 정당의 관망 탓에 입법 전망은 밝지 않은 상황이다.


이 밖에도 이러한 개혁 법안들은 부지기수다.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은 15대 이후 현재까지 모두 15건이 제출됐는데, 그중 6건이 21대 국회에 계류 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주시민교육지원법과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히 지지한다. 그렇지만 이제 관심의 초점은 법안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가능한 입법전략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책이나 법안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을 앞세워 일부 의원들을 규합해 의례적으로 상임위에 관련 법안을 제출하고, 폐기·부결돼도 의석수나 '기울어진 운동장' 탓을 하며 자위하는 방식은 이제 그만둘 때다.

개혁 입법은 어떻게 가능한가? '입법 전략' 세 가지

그렇다면 어떻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화와 설득을 통해 민생·개혁 법안을 현실화시킬 것인가? 거기에는 세 가지의 해법이 있다.

하나는 금융실명제법이나 노사정위 법안과 같이, 국민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업고 여야 합의로 전격 처리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여론의 형성은 IMF 사태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나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전략의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여기에 해당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사례는 2018년 12월 산업안전법 전면개정안(김용균법) 통과였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2013년 1월 19일 성수역, 2015년 8월 29일 강남역, 특히 2016년 5월 28일 구의역 사고 발생 직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다.

법안 통과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야당과 경총의 반대가 있었지만, 당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한 김용균씨 사망 사고(2018.12.11) 이후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반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야는 본회의를 열고 재석 185명 중 165명의 찬성(반대 1명, 기권 19명)으로 산업안전법 전면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장시간을 거쳐 오랜 공론화 끝에 어렵게 통과되는 '시민단체 주도의 개혁 법안' 사례다. 일례로 한국의 여성인권의 역사는 '가족법 개정의 투쟁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여성운동의 30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 끝에 부계와 모계의 친권 범위를 동일하게 규정한 가족법이 개정(1989)됐고, 호주제가 폐지(2005)됐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1999), 부패방지법(2002),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2002) 등 다양한 개혁 입법들이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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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28일 국회에서 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마친 뒤 국회 본청을 나서며 환호하는 더불어민주당 당직자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하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마지막으로는 여야가 자신들의 열렬 지지 집단으로부터는 욕을 먹으면서 한 발씩 양보해 타협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떠올리는 우리의 뇌리에는 날치기와 직권 상정, 막말과 몸싸움의 불쾌한 기억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이나 민주화 이후에도 국회는 야합과 흥정이라는 핀잔을 자주 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절충과 타협의 장이었다.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박근혜 정부 이후 문재인 정부까지 여야 타협에 의한 입법 제정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대 최저 법안 처리율(42.8%)을 기록했던 19대 국회 때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도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극한 대립을 불러온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에서, 정책 추진력이 떨어지는 데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협치 및 설득 능력의 한계로 문재인 정부의 법안 통과율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치의 예술' 위해

우리가 유력 정치인과 평론가들에 쏟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입법에 관심을 가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먼저 촛불 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는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종교인과 일반 납세자와의 형평성을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민생개혁 법안을 과감히 통과시켜야 한다. 한편 시민단체는 더는 망설이지 말고 루소가 말한 '입법자로서 시민'의 의미를 복원하기 위해 '국민발안'과 '국민소환' 등의 직접민주주의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끝으로 정치권, 특히 정부와 여당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입법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예를 들어, 정부·여당은 민주시민교육지원법을 제정하기 위해 이를 총괄할 기구인 '민주시민교육원'(가칭)을 행정부 소속이 아니라 국회 산하에 둠으로써 학교를 급진이념의 선전장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야당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다.

또한, 논란의 한 가운데에 있는 민주시민 교육의 핵심 내용 중 하나를 야당이 주장해온 '자유민주적 기본질서'(헌법 전문과 제4조)로 삼음으로써, 진보와 보수 사이의 대타협을 가능하게 할 실용주의적 처방도 고려해볼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되 보수적 종교계와 야당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혐오와 괴롭힘'에 대한 처벌 규정을 잠시 유보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하버마스까지 색깔과 초점이 달랐던 위대한 사상가들의 공통된 주장은 오래 번성했던 국가의 필수적 요건은 탁월한 지도자가 아니라 선한 시민(good citizen)을 만들었던 좋은 헌법과 법률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의 입법은 예술의 정치이자 정치의 예술이다.
#입법 #차별금지법 #민주시민교육지원법 #입법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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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교사와 더불어 배우는 지방대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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