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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 끝에 선 고고한 너의 이름은

부여 정암리 백제기와문화관을 뜻있게 감상하는 법

등록 2020.11.28 16:49수정 2020.11.2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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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보면 재미가 없다. 건축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기와를 말하기란 너무 어렵고 재미없는 일이다. 기와보다는 백제기와문화관에 대한 소개를 하기 위해서 정암리를 세 번쯤 찾아갔다. 세 번째 갔던 날, 기와를 굽는 가마 앞에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 것 같은 정원 장식품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하필이면 찾아갔던 날마다 비가 내렸다.
 
기와는 사람으로 치면 머리카락과 같다. 헤어스타일에 따라 사람이 달라보이듯 건물은 기와에 따라 멋스러움이 달라 보인다. 기와지붕이 없는 옛 건축은 논할 수가 없다. 기와는 과학이며 예술작품이다. 건물의 지붕재인 기와는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하여 천년 세월을 견디며 고고한 자태로 남아있게 된다.

한적한 정암리에 백제기와문화관이 자리 잡은 이유
 

백제기와문화관 전경 백제기와문화관 모습, 비오는 날에만 방문해서 기와가 촉촉하게 젖은 모습이다. ⓒ 오창경

 
부여 장암면 정암리에는 백제기와문화관이 있다. 백제 기와의 역사와 제작과정 등, 기와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고 재현하고 체험도 하는 공간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장암면 정암리에 백제기와문화관이 자리 잡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백마강의 남쪽에 자리한 정암리는 백제시대 기와를 구웠던 가마들이 있던 곳이다. 백마강 건너 사비성의 사찰과 왕궁 등의 건축물에 기와를 만들어 납품했던 대규모 가마터였다. 정암리는 기와를 구워서 배로 운반하기에 좋은 위치와 땔감 공급이 편리하고 기와를 굽기에 좋은 흙이 나는 입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정암리 백제 기와 가마터에서는 기와뿐만 아니라 토기류와 상자형 전돌, 연목와가 출토되었다. 정암리 와요지에서 출토된 기와는 동남리 사지와, 관북리 유적 등 백제의 옛 사찰터와 건물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암리 와요지는 백제시대 건축물들에 공급을 했던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추정된다. 백제 기와의 모든 기술이 집약되었던 곳이 부여 정암리이다.

1987년 부여 대홍수는 부여 사람들에게 지금도 끔찍한 대참사의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정암리에서는 백제 가마터 10기, 고려 시대 가마터 1기가 발견되어 오늘날 백제기와역사관까지 건립이 되는 의외의 성과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기와가 본격적으로 사용됐던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주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기와집들이 들어서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 서기>에는 백제에는 와박사(기와박사) 라는 직제까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시대 기와 장인(匠人)인 와박사들은 부여 정암리 와요지에서 기와를 제작하는 것은 물론 건축물의 지붕에 기와를 올리는 기술까지 섭렵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만든 연꽃무늬 기와는 대표적인 백제 기와로 여겨지고 있다. 백제인들의 섬세하고 화려한 손기술은 기와제작에서도 빛을 발한다.

장식용 기와, 치미
 

왕흥사지에서 발굴한 치미 장식을 재현해 놓았다. 지붕이 아니라 지상에서 보아도 위풍당당하고 세련된 기품이 느껴지는 치미 장식. ⓒ 오창경

 

백제의 기와 장식 그냥 마당에 툭 던져놓았어도 기품이 있는 가드닝 장식처럼 보인다. ⓒ 오창경


백제기와문화관 마당에 그냥 툭 던져놓은 것 같은 정원 장식품의 명칭은 치미였다. 건물 입구에도 거대한 치미가 눈길을 끌고 있다. 치미는 솔개 꼬리 모양처럼 만든, 기와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던 일종의 장식용 기와였다.

2013년부터 발굴을 시작한 부여군 규암면 왕흥사지(사적 427호)에서는 용마루 양쪽의 치미 2기가 한꺼번에 발굴되었다. 높이 123m, 너비 74m의 웅장한 치미는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복원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백제기와문화관 마당에 있는 검은기와색의 치미도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치미를 축소 제작한 재현품이었고 입구의 것도 원형 그대로 재현한 치미였다.

치미의 모형만으로도 백제 건축의 우아하고 웅장한 매력이 느껴진다. 굳이 장식 기와라는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 자태만으로도 멋이 있다. 지붕에 올려서도 멋있는 장식이라면 지상에서도 영락없이 멋이 있다. 지상의 어느 곳에 던져놓아도 장식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 치미였다. 왕흥사지 치미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드닝 용품으로 개발해도 좋을 것 같다.
 

서동요 드라마 세트장의 치미 장식 2006년에 지은 서동요 드라마 세트장의 치미 장식은 왕흥사지의 것과 다르다. ⓒ 오창경

 
치미 장식은 삼국시대에 활발하게 주로 궁궐이나 사찰 등, 큰 건물에서 사용되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 지붕의 밋밋하기 쉬운 영역을 치미를 사용해 장식적인 효과와 더불어 재앙과 악귀를 막아주는 주술적 의미와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백제인들의 뛰어난 기와제작 기술은 일본까지 전해졌다. 백제 위덕왕 시절에 왕명에 의해 백제의 와박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사 창건에 필요한 기와를 만들었다. 백제의 와박사들이 일본에서 기와를 만들기 이전에는 기와가 출토된 적이 없다. 때문에 일본 최초의 기와를 만들어 전파시킨 일등공신은 백제의 와박사들이다. 이때 백제에서 유행하던 연꽃무늬 수막새가 전해졌다.
 

백제의 대표 기와. 연꼿무늬 기와 세련된 연꽃으로 장식한 백제 기와 ⓒ 오창경

 
한때 지붕에 기와를 얹는 대신 평평하게 콘크리트 시멘트로 마감을 하는 슬래브 지붕이 유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건축이 유행할 땐 기와의 세월도 끝이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전부터 슬래브 지붕에 다시 기와를 덮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와는 건축물을 보호하고 시각적인 효과도 있지만 기능적으로도 뛰어난 공법이었다. 와의천년(瓦衣千年)이라는 말은 기왓장에 낀 이끼가 천년을 간다는 뜻이다. 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은 천년의 세월을 견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여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와 파편들은 거의 정암리 와요지에서 구워진 것들일 것이다. 백제시대 왕실과 사찰의 건축에 기와를 공급했던 대규모 가마터였고 기와 제작의 달인들인 와박사들이 일본의 기와 건축을 최초로 전파했던 의의를 백제기와문화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백제인들의 유려한 예술적 감성은 역시 기와 건축의 백미인 치미 장식을 통해서도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다. 백제기와문화관을 방문하면 적어도 백제시대 대규모 건물의 기와지붕 장식인 치미 장식에 대해서만 알려고 하자. 그러면 건물의 이름에서 풍기는 학술적의 지식을 강요하는 듯한 재미없는 곳으로는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백제기와문화관의 마당 장식 백제기와로 마당을 장식해도 멋이 난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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